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 *
고위 마법사가 사상의 세계를 펼치듯, 불과 피의 지옥이 일대를 뒤덮었다.
강마(降魔)의 의식.
광기에 찬 웃음과 비명이 울려 퍼졌고, 구역질이 날 것처럼 혐오스러운 풍경이 일대를 뒤덮었다.
발을 딛고 있는 대지 일대가 살아 있는 살덩어리로 뒤바뀌어 꿈틀거렸고, 《결사》의 멤버들이 있는 마법진이 핏빛의 마력을 내뿜었다. 마법진과 그 외부를 격리하는 결계처럼.
살덩어리의 대지 곳곳이 폭발하듯 찢어지고, 피가 흩뿌려지며 그 속의 내장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물의 체내에 있는 것처럼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것들이 기어 나왔다.
“아, 아아…… 전능하신 악(惡)이시여!”
《결사》의 멤버 하나가 황홀하다는 듯 무릎 꿇었다. 찢어진 살덩어리의 대지 속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아악!
동시에 살덩어리를 찢고 촉수 다발이 솟아 일대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 사실마저 그들의 광기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이상 없을 수 없는 희열 속에서 황홀하다는 듯이 울부짖을 따름이다.
세 악마가 그곳에 있었다. 무척이나 알기 쉬운 형태의 악마였다. 뿔이 달렸고, 유황 냄새를 흩뿌리며, 박쥐의 날개에 꼬리를 가진 스테레오 타입의 악마상.
악마들이 웃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로 주위를 둘러볼 따름이다.
그 모습에 데일이 비로소 침묵을 깨고 그림자 총알을 내리꽂았다. 그러나 총알이 내리꽂히는 동시에, 살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대지에서 육벽(肉壁)이 솟아 데일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
동시에,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싶은 것을 말하라.」
「느끼고 싶은 것을 말하라.」
「되돌리고 싶은 것을 말하라.」
악마들이 《결사》의 이들을 향해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쾌락, 쾌락을 알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쾌락을!”
서로가 자기 차례라는 듯 앞다투어서.
“쾌락을 느끼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쾌감을!”
마찬가지로 나머지 이들 역시 똑같았다.
오직 하나의 남자를 제외하고.
“성처녀를…… 다시 이 땅에 되돌려주십시오!”
왈라키아 백작, 질 드 레가 소리쳤다.
“여신께서는 저의 기도를 이루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악마께서는 가능하시겠지요!”
이 이상 없을 수 없이 필사적으로.
“아무리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제 기도는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여신의 침묵일지, 신의 부재일지 확신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부름에 기꺼이 여신이 응답할 경우, 그녀의 존재는 사실이 될 테니까요! 그러나 마지막까지 여신께서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참고 있는 억울함을 터뜨리듯이.
“그러나 악마는 아니지요. 악마, 악마는 존재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세상이 이토록 지옥 같고 끔찍할 거란 설명이 불가능하니까요! 악마입니다! 처음부터 성처녀께서는 악마의 꼭두각시에 놀아났고, 이 세상은 악마가 유린하는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때였다.
“질 드 레 경.”
침묵 끝에, 흑색 갑주 차림의 여기사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섀도우, 오렐리아였다.
“그것을 악마에게 바랄 필요는 없습니다.”
“……!”
그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으리라.
동시에 데일 일행과 악마를 가로막고 있는 살덩어리의 벽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질 드 레가 고개를 돌렸다.
“저는, 이곳에 살아 있습니다.”
레이디 섀도우가, 그녀의 흑색 투구를 벗었다.
잊을 수 없는 성처녀 오렐리아의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림자 속에서 충성하는 꼭두각시의 검이 아니었다. 일찍이 데일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마주친 구국의 기수,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오렐리아…… 님?”
질 드 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디를 보시나요?”
그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
질 드 레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를 향해서.
순백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여기사가 있었다. 이 세상의 고결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은 금발의 여기사, 성처녀 오렐리아였다.
촤아악!
순백의 오렐리아가 그녀의 검을 휘둘렀다. 이름 없는 자의 검이 휘둘러졌고, 그 칼날이 향하는 것은 왈라키아 백작과 함께하고 있는 《결사》의 이들이었다.
검이 휘둘러졌고, 그 검 앞에서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 그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악(惡)의 길에 빠지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발악조차 ‘순백의 오렐리아’에게는 닿지 못했다. 성처녀의 검이 빛의 성광을 내뿜었고, 그 빛에 《결사》의 이들이 덧없는 그림자처럼 스러졌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괴물들의 비명이었다.
“이, 이럴 리가……!”
마지막으로 순백의 검이 악마술사의 목을 쳐냈다. 그가 무어라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피가 울컥울컥 흩뿌려졌다.
피바다 속에서, 성처녀 오렐리아가 미소 짓는다.
“아, 아아, 저는……!”
질 드 레가 오렐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데일의 곁에 있는 흑갑의 여기사가 아니라, 그들 세 악마가 창조한 거짓의 성처녀를 향해서.
“참으로 괴로우셨겠지요, 질 드 레 경.”
순백의 오렐리아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비로소 데일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저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 아직 당신의 죄업을 돌이키기에 늦지 않았습니다.”
“서, 성처녀시여……!”
“자애와 자매의 여신 앞에서 함께 회개하지요. 제가 당신의 죄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거짓의 성처녀가 상냥하게 속삭였고, 질 드 레가 무릎을 꿇었다.
“부, 부디 저의 불신(不信)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매신이시여! 이제야 비로소 당신의 자애와 자매를 이해하겠나이다!”
바로 그때, 침묵을 깨트린 것은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성처녀였다.
신을 향하는 믿음을 저버린 채 그림자의 칼날을 자처하는 그림자의 검.
레이디 섀도우가 쇄도했고, 그 칼날을 막아서는 것은 마찬가지로 순백의 성처녀였다.
카앙!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쳤다. 순백과 핏빛의 오러가 교차했다.
“어찌하여 제게 검을 휘두르십니까, 타락자여.”
순백의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그대 역시 악의 길로 타락하신 겁니까?”
“…….”
칠흑의 오렐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그저 과거의 망령에 불과했기에. 아니, 망령조차 아니다.
이 존재야말로 이곳의 괴물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강마(降魔)의 피조물, 그 자체였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순백의 오렐리아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자, 다시 힘을 합치지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여신의 뜻에 따라, 이 땅에 브리타니아 왕국을 다시 세우는 것.”
그야말로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대 홀로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둘이서는 가능합니다.”
“…….”
순백의 오렐리아가 말했고, 칠흑의 오렐리아가 침묵을 지켰다. 침묵 끝에 오렐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녀가 말했고, 순백의 오렐리아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다시금 그녀의 칼에 순백의 이채가 어렸고, 그러나 그때였다.
“거기까지다.”
칠흑의 오렐리아, 레이디 섀도우를 가로막으며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서 휘둘러지는 또 하나의 오렐리아를 향해서.
그녀가 휘두르는 빛의 검을 향해 그림자 군주의 일검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어둠과 냉기가 빛을 집어삼켰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스릉.
정적 끝에, 그림자 군주가 그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순백의 빛이 어려 있는 검이었다.
옛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
이계의 심상을 투영하고 있는 모조품이 아니다. 아울러 지금의 데일은 미숙하기 그지없는 시절의 그조차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 옛 이계의 용사가 비로소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어째서 저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순백의 오렐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말에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왈라키아 백작님.”
조소하며 데일이 말했다.
“그대가 그토록 찾아 마지않는 성처녀께서는, 바로 이곳에 계십니다.”
그림자 군주의 곁을 지키는 레이디 섀도우를 향해서.
“하, 우습구나……!”
그럼에도 질 드 레, 왈라키아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릴 다름이었다.
“그깟 거짓으로 감히 이 몸을 미혹하려 드는 것이냐! 나는 알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오렐리아 님을 곁에서 모신 나이기에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성처녀께서는 결코 흑색의 갑주로 자신을 더럽히시지 않을 사람이며, 그것이 그녀의 고결함이란 것을!”
“바로 그 말대로입니다.”
질 드 레의 곁에 있는 거짓 오렐리아, 순백의 성처녀가 미소 지었다. 동시에 다정하게 질 드 레의 뺨을 쓰다듬으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저는 이곳에 있고, 저 앞의 존재들은 그대가 타락한 악마들의 미혹과 속삭임에 불과하지요.”
“아아, 성처녀 님……!”
순백의 성처녀가 속삭였고, 질 드 레가 황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느덧 그를 제외하고 《결사》의 이들은 남아 있지 않다. 모두가 성처녀의 검에 쓰러졌으니까. 그것이 악마의 뜻일까. 그림자 군주가 침묵하며 무장을 고쳐 잡았다.
“겨우 이 정도였나?”
순백의 성처녀와 왈라키아 백작을 앞에 두고, 데일이 물었다.
“그대들이 말하는 강마의 의식이란 것이.”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그랬나.’
엄밀히 말해 강마의 의식은 성공했다. 그럼에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
최초의 의식을 통해 악마를 손에 넣은 것은 오로지 하나, 레이디 스칼렛이었다.
진화의 악마, 궁극생물.
그 존재가 바로 그녀의 뱃속에 잉태되었으니까. 처음부터 적색 마탑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머지 일들의 뒤처리를 데일의 손을 통해 일임하려는 거겠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는 짓거리는 지긋지긋하다. 아울러 백일몽 앞에서 춤추는 짓거리도 마찬가지겠지.”
데일이 말했다. 비로소 마스터 바로와 레이디 섀도우가 그의 등 뒤에서 검을 고쳐 잡았고, 그것은 《그레이브 워커》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데일, 그림자 군주가 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를 빙글 돌렸다.
용사의 검,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역수(逆手)로 고쳐 잡았다.
“이 검을 쥐십시오, 오렐리아 님.”
“……!”
데일의 말에, 칠흑의 오렐리아가 일순 숨을 삼켰다. 그녀 역시 데일이 쥐고 있는 검의 진명을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이것은 저에게 어울리는 검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겠지요.”
그림자 군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 검으로 당신께서 생각하고, 바라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 말에, 칠흑의 오렐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림자 군주가 넘겨주는 평화의 중재자를 받고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촤아악!
일섬이 휘둘러졌다.
빛이 휘몰아쳤고, 빛무리 속에서 칠흑의 오렐리아가 그녀의 아바타를 드러냈다.
칠흑으로 물들었으나, 그럼에도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치품천사(熾品天使)의 그것이었다.
그에 맞서, 나머지 세 악마가 창조한 거짓의 성처녀가 날개를 펼쳤다.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 고결한 순백의 날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