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 *
“야, 맥기 새끼야.”
“옙, 형님!”
“내가 우습냐?”
“아닙니다, 형님!”
“그럼 그림자 법정이 우습냐?”
“그것도 아닙니다, 형님!”
마스터 바로가 말했고,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판사 겸 고위 살수 ‘맥기’가 복창했다. 나머지 살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 멋대로 고등 법정이니 어찌하니 하며 밑에 애들을 거느린 이유라도 있나?”
“그, 그것이, 아래에 두고 있는 조직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여러 가지로 구별할 필요성이…….”
“머리 좋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끼어들었다.
“조직 밑에 조직이 굴비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는데, 머리를 대신해 상부 조직이 있어서 나쁠 것도 없지. 오히려 그게 효율적이지 않나?”
“가, 감사합니다!”
맥기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고,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어허, 이 시펄 새끼야. 네놈이 있어야 할 법정을 말도 없이 할렘으로 팽개쳐놓고 어디 대가리를 세우려 들어?”
“그, 그럴 리가요! 법정을 할렘으로 옮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법정의 결정이었습니다! 과정에서 아래에 두고 있는 애들을…….”
맥기가 말했고, 마스터 바로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퍼즐의 조각을 짜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마스터 바로, 누가 그림자 법정의 보스지?”
“허허, 그야 제 앞에 계시는 그림자 군주 아니겠습니까.”
데일의 물음에 바로가 말을 이었다.
“그럼 대법정의 판관(判官) 중 하나가, 우리 보스에게 말도 없이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게 되는데.”
“달리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상한 일들이 있나?”
데일이 되물었다. 그 말에 맥기가 일순 숨을 삼켰다.
“허허, 우리 맥기 새끼가 말하길, 졸라 수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계시네.”
그 행동 하나로 답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 저는 그저 대법정의 뜻이라기에…….”
“대법정이 무엇을 명령했지?”
“이 도시의 특정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함구하라며……”
그 말에 일순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래, 그래서 이 도시에 벌어지는 일이 무엇이지?”
“이, 이스트 할렘(East Harlem) 쪽의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벌어지는 범죄에 대해 일절 침묵하란 말이었습니다. 요, 요사이 알 수 없는 매춘부 살해와 남자아이의 실종이 밥 먹듯이 일어났었지요. 그 외에도 일대 자유도시 동맹에서도 비슷한 명령이……”
“그 범죄들에 대해 대법정으로부터 침묵하란 명령이 내려왔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서라고 했나?”
“모종의 의식을 위한 공양이라고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매춘부 살해, 남자아이 실종, 제물.
데일이 표정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그림자 법정은 그림자 여신을 섬기는 이교 종파의 후신으로, 암살자 길드를 자처하는 동시에 광신도 조직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는 그들 조직의 새 수장을 자처함으로써 구시대의 악습에 대해 거리를 두고자 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대법정의 고위층 중에서 그림자 군주의 뜻에 거스르는 자는 없었다. 당장 그림자 법정의 쌍두라 할 수 있는 살검과 그림자 성녀가 데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림자 법정, 나아가 대법정 모두가 그림자 군주의 뜻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리라.
일찍이 흑색 마탑의 강경파들이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에게 저항했듯이. 비로소 아버지의 고충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그럴 줄 알았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마스터 바로, 그림자 법정의 광신도 놈들이 썩 내키지 않는다고 했지?”
“허허,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이참에 광신도 놈들의 뿌리를 뽑을 때가 왔네.”
자기네도 오롯이 그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거대 조직이고, 정보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그 조직을 이용하는 존재는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아, 그 말을 들으니 졸라게 의욕이 넘치는구려. 그나저나…….”
“그림자 성녀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네가 부재중일 때, 너를 대신해 믿을 수 있는 《그레이브 가드》들이 그녀를 지키고 있으니까.”
“허허.”
마스터 바로가 멋쩍은 듯 웃었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자, 맥기 새끼야.”
“말씀하십시오, 형님!”
“이 형님이 쓰레기 청소를 좀 하려는데, 네놈도 함께 봉투 속에 처넣어지고 싶지는 않겠지?”
“그 말대로입니다!”
맥기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럼 5초 내로, 네놈들이 접촉했다는 대법정에 대해 죄다 불어라.”
“어, 얼마 전에 왈라키아 백작의 일가족이 몰살되고 친족이 그 영지를 처분했을 때, 그것을 매입한 브리타니아 출신의 귀족이 있었습니다!”
맥기가 대답했다. 그 말에 일순 데일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왈라키아 백작령. 이곳 할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백작 영지였다.
“지, 질 드 레(Gilles de Rais)라고 하는 자였는데, 브리타니아 왕국의 독립 전쟁 당시 성처녀의 기수를 자처한 자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왕국 내 워낙 입지가 강력한 자였는지, 패배 후에는 제국에 전적으로 협조하는 것을 대가로 무혐의로 풀려났다나요.”
뒤이어 그 이름이 나올 때, 다시금 데일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마스터 바로가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래, 그래서 그 브리타니아 출신의 귀족 나리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대법정으로부터 ‘질 드 왈라키아(Gilles de Wallachia) 백작’의 명령을 수행하란 말이 내려왔습니다!”
“그가 달리 무엇을 명령했지?”
“도시의 독실한 아이들을 납치해 비밀리에 그의 영지로 옮기란 명령이었습니다!”
“어이쿠, 납치범께서 제국의 영지를 샀으니 이제는 왈라키아 백작이 되셨네. 뭐 달리 세탁하고 싶은 과거라도 있으셨나?”
귀족의 성씨는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울러 여러 개의 영지를 보유했을 경우는, 그중 가장 힘 있고 강력한 영지의 이름을 성으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가령 ‘작센 공작’이 작센 공작령 외에도 제국 내에 여러 남작령과 백작령을 갖고 있으며, 그곳의 남작과 백작으로서 복수의 작위를 보유했듯이.
“게다가 백작 일가가 몰살당하고, 백작령을 계승해야 할 친족이 대뜸 땅을 팔아버린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고.”
“제국에 달리 줄이 있지 않고서야, 브리타니아 출신의 귀족 하나가 수행할 일이 아니겠죠.”
그리고 그 뒤를 봐주는 것은 그림자 대법정의 이들이다.
“생각보다 거물이 낚여버렸네.”
“허허, 참으로 그 말대로라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데일이 대답했고, 마스터 바로가 동감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 * *
그 시각, 왈라키아 백작성.
질 드 레, 이제는 왈라키아 백작의 이름으로 불리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악마술사 프렐라티를 비롯해 그가 제국에서 접촉한 ‘결사’라 불리는 조직의 이들과 함께.
“후후, 설마 우리가 이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아울러 왈라키아 백작을 향해 미소 짓는 결사의 동지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다니, 참으로 멋진 말이에요.”
핏빛 머리카락의 마녀였다.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핏빛공과 더불어 적색 마탑의 실세라 일컬어지며, 제국 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자. 성처녀와 함께 왕국의 독립 전쟁을 일으킬 당시, 그의 조국에 잊을 수 없는 지옥의 불꽃을 떨어뜨린 악녀.
“레, 레이디 스칼렛…….”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아, 이제는 왈라키아 백작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
그곳에서 비로소 질 드 레가 마주한 결사의 실체는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자, 그럼 결사의 새 멤버를 위해 기꺼이 축배를 들지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디 스칼렛이 유리잔을 들어 올리려 했다.
“아직 잭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악마술사 프렐라티가 그녀를 가로막았고, 레이디 스칼렛이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홀짝였다.
“보아하니 지금도 뒷골목에서 그의 취미에 몰두하느라 바쁘실 테지요. 자, 그럼 우리끼리 식사를 시작해 볼까요?”
그녀가 말했고, 그들의 곁을 지키는 시종들이 요리의 접시를 개봉했다.
“꺄아아악!”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레이디 스칼렛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술 너머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송곳니를 과시하며.
요리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사람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요리였다.
“역시 잔에 담겨 있는 음료는 맛이 덜하지요. 음식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그와 동시에 결사의 이들이 일제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며 경악하는 하녀들을 향해, 그들이 비로소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을 드러냈다. 피가 흩뿌려졌다. 귀족의 기품이나 예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짐승들의 사육제였다. 사람의 배에 고개를 처박고서 내장을 뜯어먹고 있는 포식의 풍경.
“아, 아아……!”
악마의 광기, 그 풍경 앞에서 질 드 레가 경악하며 몸을 떨었다.
“왜 그러시나요, 신에게 버림받은 기사님?”
그 모습을 보며 레이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 되물었고, 질 드 레의 경악은 길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혐오감, 형용할 수 없는 추악함, 그러나 그 감정은 결코 그들의 악(惡)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엘레강스하지 않아!”
질 드 레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식육을 탐식하는 결사들의 움직임이 젖었고, 레이디 스칼렛이 말없이 미소를 지켰다.
“기품도 없고, 절조도 없고, 우아함도 없다! 아름답지도 엘레강스하지 않아! 나의 식사를 이렇게 망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레이디 스칼렛이 손가락을 튕겼고, 결사의 이들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귀공의 말대로입니다. 부디 우리의 추태를 용서해 주시지요.”
결사의 멤버 하나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시험이란 것을.
“트레비앙(Très Bien)! 이것으로 귀공께서는, 우리 결사에 어울리는 품격을 가졌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올리지요, 왈라키아 공. 신에게 버림받고 악마를 찾는 기사여.”
레이디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손에 쥐고 있는 핏빛의 포도주를 홀짝이며.
“결사에 가입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 *
그림자 법정에서의 일을 뒤로하고, 데일이 향하는 곳은 도시 동구(東區)에 있는 ‘모종의 장소’였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상쩍은 일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끼어 있었다.
질 드 레, 성처녀 오렐리아가 잿더미가 되고 홀로 남겨진 그녀의 기수.
그가 제국의 땅에 있는 귀족 영지를 매입하고, 그것도 하루가 멀다고 범죄가 벌어지는 이곳 할렘 주위에 터를 잡았다는 것은 결코 넘길 수 없는 정보였다.
“……오렐리아 님.”
데일이 그림자 속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서늘한 감촉이 등줄기를 훑고 달렸다.
달빛이 드리워져 있는 도시의 뒷골목, 구불구불하게 굽이져 있는 미로 속에서 피 냄새가 났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리가 되지 못하는 아우성에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
어둠 속에서 데일이 질주했고, 그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어느 남창(男娼)의 시체 앞에서, 말끔하게 옷차림을 갖춘 신사였다.
“아, 이게 누구시지요.”
신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에는 피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하나, 그의 손에 들린 칼날을 제하고서.
“그러는 네놈은 누구지?”
데일의 물음에, 신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칼잡이 잭(Jack the Reaper)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