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 *
“설령 이 몸이 오욕(汚辱)에 물들지라도, 제가 바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루지 못한 이상을……”
순백의 성처녀가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타앗!
흑색의 날개를 가진 레이디 섀도우가, 피스메이커를 쥐고서 땅을 박찼다.
“어이쿠, 시펄.”
그 모습에 마스터 바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럼에도 그림자 군주는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당신 따위가…… 무엇을 알고서 그깟 허울 좋은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동시에 순백의 성처녀를 휘감고 있는 거미줄의 포박이 풀렸다.
카앙!
다시금 흑백의 검이 맞물렸다. 순백과 칠흑의 날개를 가진 두 치품천사가, 가짜와 진짜의 검이 맞부딪쳤다.
칠흑의 날개를 따라 어둠이 휘몰아쳤고, 그에 맞서 여명의 빛이 포화를 내뿜었다. 에너지 상태의 공격이 격돌하는 와중, 그 사이로 날개를 펼치며 두 성처녀가 쇄도했다. 칼이 맞물렸고 빛과 어둠이 흩뿌려졌다.
“저는 보았습니다. 저의 이상이 가지고 온 참혹한 결말을, 브리타니아 섬에서 벌어진 지옥을……!”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맞부딪친 두 자루 검이 필사적으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바로 그때, 순백의 성처녀가 미소 지었다. 그 무엇과 비교할 바 없는 성처녀의 자비와 자애를 담아서.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잔혹한 현실 속에서 오렐리아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는 구제의 말이었다.
“…….”
칠흑의 오렐리아가, 그대로 검을 물리며 침묵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알 수 있는 동요였다.
“아니요, 제 잘못입니다.”
동요 끝에 칠흑의 오렐리아가 소리쳤다.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오롯이 패자의 몫이고, 저는 패배했으니까요! 모두 제 잘못이었습니다. 승리할 수 없는 선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의미가 있는 것이죠?”
“힘입니다.”
칠흑의 오렐리아가 대답했다. 비로소 그녀의 동요를 끝내고, 여느 때의 평정을 되찾으며.
“그날, 제가 ‘검은 공자’에게 패배한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었지요.”
강자는 전부를 손에 넣고, 패자는 전부를 잃는다. 적색 마탑이 그토록 부르짖는 힘의 논리는 곧 세상의 논리였다.
일찍이 브리타니아 섬에 지옥을 가져온 당사자로서, 그림자 군주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저의 주군께서는 힘이 있습니다.”
칠흑의 오렐리아가 말했다. 일말의 의심도 없는 믿음을 담아서.
“그림자 군주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거짓의 기수를 거느리며,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을 힘이 있지요.”
“…….”
“저는 그 힘 앞에 충성하고 그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이 증오스러운 나라, 제국의 파멸을 가져올 자는 오직 제 주군의 역할이니까요.”
“그 말대로입니다.”
침묵 끝에,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오렐리아 님, 저와 작센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일찍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성처녀를 쓰러뜨린 ‘검은 공자’로서.
“그림자 군주의 검이 되기로 맹세한 당신의 결정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데일이 순백의 성처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저 ‘어느 쪽의 성처녀’가 옳았는지는, 제국의 폐허 위에 서는 쪽이 답을 찾게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허,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쩌실 셈이오? 양손에 꽃이라도 들고 돌아가려 그러시나?”
마스터 바로가 중얼거렸고,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청색의 흑막이 그녀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줄 겁니다.”
─ 아, 기꺼이 군주님의 명령을 받들지요.
다크 엘프의 몸을 빌린 아라크네가 웃었고, 그녀가 그대로 팔을 뻗었다.
청색의 빛이 휘몰아쳤다. 냉기가 아니었다.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법, 일대를 잠식하고 있는 살덩어리의 결계를 파훼하는 디스펠 마법이었다.
어느덧 그곳은 왈라키아 백작성의 저택이었다. 악마를 강림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시체의 산을 쌓아 올린 지옥.
그러나 그 지옥의 악마들이 창조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결하게 빛나는 여신의 기수였다.
순백의 성처녀, 또 하나의 오렐리아.
─ 마침 새로운 성처녀님을 위해 딱 맞는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청색의 흑막이 웃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청색의 거미줄에 따라 움직이십시오. 여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그 뒤에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저를 통해 무엇을 바라고자 하는 것입니까?”
순백의 성처녀가 되물었고, 데일이 차갑게 대답했다.
“제 곁에 있는 그림자의 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함입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비로소 칠흑의 오렐리아가 숨을 삼켰고, 그러나 순백의 오렐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히 미소 지을 따름이다.
구국의 기수는 저항할 수 없는 악 앞에서 패배했다. 그것이 힘없는 정의의 말로이고, 힘이 없는 까닭에 그곳에서 벌어진 악의 유린마저, 오롯이 정의의 책임이 되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성처녀 오렐리아는 잔혹한 진실에 굴복했다. 힘 앞에 고개를 조아림으로써.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오렐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데일로서는 그저 지켜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제국이란 나라에 풀어놓을 혼란, 나아가 더럽혀지지 않은 아름다운 거짓이 가져올 결말에 대해서.
* * *
그즈음.
할렘시를 비롯한 도시 일대의 그림자 법정이, 정체불명의 지배자 앞에서 새로운 질서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도시의 뒷골목에 기생하고 있는 범죄 조직은 결코 그림자 법정이 다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 그림자 법정이 노골적으로 결집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 자유도시 동맹의 ‘일곱 머리 의회’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 법정의 살수들은 자유도시 동맹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 중 하나다. 그러한 세력이 뒷골목의 온갖 조직들을 무차별적으로 복속시켜, 합병하고 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녔다.
특히나 그들과 공생하며 도시를 ‘앞에서’ 지배하고 있는 이들로서는 더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로부터 얼마 후, 그림자 법정에 군림하는 모종의 지배자가 ‘일곱 머리 의회’에 서신 하나를 보내왔다.
“지금부터 자랑스러운 일곱 도시의 전통에 따라, 의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소.”
그 서신을 두고 의장이 입을 열었다. 정적 속에서 할렘시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머리가 입을 열었다.
“그림자 법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오러를 조금 쓸 줄 아는 조무래기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들 조직에 살검(殺劍)이 검을 사사하고 있다 하나, 그가 작센의 동토에 의탁했다는 소문을 고려했을 때…… 이곳까지 나타날 확률은 희박하지요.”
“그들의 영향력이 이 이상 커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에는 뒷골목의 무뢰배들. 늦고 이르고를 떠나, 어차피 청소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럼 그대들 모두, 우리의 도시에서 ‘그림자 법정’을 축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의장의 말에 나머지 머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우리 도시에서 그림자 법정을 축출하는 것에 대해 모두의 뜻이 일치했으므로…….”
이어지는 동의 속에서, 일곱 머리 의회의 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회 직속 집행부대 암월(暗月)을 소집하고, 아울러 그 남자에게 부대의 통솔과 임무를 의뢰하도록 하겠소.”
여차할 때를 대비해 자유 도시동맹이 숨기고 있는 비장의 카드.
어쨌거나 일곱 개나 되는 거대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아가 그 일곱 도시에서 비롯되는 재화로 할 수 있는 것들 역시 적지 않으리라. 설령 길드 시티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쓰레기를 청소하는 데 금화 몇 닢을 아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 * *
그것은 아주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으레 그렇듯 도시 내 범죄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도시 경비들이 벌이는 보여주기식 검문이었고, 따라서 도시의 중소 범죄 길드 역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의 명령에 따랐다.
벽을 따라 손을 대고 일렬로 늘어서, 수상쩍은 물품 따위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범죄 길드의 이들이 일제히 벽에 손을 짚고, 그들을 등지고 있는 경비들이 일제히 칼을 뽑기 전까지는.
의회 직속 집행부대의 검, 나아가 그들을 통솔하고 있는 어느 검객의 검이 휘둘러졌다.
* * *
할렘시를 비롯해 도시 곳곳에서 대대적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도시 일대를 급속도로 장악하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하부 조직이었고, 일부 소법정조차 그들의 검에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여전히 할렘에 남아 범죄 조직들을 조율하고 있는 데일로서는,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의회 직속 집행부대라고?”
“보, 보통 검이 아니었습니다!”
소법정의 살수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어 어깨를 으쓱였다.
“허허. 《결사》란 놈들이 애새끼들 납치하고, 멀쩡한 도시를 조져놓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뒷골목 쓰레기들 앞에서는 아주 그냥 자비가 없네그려.”
“그게 세상 사는 법이지.”
데일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쩌실 거요?”
“어쩌기는 뭘 어째.”
데일이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도시 경비대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그들이 숨어 있는 아지트, 공식적으로는 목로주점의 입구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아, 호랑이가 제 말을 듣고 찾아왔네.”
그 말을 듣고 그림자 군주가 몸을 일으켰다. 법정 내의 진짜 강자라 할 수 있는 《그레이브 워커》들이 모여 있는 조직의 핵심.
이곳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기가 이 도시 일대에서 그림자 법정의 수뇌란 사실은 사전에 파악한 모양이다.
그 증거로, 아지트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경비들의 숫자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방심을 유도하고 등 뒤를 치려는 얄팍한 수작이 아니었다.
“손님이 왔으니, 우리도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줘야지.”
“허허, 어쩌다 착하신 우리 공자님이 악의 길로 빠지셨을까.”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쾅쾅!
위협적으로 주점 입구를 두들기는 경비들의 소리가 들렸다. 경비병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필시 그들의 정체는 일개 경비 따위가 아니리라. 말마따나 일곱 머리 의회가 벼리고 벼린 정예 중의 정예들일 테지.
“기왕 악당이 될 거, 좀 그럴싸한 이름이 필요하겠는데.”
데일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뭐, 그림자 군주로는 부족하쇼?”
“그 이름을 내가 뒷골목에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 있겠냐?”
“흠, 그것도 그러네.”
마스터 바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목로주점 앞에 깔려 있는 경비들을 뒤로하고, 데일의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후드의 형태로 의태했다.
후드 밑으로 깔린 어둠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이곳에서 나를 부를 때는 보스라고 부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