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 *
5서클, 심장과 융합한 『검은 산양의 서』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암혈의 육체. 그리고 그 암혈에 깃들어 있는 종말의 냉기.
적색의 마력으로 서클의 효율을 수십 배 가까이 증폭할 수 있는 이계의 심상, 열기관.
그림자 의수를 매개로 그의 육체와 완전하게 동화되어 있는 그림자 망토.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와 진실의 눈.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서리로 이루어진 흑청의 갑주.
냉정하게 지금의 자신이 가진 능력을 헤아렸다. 헤아리고 나서, 그림자 군주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을 따라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수상쩍은 모임의 이들을 향해서.
“그대들이 말하는 강마(降魔)의 의식에 대해서는 흥미가 생기네요.”
“오,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
“이 백작성에서 치러지는 겁니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공자님이 도착하실 때 맞추어 의식의 준비가 끝났지요.”
“그렇습니까.”
남자가 웃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대들의 조직에 합류하는 것과 같겠지요.”
“그 말대로입니다.”
“그렇담 모두 마스크를 벗으십시오.”
“……!”
“그대들이 제 얼굴과 정체를 보았듯, 그대들 역시 저에게 마땅히 얼굴을 보여야겠지요.”
일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 정도야 어렵지 않은 부탁이지요.”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나 ‘검은 공자’시여, 우리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랍니다.”
“제가 이 백작성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에서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없겠지요.”
그때였다.
“어허, 시펄. 나리들 이야기에 끼어들어 졸라게 송구스러운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이들은 제 검입니다. 검(劍)에는 눈이 없는 법이지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그것은 동시에 《결사》 앞에서 살검과 레이디 섀도우를 물릴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기꺼이 공자님의 뜻대로.”
그 말과 함께 남자 하나가 그대로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나 마스크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말 그대로의 달걀귀신이 그곳에 있었다. 이목구비도 없이 그저 매끄러운 살덩어리밖에 없는 존재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마스크가 웃었다. 초승달처럼 기괴하게 찢어진 입이 더더욱 깊게 찢어지며.
“정체가 무엇입니까.”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마스터 바로 역시 심상치 않은 모습에 칼자루 위로 손을 올렸다.
“유감스럽게도 정체 같은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나 다들 저를 ‘신사(Gentleman)’라 부르고 있지요. 그래서 공자님의 물음에, 저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데일이 실소를 흘렸다. 동시에 나머지 멤버들 역시 그들의 마스크를 벗었다.
그들 모두는 ‘신사’라 자청하는 자와 달리, 평범하게 사람의 이목구비를 가진 자들이었다.
레이디 스칼렛을 비롯해 데일이 그 얼굴을 알고 있는 제국의 유력자들. 적어도 재산과 여유를 주체하지 못해 흥미 위주로 금기에 손을 대도 이상하지 않을 귀족들이다.
아울러 왈라키아 백작, 질 드 레 역시 그의 마스크를 벗었다. 데일 역시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었고, 오렐리아 역시 잊을 수 없는 얼굴이리라. 그러나 그 모습에 과거의 신심 깊은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로서는 흑색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옛 성처녀의 존재를 꿈에도 알지 못하겠지.
그것이, 데일이 가진 비장의 카드였다.
“…….”
“이것으로 ‘검은 공자’께서는 기꺼이 우리 모임의 동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곳에서 치러질 강마의 의식에 입회하게 되시겠지요.”
데일이 침묵을 지켰고, 신사가 다시금 그의 마스크를 이목구비가 없는 살덩어리 위에 덧씌웠다.
《웃는 남자》의 초승달처럼 찢어진 입꼬리가 더더욱 불길하게 느껴졌다.
“자, 밤이 깊었습니다. 모쪼록 오늘 밤에는 푹 휴식을 취하시지요.”
왈라키아 백작이 다시금 마스크를 걸치며 말했다.
“기꺼이.”
* * *
새벽의 달밤이 무척 창백했다. 마치 괴담 속에 나오는 흡혈귀의 저택에라도 숙박하는 심정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하리라. 레이디 스칼렛이 가진 송곳니를 떠올리며 데일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성의 고층, 그 일실에 데일을 위한 호사스러운 침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울러 데일의 요청에 따라, 두 기사 역시 함께 묵을 수 있는 자리가 갖추어졌다.
“레이디 섀도우.”
그곳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흑색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그의 여기사를 향해.
“말씀하십시오, 주군.”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그들이 저희를 동료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거짓이겠지요. 실제로는 그들의 ‘제물’에 쓰일 마지막 열쇠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허허, 그야 믿는 새끼가 등신이겠지.”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웃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신호를 보내, 백작령에 대기하고 있는 《그레이브 워커》 모두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데일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그들 입장에서 헤아릴 경우, 데일이 거미줄에 걸려 있는 먹잇감이라 여기겠지.
실제로는 그 역이었다.
그림자 군주는 아무 대책 없이 왈라키아 백작령을 찾지 않았다.
산의 암살자와 대법정 직속의 고위 살수, 믿을 수 있는 암행의 대가들이 이미 그림자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는 그림자 속에서 휘둘러지는 당신의 검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제 역할이 아니지요.”
레이디 섀도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렐리아 님께서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
“그 남자는 일찍이 당신의 기수를 자처한 기사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제가 그 남자를 처리하길 바라십니까?”
“이제 와서 저를 동정하시는 겁니까? 제 조국의 군대를 몰살하고 짓밟으신 정복자여.”
오렐리아가 조소하듯 되물었다.
“저는 제 의지로 당신의 꼭두각시이자 그림자의 검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오직 하나, 제국의 복수를 위해서지요. 당신이 저의 조국을 짓밟았듯이 말입니다.”
“제국은 제 손으로 무너질 겁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리고 그 후, 오렐리아 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을 갖게 되시겠지요.”
“어이쿠, 이런 시펄.”
마스터 바로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혹시 나도 왕국 하나쯤 내려줄 수 있소?”
“입 좀 다물어라, 이 새끼야.”
데일이 쏘아붙였고, 작센의 흑갑으로 정체를 감춘 오렐리아가 침묵을 지켰다.
“저는 그저 오렐리아 님의 기수를 자처한 저 남자를, 어떻게 할지 묻고 있는 겁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
침묵 끝에, 오렐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제가 알고 있는 그 기사가 아닙니다.”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동요가 깃들어 있으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디 당신의 뜻대로 해주시길.”
“……알겠습니다.”
그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을 깨트린 것은 뜻밖의 기척 소리였다.
“어이쿠, 복도에서 호다닥 달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네.”
마스터 바로가 벽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데일이 말했고, 무엇에 홀린 듯한 표정의 하녀 하나가 들어왔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동시에 하녀의 등 뒤로,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랐다.
* * *
그곳은 여느 때처럼 소서리스 의회가 펼쳐지는 동토가 아니었다.
그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실내에, 거미줄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거미줄 곳곳에는 청색의 나비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청색의 흑막.”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소서리스 의회의 수장이자 모략과 거짓의 마탑, 청색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 앞에서.
“어서 오세요, 그림자 군주시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나?”
“그들 《결사》 속에 있는, 마침 우리 청색의 첩자 하나가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들려주고 있지요.”
“기가 막히는 정보망이네.”
“청색의 거미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고, 거미줄 속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내가 그들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보이나?”
그림자 군주가 역으로 되물었고, 거미줄 속의 목소리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신사를 조심하세요.”
거미줄 속의 목소리가 경고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우리 청색은 기꺼이 그림자 군주의 기수로서 함께할 것이랍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거미줄로서겠지.”
“어머, 그럴 리가요. 저희는 늘 그림자 군주의 곁에 있답니다.”
청색의 흑막이 즐거운 듯 말했고, 그 말이 갖는 의미에 데일이 표정을 찌푸렸다.
“자, 그럼 부디 당신의 뜻을 펼치시길.”
“아니, 아직이다.”
바로 그때였다. 의식이 멀어지려는 찰나, 데일이 팔을 뻗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청색의 흑막, 그림자의 기수로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후후, 숙녀의 처소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말을 하시네요.”
“네가 나를 불렀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거미줄 사이에서 거미의 다리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거대 거미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거미의 몸통에, 홀릴 것처럼 아름다운 여성의 상체가 달라붙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거짓과 모략의 군주, 청색 마탑주가 삼가 ‘그림자 군주’를 뵙겠습니다.”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동시에 황금의 군주에게 저항하는 제국의 적들 역시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질릴 정도로 알고 있었다. 놀랄 것도 없는 사실이었고, 그림자 군주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이마.”
* * *
“정신이 드십니까?”
작센의 악명 높은 ‘검은 공자’가 하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이 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옥도를 떠올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성의 괴물들은 그녀의 이치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아, 아아…….”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하녀는 데일 또래의 소녀였다. 동시에 공포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겁에 질린 하녀를 향해 데일이 말했다.
“그저 제게 알고 있는 것들을 말씀해주세요.”
“저, 정말이요……?”
믿을 수 없었다. 그녀를 방심시키고 더 깊은 절망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그들이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영지에 남겨진 이들의 숙명이었다.
그렇기에 하녀가 말했다. 질 드 레, 새 왈라키아 백작이 이곳에 오고 나서 벌어진 지옥에 대해. 나아가 백작과 뜻을 함께하고 있는 괴물들의 모임, 그들이 이야기하는 악마에 대해서.
“그렇습니까.”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로 도와주시는 거예요……?”
“도와드릴 겁니다.”
하녀가 겁에 질린 채 몇 차례고 되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래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네.”
“허허, 그걸 말이라고 하쇼.”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렸고, 레이디 섀도우가 그녀의 검을 고쳐잡았다. 하녀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당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렐리아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악(惡)을 벌하고 약자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니까요.”
일찍이 그녀가 구국의 기수로서 보여준 것과 같은 자애를 담아서. 바로 그때였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살기가 일대를 휩쓸었고, 저 멀리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절규였다.
그 절규를 듣고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브 워커》들에게 때가 되었다고 알려라.”
팔자에도 맞지 않는 잠입 놀이는 여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