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 *
그날 밤.
체내에 돌고 있는 어둠과 냉기를 조율하며, 데일이 그의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을 무렵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느냐.”
이어지는 익숙한 목소리에, 데일이 황급히 암혈과 냉기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세피아 님.”
더 이상 세피아는 데일의 스승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작센 가의 가정 교사로 남아 있게 되리라.
“……잠자리에 들려는 것을 방해했나 보구나.”
“그렇지 않아요. 아직 수행에 열중하고 있었으니까요.”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춥지 않으냐.”
바로 그때,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데일은 일순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애써 내색하지 않고 평정을 지키려 해도, 데일의 아버지를 속이지 못했듯 세피아를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서리 감시자로서 죽을 때까지 데일의 육체를 괴롭힐 우주의 겨울, 그 냉기의 저주를 모를 리가 없으리라.
“추워요.”
거짓말 같은 것은 소용없으리라. 그렇기에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 정도 추위에 굴복하기에는, 제 곁에 있는 따스함이 너무 많네요.”
말없이 세피아의 손을 잡으며. 그 행동에 세피아가 수줍은 듯 뺨을 붉혔다.
“오늘 리제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수업은 어떠셨나요?”
데일이 화제를 돌렸고, 세피아가 황급히 헛기침하며 웃었다.
“배우는 것이 참 빠르더구나. 무엇보다 마법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을 갖고 있지.”
“그 아이는 좋은 마법사가 될 거예요.”
“……그래, 나도 기대가 되는구나.”
세피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웃고 나서 조용히 데일의 목덜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시린 냉기 속에서 따스함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상황을 넘기기 위해 얼버무린 말에 불과했으니까.
아니었다.
말없이 자신을 포옹해주는 세피아의 따스함에,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데일 역시 팔을 뻗어 세피아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녀의 희고 가녀린 어깨를 휘감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움찔하고 세피아의 당황이 느껴졌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잠시 이대로 있어도 될까요?”
데일이 물었고, 세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데일을 꼭 포옹해줄 따름이었다.
* * *
이튿날.
흑색공의 집무실.
“《그레이브 워커》라고 하였느냐.”
그의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그림자 군주로서 충성하는 기수 중에서, 그림자 법정이나 산의 암살자처럼 암행(暗行)의 프로들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조직을 꾸리고자 합니다. 작센과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수족들이지요.”
데일이 그의 구상을 말했다.
“그것을 위해 길드 시티가 대륙 전체에 펼치고 있는 교역망, 거기에 더해 ‘청색 마탑’이 가진 거미줄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청색 마탑…… 소서리스 의회를 말하는 것이냐.”
흑색공의 말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믿을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느냐?”
“솔직하게 말해서,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
청색의 흑막이 보여준 음흉함을 모를 데일이 아니다. 나아가 그들 소서리스 의회가 감추고 있는 비밀 역시도.
“그러나 그들 소서리스 의회는 ‘정보’를 통해 그림자 군주의 신뢰를 얻고자 하지요. 적어도 그들의 행동 자체를 불신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처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의 기수(旗手)이니, 지금으로서는 네 말을 존중하마.”
흑색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까지 대가 없이 너의 기수를 자처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작센 공작 가임을 잊지 말아다오.”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청색 마탑과 그림자 법정, 나아가 데일이 거느린 세력은 오로지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와 그의 조직은 그렇지 않았다.
피의 유대, 데일이 바로 그 남자의 아들이기에.
“당신이 저의 아버지란 사실을, 그리고 제가 작센 가의 아들이란 사실을.”
세피아가 그녀의 따스함을 보여주었듯, 그것은 데일의 아버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제국자유도시(Freie Reichsstadt).
제국칙령에 의해 성직 제후나 지방 영주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고, 황제 직속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치 도시의 형태다
따라서 제국자유도시는 대개 대륙 무역의 허브나 교통의 요지에 자리했으며, 영주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귀천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 기회의 도시였다.
가령 도망친 탈주 농노가 도시 구석의 노점에서 시작한 사업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이윽고 도시의 실세라 일컬어지는 부르주아(Bourgeois)로 출세하는 일도 그렇게 드물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금이 모이는 곳에는 욕망도 모이는 법이다. 결국 부르주아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의석의 숫자는 정해져 있고, 그 의석을 손에 넣기 위해 벌어지는 정쟁은 말 그대로 피가 피를 부르는 혈투였다.
제국의 암살자와 도적, 각종 범죄자들이 제국자유도시에 그들의 조직과 길드를 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양지에서 도시의 무역과 세금 따위의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 있었고, 음지에서도 하루가 멀다고 도박과 홍등가 영업, 그 외에도 각종 불법 이득의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대다수의 제국자유도시에는 시 의회가 공식적으로 고용하고 있는 용병이나 경비대와 별개로, 도시를 지배하는 실세가 있는 법이다. 그들이 시 의회와 결탁해 음지에서의 일들을 수행해주는 대가로, 시 의회는 양지에서 그들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넘어가 준다.
그즈음.
그렇게 무법과 합법의 경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펼치는 어느 도시에,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조직 밑에는 조직이 있다. 그리고 그 조직 밑에는 또 조직이 있다. 대개 제국에서 그 악명을 떨치는 대 조직의 실체란 무수한 점과 점이 이어져 있는 거미줄에 불과하다.
바로 그 밑바닥에 있는 어느 점조직이자, 당당하게 ‘그림자 법정’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어느 범죄 길드.
스미스는 바로 그 범죄 길드의 마스터를 자청하는 남자였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조직 생활 끝에, 배신의 칼날을 꽂아 넣으며 악착같이 기어올랐다.
그리고 이곳 제국자유도시 할렘을 지배하는 중소 범죄 조직 중에서 확실한 입지를 손에 넣었다.
동시에 도시의 무법자로서, 이 도시가 주는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조직 폭력배를 자처하며.
적어도 몇 초 전까지는 그랬다.
“허허, 이 시펄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냐?”
“아아아악!”
칼날이 그대로 휘둘러졌다. 스미스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다지듯 내리꽂혔고, 그들 조직의 수장이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을 보고도 누구 하나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제국자유도시 할렘의 뒷골목, 스미스가 그림자 법정의 ‘소법정’을 자칭하고 있는 범죄 길드.
바닥에는 살수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조직이 자랑하는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스미스는 그 일곱 명의 베테랑 살수들에게 ‘일곱 칼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뿌듯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도, 그 남자의 암기술을 맞받아칠 수 없었다. 그 남자의 암기 투척에는 정말로 아무 기척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살(瞬殺)이었다.
그저 부채꼴로 흩뿌려지는 여섯 자루 암기들이, 총알처럼 그들 일곱 칼날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고작 일수(一手)조차 받아치지 못하고.
사방에서 소나기처럼 흩뿌려지는 칼날의 비였다.
감히 상대조차 될 수 없다. 말 그대로 압도적이다 못해 절망에 가까운 격차였다.
“느그들이 진짜 그림자 법정의 소법정이라고?”
“아, 아니, 그것이……!”
“허허, 방금까지 그림자 법정 앞에서 겁도 모르고 깝죽거리는 등신이니 뭐니, 그리 말하지 않았나?”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미스가 자랑하는 ‘일곱 칼날’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고,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범죄 길드의 이들이 오줌을 지리며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부터 3초 내로 대가리 박는다, 실시.”
그들을 향해 그림자 대법정의 최고위 암살자, 살검(殺劍) 마스터 바로가 명령을 내렸다.
“예, 형님!”
“알겠습니다!”
“옙!”
그리고 새로운 형님 앞에서 일제히 대가리를 박았다. 참으로 칼 같은 처세였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자기네 길드 마스터의 처참하기 그지없는 추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허, 이 친구들 아주 그냥 대가리 박는 솜씨가 일품이여.”
범죄 길드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모래알 결속이자 충성심이었다.
“혀, 형님! 아니, 보스! 보스! 제발 살려주십쇼! 아악,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고통 속에서 스미스가 애걸했다.
“내가 왜 느그 보스여?”
스미스의 애걸을 보며 마스터 바로가 되물었다.
“부탁드립니다! 평생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쇼!”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느그 보스냐고.”
“그, 그것이!”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 정도 규모의 조직이 이 도시의 왕 노릇을 할 리가 없지. 자, 그럼 다시 묻겠다.”
마스터 바로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 바닥에서 제일 잘 나가는 조직 이름이 뭐냐?”
* * *
그 시각.
마스터 바로가 헤집고 있는 제국자유도시 할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또 하나의 제국자유도시.
이 일대에 있는 것은 ‘자유 도시동맹’이라 불리고 있는 도시들의 동맹이었고, 마스터 바로와 별개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그레이브 워커》였다.
“네놈들 인간들의 세상사 따위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
구릿빛 피부의 다크 엘프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주께서 그것을 바라시는 이상, 마땅히 그에 맞는 정보가 필요하지.”
“마, 말씀하십시오, 누님!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 그러니 제발 목숨을……!”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중소 범죄 길드의 마스터가, 산의 암살자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 도시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조직에 대해, 낱낱이 밝혀라.”
산의 암살자가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처박고 있는 길드 마스터의 입에서, 일체의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 * *
“이상입니다.”
“내 쪽도 저 다크 엘프 아가씨의 말대로라오.”
산의 암살자, 그리고 마스터 바로의 보고를 듣고 그림자 군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법정’이 자유 도시동맹을 지배하고 있고, 그러나 우리 대법정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
그림자 군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고, 마스터 바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 생각보다 아랫놈들 챙기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오.”
“정확히 말해서, 그 아랫놈들이 자기들 멋대로 날뛰는 걸 챙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겠지.”
“허허, 그 말대로라오.”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렸고,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 바로, 나와 함께 자유 도시동맹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림자 법정’을 찾을 것이다.”
끄덕이고 나서 그림자 군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 도시에는 조금 더 품격 있는 악당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