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 * *
칼잡이 잭, 잭 더 리퍼.
그 이름이 갖는 위화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센의 ‘검은 공자’시여.”
칼잡이 잭이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데일이 느끼는 것은 뜻밖의 낯익음이었다.
입가가 초승달처럼 기괴하게 찢어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웃는 남자(Laughing Man)》…….”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마스크가 의미하는 것이 뭐지?”
“무도회에 나갈 때는 누구나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는 법이지요. 저 역시 예외가 아니랍니다.”
잭 더 리퍼가 말을 흐리며 미소 지었다.
“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
“아, 됐습니다. 그래도 악마의 존재는 믿으시겠지요.”
칼잡이 잭이 말했다. 그 말에 일순, 또 하나의 《웃는 남자》가 해준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령 우리가 길드 시티의 장부를 보고 대륙의 정세와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듯…… 이 세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악마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 미래에 벌어질 일체의 일들을 예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우주에 있는 분자 하나하나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까지 알고 있는 존재. 라플라스의 악마.
“저는 악마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전지(全知)하신 악마께서는, 이 세상과 미래에 벌어지는 일체의 일들을 예지할 수 있으시지요.”
칼잡이 잭이 말했다.
“가령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범죄를 저질러야 들키지 않을지, 어디에서 누구를 습격해야 범죄가 어둠 속으로 파묻힐지…… 전지의 악마께서는 저에게 늘 속삭여주시지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날을 고쳐 잡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는 남창(男娼)의 시체를 뒤로하며.
“보시다시피, 저에게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잭 더 리퍼가 말했다.
“마법도 없고, 오러도 없고, 보통 사람과 힘 싸움을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요.”
“…….”
“그러나 그 악마께서 저에게 속삭여주실 때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덕에 벌써 몇 차례고 이 아이들의 육신을 헤집고 갈기갈기 찢어도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지요.”
그의 칼날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내며.
“도시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제 이름을 저주하며 공포에 빠지고, 거리를 거닐 때마다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포의 공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 무엇을 알아가는 것처럼 짜릿한 쾌락도 찾아보기 힘들지요.”
황홀함에 젖어 칼잡이 잭이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림자 군주시여.”
“보아하니 내 정체에 대해서도 악마가 속삭여준 모양이지.”
“예, 그 덕에 저는 이곳에서 그대와 마주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잭 더 리퍼가 미소 지었다. 입가가 기괴하게 찢어져 있는 《웃는 남자》의 마스크 뒤로.
“나와 마주해서 무엇을 노리고 있지?”
“저는 어디까지나 전지의 악마를 섬기는 사도로서, 공자님에게 우리의 의지를 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우리라고?”
“《결사》라고 불리는 조직이지요.”
그 이름에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우리 조직의 수장께서는, 기꺼이 그림자 군주께서 우리와 합류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가 그렇게 순순히 손을 잡아줄 것 같나?”
그 말에 데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황금과 그림자 그 어느 쪽에도 흥미가 없답니다.”
“흥미가 없다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쾌락입니다.”
잭 더 리퍼가 말했다.
“밤길에 겁에 질린 매춘부를 겁탈하고 갈기갈기 찢는 살육의 쾌락, 백색 마탑의 금기(禁忌) 속에 감춰져 있는 지식을 탐구하는 지적 쾌락,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진미를 탐하는 미식의 쾌락…… 그 앞에서 황금이나 그림자가 개입할 여지 같은 것은 없지요.”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어떠십니까, 그림자 군주시여. 우리 《결사》는 황금과 그림자의 다툼을 떠나, 대륙 제일의 잔혹함과 악명을 떨치는 ‘검은 공자’의 합류를 바라고 있답니다.”
“하나 묻지.”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여기가 네놈의 무덤이 될 거란 사실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
잭 더 리퍼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여기서 실컷 아가리 털다가 퇴장당할 ‘일개 체스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혹시 네놈의 악마가 속삭여주셨나?”
데일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은 차가운 증오였다. 그저 사람이 악(惡)의 앞에서 순수하게 느끼는 역겨움과 증오.
“내가 절대로 네놈 같은 쓰레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아무래도 네놈의 악마께서는 말씀해주지 않으신 모양이지?”
“……!”
데일의 말에 비로소 잭 더 리퍼의 표정에 동요가 깃들었다.
“전지(全知)의 악마가 사실은 가짜였나? 혹은 알고도 네놈을 일개 체스 말로 쓰고 버릴 셈이었을까?”
저 남자, 칼잡이 잭이 사도의 힘을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으리라.
저 천상에서 우리를 개미처럼 바라보는 신격(神格)들에게 특별한 힘을 내려받은 존재들.
대다수의 사도는 그 힘을 받고 하늘 위의 전능자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법이다. 시스티나 자매신의 계시를 받은 성처녀가 그러했듯이. 저 남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어리석음과 맹목이, 우스워서 할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비로소 잭 더 리퍼가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해야 당신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제게는 전지(全知)의 악마께서 늘 속삭여주고 계시니까요.”
당혹 끝에, 칼잡이 잭이 비로소 살기를 담아 위협하기 시작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 그러십니까?”
동시에 데일의 육체에서 종말의 냉기가 휘몰아치듯 흩뿌려졌고, 칼잡이 잭이 능숙하게 거리를 벌렸다.
“아이스 불릿, 「개틀링식」.”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재차 팔을 뻗었다. 그림자가 아니라, 그의 심장에서 휘몰아치는 종말의 냉기를 총알로 세공하며.
얼음의 포화가 내리꽂혔고, 칼잡이 잭이 쏟아지는 총알들 사이로 쇄도했다. 그러나 자처해서 총알 세례 속으로 질주하는 그 남자는 정확하게 총알의 사각(死角)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디 있어야 총알이 그를 비껴갈지 알고 있는 것처럼.
“……!”
촤아악!
그의 손에 들린 칼날이 휘둘러졌고, 데일의 육체 위에 자상을 내려그었다.
데일이 뒤늦게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전개하며 맞서려 했으나, 칼잡이 잭은 어느새 데일의 등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역시, 저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어떻게 해야 당신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잭 더 리퍼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전지의 악마, 라플라스.”
데일이 중얼거렸다.
“오, 제가 섬기는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시는 모양이지요.”
“그럼 나머지 ‘세 악마’의 이름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데일이 대답했다.
“세 악마……?”
데일의 물음에, 잭 더 리퍼가 일순 숨을 삼켰다.
“과학사의 4대 악마도 모르나? 아, 보아하니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지.”
비로소 그의 움직임에 동요가 깃들었다.
“고등학교 교과서 하나로 박살이 날 그깟 허구의 존재들이, 정말로 네놈들이 말하는 악마의 정체였나?”
“허구의 존재라니, 감히!”
그들 악마는 어디까지나 ‘이계의 학자’들이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하는 과정에서 알려진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 세계의 존재들이 어떻게 그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없다. 그러나 당장 신경을 쓸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세상 전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대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머저리들이지.”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저는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과 움직임, 모두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칼잡이 잭이 땅을 박찼다. 그 말대로다. 그의 움직임에는 데일이 몇 초 후에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받아칠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암혈의 갑주를 비롯해 사방으로 흩뿌리는 일체의 포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흑색의 피가 흩뿌려졌다.
오러조차 쓰지 못하는 일개 범죄자 앞에서, 그의 칼날에 그림자 군주의 육체가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보십시오, 이것이 알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군주가 대답했다.
“네가 고등교육을 받았어야 그깟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지.”
─ 꺄하하핫!
그 말과 함께, 어느덧 데일의 곁에 있는 슈브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데일이 다시금 다섯 개의 서클을 가속했다. 흑청적 중에서, 오직 청색의 마력 하나를.
그의 피에 깃들어 있는 냉기가 휘몰아치듯 폭발했고, 그대로 암혈의 갑주를 휘감듯 덮어씌웠다.
종말의 냉기로 이루어져 있는 서리 갑주였다.
바로 그때였다.
“……!”
잭 더 리퍼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했다.
“전지의 악마로부터 속삭임을 듣고 있다고 했지.”
절대영도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어때, 아직도 악마가 네 곁에서 이 풍경을 속삭이고 있나?”
절대영도의 세계. 그림자 군주가 암혈의 갑주 위에 투영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겨울 그 자체였다.
“아, 아아아……!”
그림자 군주의 발밑 일대에 종말의 서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절대영도의 갑주를 휘감고,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옮겼다.
“오, 오, 오지마……!”
잭 더 리퍼가 발작하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의 귓가에서 전지의 악마가 속삭이고 있을 우주의 겨울, 나아가 그의 협소하기 그지없는 시야로 감당할 수 없는 우주적 공포가 울려 퍼졌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게 아무 까닭 없는 소리가 아니지.”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몇 초 후에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다고 했지.”
“아, 아아, 아니야, 아아아……!”
잭 더 리퍼가 발작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의 곁에 있는 악마의 속삭임을 통해, 감히 일개 필멸자가 감당할 수 있는 지식의 영역 너머의 계몽(啓蒙)이 이루어졌다.
“히, 히히히, 히히.”
칼잡이 잭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겨, 겨울이야, 겨울이 오고 있어.”
“…….”
“겨울이 오고 있어! 아무도 도망칠 수 없는 겨울이 오고 있다고!”
데일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진실이지. 그것이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이다.”
바라보고 나서,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일개 엑스트라가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스케일이 크지.”
미친 사람처럼 게거품을 물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 * *
그로부터 얼마 후, 할렘의 고등 법정에 정기적으로 대법정의 사람이 접촉하기로 되어 있는 그때.
새 부리 마스크에 코트 차림의 살수들을 이끌고, 그곳에 있는 자는 대법정의 어느 판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를 맞이하는 것은 고등 법정의 수장 ‘맥기’의 몫이 아니었다.
“어허, 누추하신 분이 어쩌다 이런 귀하신 곳에 오셨소이까?”
마스터 바로가 두 발을 탁자에 올리고 되물었다.
나아가 그 곁에 있는 그림자 군주가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아아……!”
그 모습을 두고 판관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어찌하여 그림자 여신을 배신하셨습니까? 마르스 사교(司敎)님.”
“나, 나, 나는 그저……!”
대법정의 판관이자 마르스 사교가 입을 다물었다. 그를 지켜야 할 살수들 역시, 마스터 바로와 그림자 군주를 보고서 그대로 태세를 바꾸었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저는 그저 대화를 하고 싶을 따름이랍니다.”
덤덤하게.
“아주 길고 진솔하게,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