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88화 (188/301)

188화

* * *

바람이 불었다. 무척이나 스산하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앞서 그림자 법정의 살수들을 통해, 왈라키아 백작령의 정보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한 데일이다. 아울러 백작의 저택에서 《결사》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질 드 레, 이제는 왈라키아 백작으로 불리는 그를 필두로 모여 있는 모종의 조직.

지금 당장 데일의 목적은 그들 전체와 정정당당하게 그들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적이 모여 있는 소굴에 들어가길 자처하는 것은 하나의 이유였다.

그들이 데일을 불렀으니까.

칼잡이 잭은 그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그림자 군주를 부르기 위한 초대장에 불과했다.

아울러 칼잡이 잭이 라플라스의 사도를 자처했듯, 그 외에도 《결사》에는 비슷한 능력을 갖춘 자가 있으리라. 나아가 필시 모종의 정보를 통해 이 상황을 예측했겠지.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로서도 그들의 부름을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곁을 지켜주는 믿을 수 있는 자들이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마스터 바로, 그리고 오렐리아 님.”

레이디 섀도우는 그림자 속에서 데일을 지키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작센의 흑갑으로 몸을 가리고, 마스터 바로와 함께 그림자 군주를 보좌하는 검을 자처했다.

잭 더 리퍼가 그러했듯, 그들의 곁에 있는 악마는 결코 유황불을 흩뿌리는 알기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악마들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가진 진실의 눈을 통해서.

“왈라키아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작령 입구에는 창백한 피부의 집사가 데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울러 준비했다는 듯 마차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어허, 꼭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 같아 찜찜하구려.”

마스터 바로가 말했고, 데일이 대답했다.

“호랑이를 잡아야 하는데 별수 있나.”

요 며칠 사이 도시 전체를 공포에 휩쓸게 하는 배후에는, 모두 새 왈라키아 백작이 있다며 수군거렸다. 그의 저택을 향해 매일 비밀스럽게 사람들이 옮겨지고, 백작의 취미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라며.

덜컥.

영지를 가로질렀고, 비로소 마차가 멈추었다. 달밤이 어두웠다. 데일이 마차에서 조용히 걸음을 내렸다.

“어서 오시지요, 작센의 데일 공자님.”

창백한 표정의 집사가 미소 지으며 예를 표했다.

“여정 중 기꺼이 우리 영지에 머물기로 하신 결정에 대해, 백작님께서는 무척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 역시 감사를 표하지요.”

“그리고 마침, 저희 백작성에서는 모처럼 커다란 축제가 벌어지고 있지요.”

집사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실례가 되지 않으실 경우, 어떠십니까. 공자님 역시 함께 참여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데일이 미소 지었다.

“그럼 이쪽입니다.”

집사가 길을 열었고, 데일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작센의 두 자루 검, 살검과 레이디 섀도우를 그의 양옆에 두고서.

* * *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백작성의 홀이었다.

목로(木壚)처럼 커다랗게 늘어서 있는 테이블에 고급스러운 가죽을 덮었고, 그 위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성찬이 놓여 있었다.

질 드 레, 왈라키아 백작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칼잡이 잭의 것과 같은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서.

“작센의 공자님께서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왈라키아 백작이 과장되게 두 팔을 벌렸고, 일순이나마 곁에 있는 레이디 섀도우의 표정에 동요가 어렸다.

일찍이 브리타니아 독립 전쟁 당시, 성처녀의 기수를 자처한 신심 깊은 기사.

바로 그 남자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를 쓰고 광대처럼 웃고 있었다. 과거의 고결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서.

“아, 이 마스크에 대해서는 개의치 말아 주십시오.”

백작의 곁을 지키는 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홉 명.’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가, 하나같이 입이 초승달처럼 찢어져 있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가장무도회라도 하고 있었습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요.”

적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대답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그녀의 정체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레이디 스칼렛이다.

“그 마스크를 쓰고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요. 그렇다고 무도(舞蹈)를 펼치는 것도 아니고.”

“아, 이것은 우리를 위한 식사가 아니랍니다.”

왈라키아 백작이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이미 ‘식사’를 마쳤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센의 공자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조촐하게 차린 식사지요.”

“그것참 유감스럽네요.”

테이블에 늘어서 있는 진수성찬들을 보며 데일이 말했다.

“저 역시 별로 입맛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들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펼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데일이라도 이곳에서 다짜고짜 아바타를 펼칠 수는 없다. 상대가 그들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러고 보니, 돌아와야 할 동지 하나의 소식이 사라졌지요.”

바로 그때, 레이디 스칼렛과 더불어 또 하나의 홍일점이 입을 열었다.

“마침 데일 공자님께서 체류하신 할렘시에 머물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나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여성이 물었고, 데일이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무엇을 뱉어냈고, 그것이 테이블 위를 나뒹굴었다.

칼잡이 잭의 목이었다.

“…….”

그러나 그 목을 두고 당황하는 이들은 없다. 적어도 몇 명이 숨을 삼키기는 했으나, 그게 다였다.

“듣자 하니 할렘시를 비롯한 일대 도시에서 적지 않은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다지요.”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이 자는 그 살해 행각의 진범이었습니다.”

“아, 어리석은 잭. 그토록 기품 있게 행동하라고 누누이 경고했는데 말이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다시 묻지요. 그대들 《결사》가 저를 이곳에 초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몇 명이 동요했고, 그러나 몇 명은 그렇지 않았다. 레이디 스칼렛이 평정을 지키며 웃었다.

“최초로 이 모임이 세워졌을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식을 추구하는 소소한 모임이었답니다.”

레이디 스칼렛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더 맛있는 진미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음식을 음미해야 극상의 맛을 느낄까,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재산과 여유를 주체하지 못하는 황도 귀족 몇 명이 주최한 모임이었죠.”

“그것이 어쩌다 악마의 속삭임을 신봉하는 미치광이들의 조직이 되었습니까?”

“쾌락의 끝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때, 또 하나의 남자가 대답했다.

“쾌락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요.”

남자가 말했다.

“지적 쾌락, 육체의 쾌락, 탐식의 쾌락, 미식의 쾌락…… 우리 결사는 서로의 쾌락을 존중합니다. 어디까지나 품위와 기품을 잃지 않는 이상에야 말입니다.”

그리고 칼잡이 잭은 그 품위와 기품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그들이 보기에는 그러했으리라.

그렇기에 버려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쾌락의 지평 끝에, 비로소 악마가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자의 말에 데일이 표정을 찌푸렸다.

“어떠십니까, 데일 공자님. 저희의 쾌락에 흥미가 있으십니까?”

“그것을 위해 저를 불렀습니까?”

“그렇답니다.”

레이디 스칼렛이 웃었다.

“칼잡이 잭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나, 데일 공자님을 위해 공석(空席)을 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지요. 의식에 있어 ‘자리의 숫자’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니까요.”

“제가 그대들 《결사》에 순순히 가입하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남자가 되물었다.

“이곳에서 치르게 될 강마의 의식이 실패할지, 성공할지. 그리고 그 후에 무엇이 벌어질지……. 악마가 정말로 이 저택에 나타날지 그렇지 않을지. 그리고 그 악마들이 무엇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지.”

호기심.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침묵을 지켰다.

“좋습니다. 저 역시 제법 흥미가 동하네요.”

침묵 끝에, 데일이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대들이 지켜주어야 할 전제(前提)가 있습니다.”

* * *

그 시각, 적색 마탑의 일실.

“약해요. 너무나도 약합니다. 이걸로는 그림자 군주의 발끝조차 닿을 수 없겠지요.”

아버지 핏빛공이 말했다.

“……!”

“그것이 진실입니다.”

레이 유리스가 입술을 악물었다. 핏빛공, 그리고 겨울의 말대로다.

“가진 것의 차이가 아닙니다.”

핏빛공이 말했다. 동시에 그 목소리에는 그의 악랄함을 아는 자들로서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아버지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용기의 차이입니다.”

“…….”

“레이가 믿고 있는 거짓이, 그림자 군주의 진실을 압도할 수 있을 거란 용기이지요.”

바로 그때, 레이의 육체 속에서 ‘겨울’이 준 종말의 냉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그림자 군주가 가진 것과 같다. 그러나 그 힘을 감당하고 끌어내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그림자 군주에게는 용기가 있습니다.”

흑적청, 적(赤) 하나를 제외하고 어느 마력조차 그림자 군주의 그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레이, 기억하세요. 인간의 역사는 거짓의 역사였습니다.”

핏빛공이 말했다.

“밤의 어둠과 맹수에 맞서 인조(人造)의 불을 피워올리고, 벽돌을 가공해 성채를 쌓고, 용광로에 강철을 주조해 검을 쥐었지요. 그렇게 가장 나약한 생물이란 진실을 극복하고 두려움과 마주했습니다. 그 결과를 보세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거짓의 힘’입니다.”

“…….”

“레이에게는 그림자 군주에 맞서 자신의 거짓을 관철할 용기와 각오가 있습니까? 그림자 군주를 쓰러뜨리고, 이 세상에 봄의 햇살을 가져올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지금까지 몇 차례고 그를 쓰러뜨린 ‘검은 공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레이가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그 존재를, 말마따나 발끝조차 쫓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두렵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오로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밖에 발휘될 수 없습니다.”

핏빛공이 말했다.

“용기의 찬가는 인간의 찬가입니다. 그리고 레이는 인간을 저버린 저와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

“레이가 저의 아들이며, 나아가 세상의 봄을 가져올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결사》가 강마의 의식을 성공시킬 경우…….”

레이가 말을 이으려 했으나, 핏빛공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결사》는 신사(Gentleman)와 레이디 스칼렛의 악취미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성과를 무의미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으나, 결국 그 정도겠지요. 굳이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궁극생물’ 정도일까요.”

핏빛공이 말했다.

“확실히,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제법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끝없는 수행 속에서 너덜너덜해져 있는 레이를 향해 다가서며.

“그러나 오직 당신입니다. 노쇠하신 황금의 군주께서 그리 말씀하셨듯.”

유리스 후작이 아들 레이 유리스를 포옹했다.

“레이야말로 이 세상의 겨울을 막고, 봄을 가져올 유일의 용사이자, 새로운 황금의 군주로 거듭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믿어주세요, 아버지.”

그렇기에 레이 유리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당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

이 세상의 불공평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조리의 화신, 그림자 군주의 진실에 닿기 위한 거짓의 용사로서.

레이는 그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결의를 굳혔다. 바로 그때였다.

“오늘의 수행은 이쯤으로 해두고, 슬슬 식사라도 할까요.”

아버지의 상냥함을 뒤로하고, 핏빛공이 고개를 돌렸다.

갈고리에 매달려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돼지 도축장처럼 거꾸로 매달린 살덩어리들이었다.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저 축사 속의 소나 닭과 같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지배자는 알고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진실과 거짓의 기수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인간밖에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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