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93화 (193/301)

193화

* * *

“당신의 존재는 거짓입니다.”

여섯 장의 흑익을 펼치며, 칠흑의 천사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섀도우, 오렐리아였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 앞에서 순백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성처녀 오렐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진실보다도, 저의 거짓은 더더욱 진실하답니다.”

“……!”

“추악한 진실에 굴복하고 몸을 맡겨버린 타락자여.”

순백의 오렐리아가 미소 지었다.

“부디, 우리의 이상(理想)을 위해서라도 비켜주시지 않겠어요?”

“이상이라고 하셨습니까?”

“제국의 폭정에 고통받고 있는 브리타니아 왕국을 구하고, 여신의 뜻을 세우는 것. 지금도 브리타니아 섬에서 고통받고 있는 조국의 백성들을 잊으셨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동시에 그녀의 표정에 깃들어 있는 것은 일말의 의심도 없는 결의였다.

“저는 마지막까지, 당신이 관철하지 못한 아름다운 거짓을 수행할 생각입니다.”

순백의 오렐리아가 말했고, 칠흑의 오렐리아가 침묵을 지켰다. 추악한 진실과 아름다운 거짓.

그 모습에 그림자 군주가 비로소 개입하려 할 때였다.

칠흑의 오렐리아가 말없이 팔을 뻗어, 데일을 제지했다.

“그 아름다운 거짓과 이상을 향한 맹신이, 브리타니아 섬에 가져온 결말을 알고서도 하는 말입니까?”

“누가 그 결말을 가져왔지요? 조국의 백성을 학살한 것은 당신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순백의 오렐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국입니다.”

“……!”

“우리의 이상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고결한 신념을 흙발로 짓밟은 것은, 누구도 아니고 제국과 당신이 꼭두각시를 자처한 저 그림자 군주가 아니었나요?”

“아, 아아, 성처녀시여……!”

그녀의 곁에서 질 드 레가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일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순백의 오렐리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악에 패배했다고 해서, 그것을 선(善)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것입니까?”

순백의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레이디 섀도우가 지그시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이지요. 저항할 수 없는 악 앞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

“고작 그깟 이유로 악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까? 성스러운 처녀여.”

순백의 물음에, 칠흑의 오렐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어째서 우리가 흘린 피에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까? 조국을 짓밟고 백성들을 학살한 것은 처음부터 제국이 아니었습니까?”

할 수 없었다.

“저는 제 존재가 거짓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숙명이 저항할 수 없는 악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저의 신념을 믿을 겁니다.”

순백의 성처녀가 결의를 굳히고 말했다.

“설령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선(善)이라 할지라도, 악에 저항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데일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순백의 성처녀가 가진 그림자 속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까닭에.

차라리 속이 시커멓고 검게 물들어 있는 악마의 피조물일 경우, 이야기는 쉬우리라. 그러나 아니었다. 세 악마가 창조한 저 순백의 오렐리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짜였다.

“저는 저의 사명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니 비키시지요, 거짓보다 거짓에 가까운 진실이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녀의 주군, 그림자 군주의 몫이었다.

“당신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작센의 동토에서 화형에 처해, 죽은 목숨이 되었습니다.”

“아, 역시 마지막까지 당신께서는 자신의 처신밖에 생각하지 않으시네요.”

“그럴 수밖에요.”

그림자 군주가 대답했다.

“세상에서 제 처신처럼 중요한 것도 달리 없으니까요.”

“참으로 낯짝도 두껍군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림자 군주가 조소했다.

“제 목숨은 이미 저 하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 군주의 목숨에는, 그대가 브리타니아 섬에서 흘린 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생명이 걸려 있지요. 그것이 제 목숨의 무게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저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힘을 손에 넣고, 이 제국을 무너뜨릴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쉽게 죽어줄 수는 없지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비로소 순백의 날개를 가진 성처녀가 그녀의 검을 고쳐 잡았다. 칼끝에 서린 성광이 휘몰아쳤고, 그림자 군주 역시 어둠과 냉기의 포격을 영창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땅을 박찬 것은 칠흑의 오렐리아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가 휘둘러졌다.

순백의 천사와 칠흑의 천사가 격돌했다.

카앙!

순백의 오러와 핏빛의 오러가 격돌했다.

카앙!

“아아, 감히 성처녀님의 존체에 손을 대려 하다니!”

바로 그때, 질 드 레 역시 비로소 그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일찍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보여준 아바타가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살육 끝에 구제를 손에 넣은 광신자였고, 그것이 그의 사상에 새 바람을 불러왔으리라.

강철의 수호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감히 성처녀님을 상처 입히지 못할 것이다!”

수 미터의 거구. 육신을 휘감고 있는 육중하다 못해 터질 것처럼 두툼한 강철의 거대 갑주. 그것은 갑주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강철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다시금 성처녀를 잃을 수 없다는 기수로서의 맹세였고, 그의 손에 들린 육중한 철퇴가 휘둘러졌다.

쿠웅!

칠흑의 오렐리아가 흑색의 날개를 펼치며 물러났고, 그 앞에서 질 드 레가 대방패를 내리꽂았다.

“아무도 이 앞을 지나갈 수 없다!”

“어허, 상황 참 좆같게 되었수다.”

그 모습을 보며 마스터 바로가 고개를 긁적거렸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데일이 되물었고, 마스터 바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야…… 하도 쓰질 않다 보니, 이제는 아바타 쓰는 법도 까먹을 지경이 돼버려서 말이오.”

“그럴 필요 없다.”

그러나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그녀의 앞에 있는 성처녀와 질 드 레의 위협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적은 아니다. 그 사실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군주의 결정은 달랐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진실을 신뢰할 수 있는 까닭에.

“물러나시지요, 성처녀님.”

“……!”

데일이 말했다. 그녀의 기사를 향해서. 그날 이후 좀처럼 입에 담지 않은 이명을 부르며.

칠흑의 성처녀가 물러났고, 순백의 방패를 자처하는 수호기사 질 드 레 앞에서 데일이 말했다.

“저는 당신의 거짓을 믿습니다.”

“…….”

“세 악마가 당신을 창조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신과 구국의 기수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순백의 성처녀, 오렐리아가 대답했다. 일찍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는 더 이상 그 시절의 미숙한 소녀가 아니니까요.”

오렐리아가 대답했다. 데일이 그러하듯, 데일의 곁에 있는 레이디 섀도우가 그러하듯, 세 악마가 창조한 오렐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협상을 하지요.”

데일이 말했다.

“그대들의 행동이 저와 작센의 처신(處身)에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저는 그대들을 무사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드리고자 합니다.”

레이디 스칼렛이 어째서 데일을 이곳으로 끌어들였고, 그에게 뒤처리를 맡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조차 이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혼란이란 것은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데일의 앞에 있는 또 하나의 성처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혼란의 사도를 자처하리라. 그녀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그렇기에 그대들께서는, 제 통제 아래 놓일 수 있도록 마땅히 ‘목줄’을 차셔야 할 겁니다.”

“감히……!”

강철의 수호기사 질 드 레가 노호했고, 순백의 성처녀는 침착했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청색의 흑막이여.”

데일이 입을 열었다. 동시에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랐고, 데일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산의 암살자 하나가 청색의 꼭두각시로 거듭났다.

─ 부르셨나이까, 우리의 군주여.

“너의 거미줄이 필요하다.”

데일이 말했다.

“그 거미줄을, 성처녀와 이 남자에게 묶어 나의 ‘눈과 귀’가 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나?”

─ 아,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나아가 그들을 춤추게 하는 꼭두각시의 실이 될 수도 있답니다.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탑주, 아라크네가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데일이 말했다.

“그녀의 존재는 당신의 목줄이 될 것이며, 동시에 그대들을 지켜줄 어둠 속의 조력자가 될 테니까요.”

“……청색의 거미줄이라고 하셨습니까.”

순백의 성처녀가 되물었다.

“그 거미줄에 묶여, 제가 당신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지요.”

그림자 군주가 차갑게 대답했다.

“제가 그럴 마음을 먹을 경우, 이곳에서 성처녀께서는 절대로 살아나갈 수 없습니다.”

“…….”

순백의 성처녀가 침묵을 지켰다. 지금 데일의 앞에 있는 성처녀는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데일의 곁을 지키는 레이디 섀도우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림자 군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곁에 있는 전력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성처녀가 덧없이 미소 지었다. 저항할 수 없는 악이 그곳에 있고, 그 악에 기꺼이 맞서 싸우겠다는 듯이.

“지금 당장으로서는 청색의 거미줄에 몸을 맡기고, 훗날을 기약하십시오.”

그러나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악마처럼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 부디 군주님의 뜻대로.

청색 마탑주, 아라크네가 손가락을 튕겼다. 일찍이 세피아가 보여준 청색 불협화음처럼, 청색의 입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졌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입자 사이가 이어지며, 그대로 거미줄이 되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질 드 레가 그의 철퇴를 휘둘러 저항하려 했으나, 그것은 힘으로 깨트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법조차 예외가 아니리라.

거미줄이 촉수처럼 성처녀와 그녀의 수호기사에게 휘감겼고, 그것은 애초에 저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

거미줄에 묶여 있는 순백의 오렐리아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림자 군주가 두 사람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스릉.

동시에, 허리춤에 묶여 있는 칠흑의 마검 ‘기아’를 뽑아 내리꽂았다.

푸욱!

“……!”

성처녀의 곁을 지키는 강철의 수호기사, 질 드 레를 향해서.

“네, 네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속삭였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나 ‘그의 죄업’에 대해 대가를 치렀을 따름입니다.”

““질 드 레 경……!””

당혹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는 것은 순백의 성처녀 하나가 아니었다. 두 명의 오렐리아가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일찍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그 무엇보다 충실한 기수를 자처한 수호기사의 이름을.

“이 지옥의 살덩어리를 보십시오. 하나같이 신심 깊은 남자아이의 육신을 제물로 삼아 창조한 이계입니다.”

“서, 성처녀시여…… 아아, 오렐리아 님……!”

두 명의 오렐리아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질 드 레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저는 마지막까지, 마지막까지 당신을…….”

촤악!

그러나 그 말이 끝나는 일은 없었다. 그림자 군주의 검이 휘둘러졌고, 그 검에 깃들어 있는 것은 종말의 냉기였다.

이 세상의 그 어느 오러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소멸의 냉기.

질 드 레의 육신 하나하나가 입자 레벨에서 해체되며, 잿더미조차 남기지 않고 스러졌다.

섭리의 끝에서 가져온 소멸의 냉기를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물었다.

“순백의 성처녀여, 당신의 존재는 그 태생부터 죄 없는 어린 독신자들의 피와 악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거미줄에 묶여 있는 순백의 성처녀가,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그 더러움 속에서도 기꺼이 당신의 이상을 수행하려는 것입니까?”

데일이 물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끝에, 순백의 성처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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