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90화 (190/301)

190화

* * *

때가 되었다.

그 말과 동시에 데일이 성의 유리창을 깨트리고, 밤하늘을 향해 적색의 불꽃을 쏘아 올렸다. 전쟁터에서 기습 신호 따위를 보내기 위해 사용되는 마법 불꽃이었다.

체내를 타고 흐르는 냉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 있는 화로(火爐)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일찍이 장미 전쟁에서 헤아릴 수 없는 퓨리파이어들을 집어삼키고 흡수한 불의 정수와 핏빛 마력.

신호가 울려 퍼졌고, 동시에 실내 일대에 불길하기 그지없는 어둠의 마력이 깃들었다.

데일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아, 아아……!”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 절규에 하녀가 겁에 질린 채 파르르 떨었고, 그녀를 향해 레이디 섀도우가 말했다.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슬며시 흑색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며, 그 속에서 성처녀의 미소가 하녀를 맞이했다.

“자매신의 자애와 자비에 걸고 약속하기를, 제가 당신을 지켜드릴 겁니다.”

“아, 아아……! 고마워요!”

“…….”

자매신의 이름을 입에 담고 나서, 오렐리아가 다시금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흑갑에 휘감겨져 있는 칠흑의 여기사가, 그녀의 검을 따라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를 깃들게 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고, 하나같이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였다.

“오렐리아 님, 그녀를 지켜주십시오.”

동시에 데일 역시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휘감았다. 흑청(黑靑)이 뒤섞여 있는 어둠과 냉기의 갑주였고, 동시에 ‘진실의 눈’을 갖고 그림자 군주가 고개를 돌렸다.

겁에 질린 하녀의 그림자 속에 비치는 것은, 그녀가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그나이터(Igniter).”

화르륵!

데일이 나직이 중얼거렸고, 적색 마력이 심장 주위에 이계의 심상을 덧씌웠다. 4행정 사이클의 열기관 장치가 기동하며 서클의 회전과 더불어 에너지를 공급했고, 준비를 마친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옮겼다.

성의 복도 너머,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시체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구울이다.

“어허, 보아하니 밤이 쉽게 끝날 것 같진 않구려.”

마스터 바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춤의 암기를 뽑았다. 살검과 레이디 섀도우, 그리고 그림자 군주가 복도 너머에서 쏟아지는 구울의 군세에 맞서 그들의 무기를 고쳐 잡았다.

아울러 데일의 소드 벨트에는 두 자루 검이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고, 데일이 그중 하나의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칠흑의 마검 ‘기아’였다. 그러나 기아의 칼자루를 뽑으려다 말고, 데일이 팔을 내렸다.

스릉.

옛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가 순백의 칼날을 드러냈다.

“오호, 오늘따라 평화가 그립기라도 하시오?”

그 검의 이름을 알고 있는 마스터 바로가 웃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평화를 바라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이어지는 데일의 말을 받으며, 오렐리아가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를 고쳐 잡았다.

“제 뒤에 계십시오.”

“아, 알겠어요!”

겁에 질린 약자를 지키기 위해, 성처녀의 고결함을 갖고 오렐리아가 검을 고쳐 잡았다.

쏟아지는 구울 무리를 앞두고 그림자 군주가 팔을 뻗었다. 용사의 검이 아니라,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서리로 이루어져 있는 흑청의 갑주를.

동시에 섭리의 끝에 있는 어둠과 냉기가 휘몰아치며 구울 무리를 휩쓸었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망자들을 일소하며 데일이 등 뒤의 하녀를 향해 말했다.

“고통 없는 소멸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자비이지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해 타이르듯이.

“이 성에서 그들이 수상쩍은 의식을 장소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 그레이트 홀이에요!”

데일이 물었고, 하녀가 대답했다.

“늘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도시에서 납치한 죄 없는 아이들과 함께 그곳 그레이트 홀에서 매일 밤마다…….”

“알겠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 * *

밤하늘에 데일의 핏빛 마력이 흩뿌려졌고, 그 신호를 보고 백작령 일대에 잠입한 《그레이브 워커》들이 움직였다. 개중에는 그림자 군주와 마스터 바로 앞에서 대가리를 박은 고등 법정의 살수, 맥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주님의 명령이다. 움직여라.”

아울러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다크 엘프들이 핏빛의 오러를 휘감았고, 실루엣이 질주했다.

“……!”

동시에 그들의 성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숨을 삼켰다.

망자병들이다.

“어, 아니, 이런 시펄. 죽은 새끼를 어떻게 또 죽이란 거여?”

맥기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고, 그가 말을 마칠 틈도 없이 함께 행동하는 산의 암살자가 땅을 박찼다.

핏빛의 오러가 휘둘러졌고, 망자의 육골이 산산조각이 나며 흩뿌려졌다.

“아하, 이제야 알겠네.”

그 모습을 보고 맥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도대체 이 지랄 맞은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남으셨소?”

마스터 바로가 하녀를 향해 물었고, 그 물음에 하녀가 당혹과 함께 숨을 삼켰다.

“청색 마탑주가 그녀의 몸을 빌려 움직였다. 나에게 경고를 하러 왔지.”

“허미, 쉬펄.”

그림자 군주의 말에 마스터 바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헛지랄을 하느니 칼자루 하나 보태주는 게 낫겠네.”

그리고 그때였다.

“어머나,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나요?”

핏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입가가 쭉 찢어진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서.

“레이디 스칼렛.”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내뱉었고, 동시에 그가 가진 진실의 눈이 ‘레이디 스칼렛의 그림자’를 비추기 시작했다.

제국의 지배자 중 하나로서 그녀가 가진 진실을 엿보기 위해.

화르륵!

─십자가에 매달린 레이디 스칼렛이 있었다. 사지에는 커다란 쇠못이 박혀 고정되었고, 철철 흘러내리는 피가 장작더미 위로 떨어졌다.

레이디 스칼렛이 고통에 흐느끼며 여신의 이름을 울부짖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고를 호소하며.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Ashes to Ashes, Dust to Dust…….’

군중들이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높였다. 마녀를 죽여라, 불태워라.

그러나 그들 중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엘프들이었다. 그곳에 매달려 있는 레이디 스칼렛 역시, 지금보다 더욱 길고 가느다란 귀를 가진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길이 타올랐다.

미친 듯이 춤추며 타오르는 광기 어린 불꽃이었다.

장작더미의 산을 타고 오르는 광염(狂炎)이, 여성을 향해 뜨겁게 이글거리는 아가리를 벌렸다.

‘저는 정말로 아무도 저주하지 않았어요. 저는 절대로 마녀가 아니에요. 제발 믿어주세요.’

‘꼴 좋다, 빌어먹을 마녀야!’

화르륵!

다시금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불길에, 비로소 그림자 군주의 의식이 되돌아왔다.

“어머, 무엇을 그리 심각하게 보고 계셨나요?”

레이디 스칼렛이 되물었다. 동시에 그녀가 비춘 그림자에는, 3도 화상을 입고 끔찍한 수포들이 그녀의 육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신경이 지나는 진피(眞皮)가 드러났고, 피하 지방이 타올랐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진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레이디 스칼렛의 진실이었다.

“진실의 군주시여, 무엇을 그리 심각하게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 비교할 바 없는 적의가 흘러나왔다.

“……너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가 대답했다. 레이디 스칼렛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토록 신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그 태도는, 자신이 여신에게 버림받은 까닭이었나?”

“…….”

《웃는 남자》의 마스크는 여전히 초승달처럼 찢어진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마스크 속의 레이디 스칼렛은 그렇지 않으리라.

그녀의 등 뒤로 박쥐들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 비교를 불허하는 핏빛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데일이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끔찍하고 비참한 과거를 갖고 있다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저 전쟁을 준비할 때였다.

타앗!

레이디 스칼렛이 땅을 박차고 질주했다. 마법사의 그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신속의 쇄도였다.

어느덧 그녀의 손톱이, 피의 칼날과 같은 혈조(血爪)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날카로운 혈조가 휘둘러졌고, 그 일검을 막아서는 것은 마스터 바로의 몫이었다.

“어이쿠, 시펄. 이 아가씨가 힘도 장사네.”

피의 손톱이 휘둘러지는 동시에 엇박자로 업화의 불꽃이 휘몰아쳤다. 마스터 바로가 재빨리 땅을 박차 거리를 벌렸고, 그 틈을 타서 데일이 종말의 냉기를 흩뿌렸다.

동시에 레이디 스칼렛의 등 뒤로 박쥐의 날개가 펼쳐졌고, 그야말로 곡예를 부리듯 몸을 뒤틀어 날아올랐다.

“악마가 여기 있었네.”

그 모습을 보며 그림자 군주가 중얼거렸고, 레이디 스칼렛이 차가운 표정으로 데일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머리에 조금 피가 올라버린 모양이네요.”

“저라고 좋아서 그림자를 보는 게 아닙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대가 저와 맞서 싸우는 이상, 저는 ‘눈’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말하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진실의 눈을 통해 보는 세계의 풍경. 방금 보여준 레이디 스칼렛의 움직임조차, 이 눈동자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바 없는 터무니없는 힘.

“…….”

레이디 스칼렛이 잠시 침묵했다. 박쥐의 날개를 펄럭이며.

“유감스럽게도, 이곳에서 제 유희는 여기까지 같네요.”

그와 동시에 그녀가 걸친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팽개쳤다.

“강마의 의식을 포기하는 겁니까?”

“어머, 그럴 리가요.”

레이디 스칼렛이 태평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그림자 속에 다시금 진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

그 풍경을 보고 데일이 숨을 삼켰다. 구역질 없이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숙녀의 비밀을 엿보는 남자라니, 참으로 최악이네요.”

레이디 스칼렛이, 처음으로 숨기지 않는 적의를 담아 쏘아붙였다.

데일이 구역질을 감추지 못하고 레이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뱃속에 깃들어 있는 ‘악의 씨앗’을 향해서.

“그러나 보시다시피, 저는 이미 ‘하나의 악마’를 이 뱃속에 잉태했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사랑스럽다는 듯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나머지 ‘세 악마’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결사가 어떻게 될지 따위는, 솔직히 말해서 이제 아무 흥미도 없답니다.”

“서로에게 협력하는 것이 《결사》의 규칙 아니었습니까?”

“아, 저는 그들에게 충분히 많은 것들을 제공했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말했고, 동시에 불길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불길 속에서 레이디 스칼렛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어이쿠, 시펄. 이제는 졸지에 악마 애미가 돼버리셨네.”

남겨진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가자.”

그 말을 애써 듣지 못한 체하며,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왈라키아 백작성의 대회당, 나머지 세 악마를 강림시키기 위해 의식이 펼쳐지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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