195화
* * *
조직의 보스,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뒷골목의 목로주점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도시 경비대를 앞두고. 그러나 그들이 일개 도시 경비가 아니란 사실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시의 경비 나리들께서, 이런 뒷골목 주점에는 뭣 하러 찾아오셨소이까?”
그리고 그림자 군주의 곁을 지나치며 마스터 바로가 되물었다. 두 사람 모두 후드를 깊게 눌러써 그들의 정체를 감춘 채였다.
“자유 도시동맹 내 각종 범죄 사주, 다수의 암살 및 납치 지시 혐의, 그리고 이스트 할렘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살해 행각과 실종 사태에 대해 너희들의 죄를 묻겠다!”
“어허, 시펄.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래. 누가 뭘 했다고?”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어 어깨를 으쓱였고,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후드 밑으로 불길하게 일렁이는 그림자가, 침묵을 깨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저와 저의 조직은, 그대들이 묻는 죄에 대해 무고함을 밝힙니다.”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는 듣는 이들을 동요하게 하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조직이라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곧 네놈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구나!”
“그럴 리가요.”
경비들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자가 입을 열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어도,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낄 수 있다.
“거듭 말했듯이 저의 조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실 경우 기꺼이 무고함을 소명할 용의도 있지요. 그러나…….”
그림자 군주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이지?”
데일이 미처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도시 경비대로 위장하고 있는 일부가 땅을 박찼다. 나머지 경비병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신속을 자랑하는 검객이었다.
“어허, 이것참.”
일곱 머리 의회가 자랑하는 자유 도시동맹 내 최고의 실력자, 의회 직속 집행부대 암월. 그 실체를 알지 못하고 도시 전설의 일종으로 치부될 정도로 비밀에 감싸여 있는 조직.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암월을 이끄는 대장 격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칼을 쥐고 있는 모양새가 영 심상치 않았다.
“어이쿠, 우리를 죽이기라도 하시려고?”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울러 땅을 박차고 쇄도하는 암월의 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일섬(一閃)이었다.
그러나 마스터 바로가 휘두르는 일격이, 사방에서 쇄도하는 암월의 일곱 자루 검을 ‘동시에’ 막아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휘둘러지는 검.
다음 일섬이 휘둘러졌고 마찬가지로 암월의 부대 일곱 명의 목둘레를 따라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아, 내가 이래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게 싫다오.”
허공에서 칼끝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내며 마스터 바로가 말했다.
“한 몸처럼 움직이다가는 한 몸처럼 뒤지는 법이지.”
“네놈……!”
그 모습을 두고 도시 경비대가 일제히 그들의 무장을 고쳐 잡았다. 머릿수는 많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상대는 머릿수 하나로 어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저와 전쟁을 하고 싶습니까?”
그림자 군주가 되물었다. 그의 등 뒤에서 일렁이는 불길한 그림자 총신(銃身)들을 뒤로하고.
데일이 걸음을 옮겼고, 그때마다 방어 대형을 갖춘 도시 경비대가 움찔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레이브 워커》들이 그림자 군주의 곁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지금까지 암월이 상대한 피라미 살수와는 격을 달리하는 자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도시 경비대 전체가 ‘암월’의 소속이라고 가정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아, 아아……!”
경비대의 대장이 겁에 질린 듯 당혹을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오호라, 칼이 녹슬고 퇴물이 됐다고 생각했더니. 참으로 정정하시구려.”
뒷골목 너머에서 기다렸다는 듯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아마포(亞麻布)였으나, 때가 묻고 더럽혀져 넝마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다.
아무렇게나 길러 흐트러진 장발의 남자였다. 거지꼴에 가까운 그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조금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까닭에.
“어이쿠, 이런 귀하신 곳에 어쩌다 이리 누추한 새끼가 오셨대?”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데일 역시 조용히 숨을 삼켰다.
누더기를 걸친 거지꼴의 남자였고, 그러나 그의 손에는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태도였다.
“모처럼 이 도시의 부르주아들께서 비싼 값을 치러주시겠다는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또 하나의 대륙 칠검, 방랑검(放浪劍)의 이명을 가진 검객이었다.
“누구 모가지에 그 비싼 값이 걸렸는지 알고는 지껄이는 소리신가?”
“그대가 섬기는 주군이겠지.”
방랑검이 말했고, 그림자 군주가 침묵을 지켰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나?”
침묵 끝에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마스터 바로, 그림자 속의 레이디 섀도우, 아울러 일대에 있는 《그레이브 워커》들이 당장이라도 쇄도할 듯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아, 그래서 방금 의뢰를 때려치웠소이다. 아무리 금이 좋아도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겠소.”
“……그럼 어째서 모습을 드러냈지?”
“소생, 의회의 뜻과 별개로 그저 ‘보스’의 검이 궁금해 좀이 쑤시는 까닭이외다.”
“나와 검을 맞대겠다는 것이냐?”
“허락해주실 경우, 기꺼이.”
“어허. 그렇게 아부리 털어놓고 나서, 모가지 치고 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락하겠습니다.”
“어이쿠, 이런.”
“그러나 그 전에, 몇 가지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 *
“아, 아아, 용서해 주십시오……! 데, 데일 공자님!”
일곱 개의 머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림자 군주에게 충성하는 《그레이브 워커》들이 일곱 머리에 칼날을 겨누었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자, 지금부터 전방을 향해 힘찬 복창을 실시한다.”
데일의 곁에 있는 마스터 바로가 말했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의회 직속 집행부대 ‘암월’의 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우리는 지금부터 보스에게 충성하는 똘마니들입니다!”
“어허, 소리가 졸라게 작다. 더 크게.”
“우리는 지금부터 보스에게 충성하는 똘마니들입니다!”
암흑가의 정점, 나아가 일곱 도시를 지배하는 이들조차 거스르지 못할 대부(Godfather)가 그곳에 있었다.
아울러 그의 정체를 깨닫고 나서, 어느 쪽에 고개를 박아야 할지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허, 이 친구들 아주 일관성이 있어서 좋아. 대가리 박는 각이 아주 그냥 칼 같네.”
마스터 바로가 손에 쥐고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웃었다.
“그렇지 않소, 의회 나리들?”
“제, 제발 자비를……!”
“용서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들 사이에서 그림자 군주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하나 묻지요, 방랑검. 누가 그대를 고용했습니까?”
“아, 저 나리라오.”
방랑검이 그의 칼집을 겨누었다. 일곱 머리 의회의 의장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방랑검, 네놈……!”
“어허, 소생이라고 별수 있겠소? 살검에 작센의 ‘검은 공자’까지…… 아주 그냥 황제 폐하를 죽이라고 의뢰를 하지 그러시오.”
“……!”
방랑검의 농담에 데일이 일순 표정을 찌푸렸다. 의장이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어디까지나 나머지 모두의 동의를 얻어 집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 그럼 모두가 공범이라 이거지.”
“그럴 리가요! 방랑검을 고용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의장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저, 저희는 그저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머리가 항의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림자 군주가 조소했다.
“그럼 하나를 지명해라.”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너희들의 죄를 대속(代贖)해서 하나가 책임을 짊어질 경우, 나머지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니.”
그 말에 칼날이 겨누어져 있는 일곱 머리 의회에서 사소한 동요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않았다.
일제히 손가락들이 겨누어졌다. 의장을 향하는 손가락이 셋, 저마다 척을 진 것으로 보이는 손가락이 넷. 가장 다수의 득표를 손에 넣은 것은 의장이었다.
“참 유감스럽게 됐수다. 조직의 수장이란 게 마냥 좋은 게 아니지.”
마스터 바로가 유감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였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어라 애걸하기도 전에 칼날이 휘둘러졌다.
“아, 이제 되었소이까?”
잘린 목이 바닥을 뒹굴었고, 방랑검이 물었다.
“의뢰주가 사라졌으니, 이제 그대로서 저를 죽여 얻을 이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요.”
데일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대답했다.
“아울러, 저와 검을 맞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외다.”
누더기 차림의 남자가 웃었다. 그대로 허리춤의 태도를 뽑아 들며, 넝마에 가까운 옷자락 매무새를 고쳤다.
“천하의 살검이 기꺼이 새 주군을 찾았다기에,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 말이오.”
“…….”
“나는 오래도록 주군을 찾아 방랑하고 있었소이다.”
방랑검,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며 남자가 말했다.
“기꺼이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자를 말이지.”
“그것은 그대보다 검(劍)이 강한 자를 말하나?”
그림자 군주가 되물었으나, 방랑검이 웃었다.
“그랬을 경우 내가 주군으로 모시는 것은 천검(天劍)이 돼야 했었을 것이오. 외에도 나를 검으로 꺾은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 당장에 신검조차 그렇지 않았소이까?”
방랑검이 대답했다. 신검 바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러나 검을 휘두르는 것은 기사의 몫이지, 주군의 몫이 아니라오. 거듭 말했듯이, 소생은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군주’를 찾고 있소이다.”
“그럼 그대가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군주란 무엇이지?”
그 말에 그림자 군주가 되물었다. 방랑검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그 사실을 알아볼 생각이옵나이다, 그림자…… 섭리와 진실의 군주시여.”
“……!”
그 말과 동시에 방랑검이 땅을 박찼다. 섬광에 가까운 속도로 검이 휘둘러졌으나, 그림자 군주가 그의 아바타를 전개하고 암혈의 칼날을 세워 올린 것은 더더욱 빨랐다.
카앙!
검이 맞부딪쳤다. 동시에 그림자 군주가 방랑검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아니, 응시하려고 했다.
데일의 동체 시력이 그의 그림자를 헤아리는 것보다 빠르게, 검이 짓쳐 들어왔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방랑검의 일격을 막아내기 무섭게, 다음 공격이 미끄러지듯 흘러들어왔다. 빨랐다.
“……!”
상대는 거리를 벌리고 여유를 부리는 마법사가 아니다. 하물며 데일이 아바타를 전개하기도 전에 앞서 일격을 내리꽂았다.
그가 데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데일이 가진 능력을 알고 있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쉽지 않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마음가짐으로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딛고 있는 발밑을 일대로, 냉기와 어둠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날의 희고 어두운 겨울밤이 아니었다. 용사가 쓰러진 그 날의 겨울밤 같은 것은 아이들 놀음에 불과하다.
우주의 겨울을 목격한 섭리와 진실의 군주가, 비로소 그의 세계를 덧씌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