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91화 (191/301)

191화

* * *

밤하늘을 따라 레이디 스칼렛이 박쥐 날개를 펼치며 비상했다. 얼핏 보기에는 그녀야말로 진짜 악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풍경이었다.

백작령의 밤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그림자를 보고 나서, 데일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 군주의 명령에 따라 《그레이브 워커》는 이미 왈라키아 백작령 일대를 장악했다. 그렇기에 오렐리아가 그녀의 등 뒤에 숨어, 겁에 질린 하녀를 보며 말했다.

“이 이상 그녀가 함께하는 것은 위험할 겁니다. 법정의 살수나 산의 암살자에게 그녀를 맡기도록 하지요.”

오렐리아의 말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렐리아 님의 뜻대로 하지요.”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앞서 말을 꺼내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마침 성의 중정에 대기하고 있는 다크 엘프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할렘시에 있는 법정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십시오.”

“존명(尊命).”

산의 암살자가 고개를 숙였고, 이내 겁에 질린 하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그녀가 당신을 지켜드릴 겁니다.”

“고, 고마워요……! 데일 공자님! 그, 그리고 여기사님도!”

하녀가 두 명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레이디 섀도우가 흑색의 투구 밑으로 침묵을 지켰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겠지요.”

데일이 말했고, 살검과 레이디 섀도우가 그들의 검을 고쳐 잡았다.

아울러 그림자 군주의 명령에 따라 일대를 지키고 있는 《그레이브 워커》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 법정의 고위 살수, 아울러 제국 각지에서 활약하는 산의 암살자들로 이루어진 데일 직속의 첩보대.

왈라키아 백작령은 이미 데일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데일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거미라고 생각하는 이들처럼 거미줄에 걸리기 쉬운 먹잇감도 없다는 것을.

최후의 최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옮겼다.

레이디 스칼렛은 이미 ‘하나의 악마’를 잉태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는 세 악마들이 남아 있었고, 동시에 성처녀의 과거를 괴롭히는 망령 역시 그곳에 있었다.

망설여야 할 이유는 무엇 하나 없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왈라키아 백작성의 그레이트 홀. 그림자 군주와 그의 두 자루 검, 나아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산의 암살자들이 걸음을 옮겼고,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이란 말에 부족함이 없는 끔찍한 광경을 뒤로하고.

“어이쿠, 이런 시펄.”

마스터 바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시체들이, 그레이트 홀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잘린 상체가 샹들리에처럼 회당 곳곳에 매달려 있었고, 육체의 조각들이 마치 과격한 그로테스크 오브제처럼 사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팔, 다리, 내장, 머리와 몸통…….

“악마가 강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옥이지요.”

그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왈라키아 백작이 웃었다.

“그들이 아무리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어도, 이 지옥을 장식하는 희생자 중 누구도 응답을 해주지 않았답니다.”

“그게 너의 일방적 학살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일방적 학살이라니, 그럴 리가요! 저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지요.”

데일의 조소에 왈라키아 백작이 터무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자매신의 자애와 자비가 그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기꺼이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고 기도할 기회를 말입니다. 아주 공평한 기회였지요!”

“…….”

다시금, 데일의 곁에 있는 오렐리아의 동요가 느껴졌다. 갑주 밑으로 숨겨진 그녀의 동요를 아마 저 남자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그 사실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그 공평한 게임의 결과가 이것입니다. 이 이상 여신의 부재(不在)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지옥을 장식하는 신체의 오브제는, 하나같이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남자아이의 육체들이란 것을. 다시금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여신이 이 세상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신이 없는 세계였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두 팔을 펼치며 왈라키아 백작, 질 드 레가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타앙!

데일의 그림자 속에서 섀도우 불릿이 내리꽂혔다. 무영창의 일발(一發) 저격. 이 이상의 헛소리를 들어줄 여유는 없다는 듯이. 과장되게 팔을 뻗고 있는 왈라키아 백작이 아니라, 그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는 ‘신사’에게.

총알이 그의 마스크를 찢고, 달걀귀신처럼 매끄러운 살덩어리 위로 내리꽂혔다. 아니, 총알이 박혔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의 얼굴이 터져나갔다.

아울러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해제한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다시금 암혈의 육체를 휘감았다.

그림자 군주 자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진실의 눈’이 그들을 응시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각오로 될 일이 아니리라. 그들의 그림자와 무게를 헤아리는 의미를 알고 있기에.

그럼에도 데일이 각오를 굳혔다.

“헛소리를 들어주는 것은 여기까지다.”

“공자님에게는 아무래도 조금 지루한 장광설이 되었나 보네요.”

바로 그때, 얼굴이 터져나갔어야 할 ‘신사’가 말했다. 여전히 달걀귀신 같은 얼굴에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서, 너무나도 멀쩡하게.

“…….”

예상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그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진실의 눈이 신사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 속에 있는 진실을 엿보기 위해서.

그랬어야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 진실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신사의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일의 세계 그 자체가 어둠에 휩싸였다. 비유나 무엇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데일이 가진 시각(視覺) 그 자체가 사라졌다. 마치 장님이 되어버린 것처럼.

“무엇이 진실입니까?”

어둠 속에서 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오감에 의존해 받아들이는 감각 정보로,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의 진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냉정하게 상황을 헤아릴 따름이다.

“어느 강력한 능력을 갖춘 악마가, 우리의 감각을 속여 거짓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것은 데일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사실 우리의 육체는 오래전에 소멸했고, 뇌밖에 남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그 뇌가 죽지 않고 통 속에 담겨, 악마 내지는 마법사들이 우리의 뇌를 조작하며 거짓 정보를 주입하고 있는 겁니다.”

신사가 말했다.

“──이것을 부정할 증거가 있습니까?”

미혹(迷惑)의 악마. 데일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란 기억으로 살아가는 생물이다.”

데일이 대답했다.

“설령 그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 할지라도.”

그를 휘감고 있는 미혹 속에서, 망설일 것은 없었다.

“네 말처럼 내가 통 속의 뇌에 불과하고, 악마의 꼭두각시라고 가정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필사적으로 춤을 출 따름이지.”

쨍그랑!

동시에 일대를 휘감고 있는 어둠이 깨져나갔다. 빛이 돌아왔다. 오감의 하나가 활성화되었고, 비로소 그 앞에 있는 신사의 진실이 드러났다.

“……!”

달걀귀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존재 자체가 미혹이었다.

“그쪽이 진짜였나.”

데일이 그림자를 보며 웃었다. 그림자 위로, 겁에 질린 ‘땅딸보’가 숨어 있었다.

미혹과 정신 조작의 마법.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청색의 마법을 쓰고 있군.”

“아, 아아……!”

달걀귀신의 살덩어리를 가진 신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마치 어설프기 짝이 없는 꼭두각시처럼.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는 미혹 너머의 진실, 땅딸보가 추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것도 보통 실력이 아니네. 아니, 이제는 보통 실력이 돼버렸나.”

“네깟 놈이 감히……!”

그림자 속의 땅딸보, 신사가 다시금 그의 마법을 펼치려 할 때였다.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랐다.

─ 아,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가엾은 쥐새끼야.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산의 암살자로 데일에게 충성해야 할 다크 엘프가,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속삭이고 있었다.

청색의 흑막, 아라크네의 목소리를.

“히, 히익……!”

그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땅딸보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어, 어머니……!”

─ 내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니?

산의 암살자에게 깃들어 있는 청색 마탑주가 웃었다. 거짓과 모략의 정점, 정신 조작 마법의 대가. 비록 육체를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도의 정점 중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 아, 총명하신 공자님. 부디 그대들의 일을 수행하시지요.

동시에 아라크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신의 용무는 어디까지나 이 남자 하나란 듯이.

“처음부터 그게 용무였나?”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 그럴 리가요.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림자 군주를 지켜드리는 것. 달라질 것은 없답니다.

“…….”

─ 오히려,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해야 할 쥐새끼가 군주님을 해하려 들었다는 것이…… 참으로 송구스러울 따름이지요.

“그랬나.”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사가 말하는 진실, 그의 감각을 속이고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모략과 거짓의 정점, 청색 마탑주의 짓이었으니까.

“트라우마에 시달려도 이상하지 않겠지.”

─ 속삭임을 물어오는 것이 이 아이들 ‘호문쿨루스(Homunculus)’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그 의의를 잃어버린 쥐새끼는 필요하지 않지요.

청색 마탑주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아, 아아, 싫어……! 그,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시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어머니!”

신사라 불린 남자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저항할 일말의 의사조차 없이.

─ 아, 걱정하지 말려무나. 곧 네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 사실마저 잊어버릴 테니까.

악마는 멀리 있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청색 마탑주가 팔을 뻗었고, 거미줄이 휘감겼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거미줄이 그의 육체를 칭칭 휘감고 동여매기 시작했다. 거미줄의 고치 속에 갇혀버린 먹잇감처럼.

남아 있는 《결사》의 멤버들 역시, 뜻밖의 상황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맥없이 끝날 줄이야.’

그림자 군주가 조용히 혀를 찼고, 바로 그때였다.

“그럼 강마의 의식을 시작하지요, 신사 제군.”

침묵 속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 하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악마술사 프렐라티의 이름을 가진 자였다.

─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그림자 군주시여?

그 모습을 보고 청색의 흑막이 즐겁다는 듯 되물었다. 그녀로서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그러나 데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부터는 우리 일이다.”

8서클의 청마법사. 그녀의 존재는 곧 데일의 아버지가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그들 마탑주의 힘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는다.

─ 아, 기꺼이 그리 하지요.

훗날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 강자로 거듭나야 할 데일이기에.

바닥에 새겨져 있는 핏빛의 마법진이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마법진 속에 있는 《결사》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고, 그럼에도 데일은 그들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어허, 뭐 주문 중에는 공격하지 말란 룰이라도 있었소?”

“보고 싶지 않나?”

마스터 바로가 암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신이 없는 이 세계에, 악마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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