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 *
슈브의 능력을 이용해 머릿속을 헤집는 것은 상대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정보를 얻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능력을 쓸 때마다 데일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 역시 막대하다. 마구잡이로 남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의 앞에는 슈브에 버금가는 정보 얻어내기의 대가가 있었으니까.
“허허, 거 아주 그냥 술술 불고 있으시네. 목구멍에 기름칠이라도 하셨나?”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의자에 묶여 있는 그림자 대법정의 판관이자 그림자 교회의 사교(司敎)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손가락뼈가 그대로 그의 손등에 달라붙었고, 그대로 360도를 회전시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고작 그깟 이유로 그림자 여신과 교회, 그리고 법정을 배신했습니까?”
비명을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마르스 사교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다 말고,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우리 모두 알지 않습니까! 그림자 여신께서는 결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뭐, 신이 댁 하나를 특별히 총애해서 저 천국에 자리라도 하나 놔줄 줄 알았수?”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낄낄거렸다.
“구, 군주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진실을! 이 세상은 얼음으로 끝날 겁니다! 그리고 어둠밖에 남지 않겠지요! 그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 겨울, 그 겨울이!”
마르스 사교가 필사적으로 소리쳤고,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진실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나?”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황금의 대제…… 거짓의 군주에게 굴복하고, 기꺼이 거짓의 기수를 자처했나?”
“그것이 인간이니까요!”
바로 그때, 마르스 사교가 질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다가올 종말을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가혹한 진실 앞에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치며 저항하는 것! 그 어리석을 정도의 발악이야말로, 인간이란 증거가 아닙니까!”
마르스 사교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황금의 군주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름에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우주의 끝에서 따스하게 쏟아지는 봄의 햇살, 지저귀는 새들!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태양! 설령 그게 거짓의 백일몽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저…… 그가 보여준 거짓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허허, 이 친구야. 그렇게 봄이 좋거들랑 제국 동부로 가셨어야지. 지금도 염병할 햇살이 짱짱 내리쬐고 있으니. 적어도 댁 뒤질 때까지는 질릴 정도로 볼 수 있을걸?”
마스터 바로가 조롱했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진실은 가혹하고 거짓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거짓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고 얼마나 그들의 의지를 굳힐 수 있을까?
“설령 모두가 파멸할지라도, 그것은 싸울 가치가 있는 거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거짓조차 아닙니다.”
마르스 사교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이상(理想)입니다……!”
“망상이겠지.”
데일이 차갑게 대답했다. 비로소 황금의 군주가 가진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황금의 이상이었다.
설령 그것이 다가올 진실 앞에서 아무리 덧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기꺼이 왕의 기수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창한 대의를 품고서, 고작 손가락뼈가 뒤틀리는 정도의 고통에 진실을 술술 불어냈나?”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마르스 사교가 입을 다물었다.
“이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리라. 그 뒤에는 어둠밖에 남지 않겠지.”
데일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태고의 어둠과 우주의 겨울이 그러하듯.
그림자 군주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이 세계의 겨울과 다름없었다.
동시에 데일의 서클이 가속하며, 그의 일대를 따라 종말의 냉기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 따위가 저항할 수 있는 겨울이 아니다.”
“아, 아아아……!”
마르스 사교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괴, 괴물! 네놈이야말로 진짜 괴물이다!”
그가 필사적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그 앞에 있는 존재는 이미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악신(惡神)이자 마왕 그 자체였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갖고, 우주의 겨울을 가져올 이 세계의 종결자.
나아가 그의 육체를 잠식하는 냉기 앞에서, 그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의 육체가 입자 레벨에서 해체되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소멸했다.
적어도 그의 앞에 있는 이 남자는 거짓의 대의를 이해하고 있으나, 그 무게마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림자 군주의 진짜 적들에 대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진실의 무게를 알고서도, 기꺼이 그에 맞서 거짓의 군주와 기수를 자처하는 자들. 그것은 무척이나 우습게도, 인간의 찬가였다.
진실이 되고자 하는 거짓. 적어도 그의 거짓에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이 남자에게서 이 이상 얻어낼 정보 같은 것은 없다.”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자유도시 동맹에 있는 법정의 모두를 소집해라.”
그 말에 마스터 바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허허, 쉬펄. 아주 그냥 어둠의 마왕이 따로 없으시네.”
* * *
할렘을 비롯해 자유 도시동맹의 각 도시를 다스리는 그림자 법정에게 소집령이 내려졌다.
그것도 대법정의 살검(殺劍), 나아가 그림자 법정 전체의 새로운 수장을 자처하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움직였다.
대법정의 이들이 그림자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사실이나, 하부 조직의 일개 살수들까지 그림자 군주의 정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는 어디까지나 정체불명의 흑막으로서 자리를 지켰고, 그를 대행하는 것은 마스터 바로의 몫이었다.
자유 도시동맹의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고 있는 법정의 판사와 살수들이 하나의 자리에 모였다. 새 부리 마스크에 코트 차림을 하고서.
보통 범죄자와 암살자들은 하나의 자리에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법이다. 그럼에도 마스터 바로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달리 결정의 여지가 없었다.
그림자 법정 제일의 강자이자, 대법정의 그림자 성녀를 보필하는 최강의 살수.
그 남자가 직접 법정의 이들을 호출했고, 누가 감히 거스를 수 있을까.
나아가 그 존재마저 기꺼이 고개를 숙이는 로브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그림자 법정의 이름을 자청하는 자들이여.”
후드 밑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둠 속에서 무척이나 불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이 조직의 새로운 수장으로서, 법정 전체의 흐트러진 규율을 바로잡기 위해 이곳에 왔다.”
로브의 형태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 속에서, 데일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그에 앞서, 그대들이 별도로 접촉하고 있는 대법정의 이들에 대해 낱낱이 진실을 고하라.”
조직을 다시 세우는 것은 내부의 암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렇기에 마르스 사교가 그러했듯, 대법정 내부의 배신자를 찾아낼 때였다.
“이제부터 그대들이 섬겨야 할 대법정은 오직 하나, 내가 될 테니까.”
그림자 군주가 말했고, 그곳에 있는 그림자 법정의 판사들 중 누구 하나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새 대법정 앞에서 충성의 맹세를 올립니다!”
새 부리 마스크의 살수 하나가 무릎을 꿇었고, 나머지 살수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로소 법정의 실체 없는 몸통이, 그림자 군주 밑에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 * *
자유 도시동맹에 있는 그림자 법정을 통합하고, 그와 동시에 데일의 밀사(密使)가 작센 공작령으로 향했다.
암행의 대가라 일컬어지는 산의 암살자, 동시에 《그레이브 워커》로서 그림자 군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첩보대로서.
데일의 말이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 즉시 작센 공작령에 의탁하고 있는 대법정에 숙청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오, 오해입니다! 저는 결코……!”
작센 공작 직속 친위대 《그레이브 가드》들이 직접 대법정의 배신자들을 색출해 처형했고, 그들 앞에서 고위 살수들의 저항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림자의 검들이여, 모두 칼을 집어넣으세요.”
그림자 법정의 쌍두, 그림자 성녀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새 부리 마스크의 고위 살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그 속에서 무덤의 수호자들이 배신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무덤을 걷고, 수호하는 자들. 작센 공작 가의 부자가 자랑하는 양대 조직.
휘몰아치는 피바람 속에서, 그림자 성녀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직후 데일의 명령에 따라, 그녀의 곁을 지키는 《그레이브 가드》…… 바스커빌의 베일 경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성녀님.”
“아아, 알고 있답니다.”
그림자 성녀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저는 그저 군주님의 뜻을 따르고, 이들은 그렇지 않았을 따름이니까요.”
그림자 성녀를 비롯해 마지막까지 충성하는 이들이 살아남았고, 그러나 그들의 숫자는 무척이나 적었다.
“그리고 군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이상 대법정에 ‘생각하는 자’는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네요.”
마지막까지 그림자 여신에게 충성하며 덜덜 떨고 있는 생존자들이 있었고, 그림자 성녀가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림자 군주의 밀사, 산의 암살자가 흑색공에게 요청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으니까.
─ 그림자 성녀를 제외하고, 대법정의 전부를 처형하십시오.
데일의 말마따나, 배신자와 광신도들의 뿌리를 뽑을 때였다.
* * *
대법정, 고등 법정, 그리고 소법정.
데일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림자 법정의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그림자 군주를 위해 움직이는 첩보대로서.
대법정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종교적 신념을 위해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데일 그 자체가 대법정이 되고, 그를 보좌하기 위해 마스터 바로와 그림자 성녀가 남을 따름이었다.
그 아래에 하부 조직을 감시하는 것은 맥기가 그러했듯 ‘고등 법정’의 판사들이 수행할 것이며, 그들이 대법정…… 그림자 군주의 의지를 소법정에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리라.
그러나 그가 아직 이곳 할렘과 자유 도시동맹에 체류하고 있는 사이, 끝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남아 있었다.
칼잡이 잭.
데일이 쓰러뜨린 것은 어디까지나 피라미 하나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결사》의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정작 가장 핵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비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자유 도시동맹 사이에 고립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왈라키아 백작령.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귀족이 귀족을 찾는 것은 결코 이상할 일이 없는 일이리라. 특히나 작센 가 정도의 대귀족이 여행 도중, 일개 백작령에서 체류하는 것은 더더욱.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니까.
왈라키아 백작령에, 작센의 ‘검은 공자’가 도착한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