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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82화 (182/301)

182화

* * *

그림자 군주로서 두 엘프 군주와 청색 마탑의 충성을 얻고, 작센의 ‘검은 공자’는 비로소 그의 영지로 돌아왔다.

일찍이 작센 가에 몸을 의탁한 엘프 세피아와 함께.

그날, 작센 공작성의 일실.

그의 아들이 돌아왔을 때, 데일의 육체 밑에 스며들어 있는 시린 냉기를 모를 흑색공이 아니었다.

“…….”

무척이나 무겁고 심란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의 아들아.”

침묵 끝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예, 아버지.”

“고통스럽지 않으냐?”

그 말에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흑색공에게 있어 데일은 그의 아들이다. 어린 여동생 리제와 함께 그가 괴물을 포기하고서 쌓아 올린 가정.

그러나 ‘검은 공자’는 기꺼이 그림자 군주를 자처하며 그 육체에 고대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품었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

흑색공이 짐짓 덤덤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때로 네가 감당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질 때는, 기꺼이 내게 말하거라.”

“…….”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염려를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의 표정에,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제가 짊어지고 있는 것들은, 결코 저 홀로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작센 공작 가에서 제2의 생애를 얻고 나서, 데일이 가진 것들은 결코 그 홀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작센 공작과 헬무트 경, 세피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도움과 유대를 통해 손에 넣은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늘 제가 짊어지고 있는 것들의 많은 것들을 대신 짊어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두 부자의 짤막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머지않아 데일이 그의 집무실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흑색공이 고개를 돌렸다. 작센 공작성의 유리창 너머로 시린 냉기와 저물녘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토의 그 무엇도 아들의 몸속에 흐르는 냉기와 비교할 바가 아니리라.

그 사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저, 아버지로서 그에게 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 * *

“오라버니!”

작센 공작성의 중정으로 나오기 무섭게, 어린 리제가 활짝 웃으며 데일을 찾았다.

“그래, 리제. 나 없는 사이에 마법 수행은 열심히 하고 있었지?”

“네!”

리제가 생긋 웃고 나서 눈을 감았다. 그대로 심장을 따라 흐르고 있는 마나의 기류에 의식을 집중하며, 조용히 팔을 뻗었다.

시린 냉기의 무리가 그녀의 팔을 따라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러나 어엿한 마법으로 성립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와, 아주 멋진 마법이네.”

그럼에도 데일이 미소 지으며 리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고, 리제가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어때요, 엄청 예쁘죠!”

“그래, 무척 예뻐.”

“그럼 더 보여줄래요!”

리제가 1서클조차 이루지 못한 서클의 조각으로 마력을 가공했고, 마력이 일대의 시린 냉기를 머금으며 수정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마법이 아니라 그저 마력의 방출 과정에서 대기와 융합하는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누가 이 아이에게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까. 가령 사람을 죽이는 최적의 군사용 살상 수식 같은 것들.

일곱 살 리제는 일찍이 제국 제일의 천재라고 불린 ‘검은 공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데일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다행스러울 따름이었다.

리제가 펼치는 ‘서리’가 주위로 퍼져 나가며 저물녘 어스름에 빛을 내뿜었다.

“마법이 참 예쁘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씁쓸하게 말했다. 지금도 암혈의 육체 속에서 휘몰아치는 종말의 서리를 뒤로하고.

“정말 예쁘고 아름다워.”

“고마워요, 오라버니! 저 더 열심히 할게요!”

데일의 씁쓸한 미소에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리제는 깊이 이해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해서, 지금의 데일로서는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신비.

“있잖니, 리제.”

“네, 오라버니!”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말했다.

“너는 아주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야.”

“오라버니처럼요?”

“말했듯이, 나는 리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 마법사가 아니란다.”

“그렇지 않아요, 작센의 사람들 모두가 오라버니를 자랑스러워하고 계시는걸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랬어요! 저도 커서 오라버니처럼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라고!”

리제가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렸고, 데일이 말없이 웃었다.

“그럼 이 오빠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됐는지 가르쳐줄까?”

“네!”

웃고 나서 데일이 물었고, 리제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스승을 둬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등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데일의 옛 스승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세피아는 데일의 스승이 아니었다.

“세피아 님!”

“리제, 어느새 어엿한 숙녀로 컸구나.”

“다시 보게 돼서 기뻐요!”

작센 가의 식구나 다름없는 세피아였고, 리제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다. 세피아가 미소 지으며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데일이 말했다.

“이제부터 세피아 님이, 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실 거야.”

“와!”

그 말에 리제가 또래 아이처럼 활짝 미소 지었다.

“나와 함께, 네가 나아가야 할 마법의 길을 함께 알아보자꾸나.”

일찍이 세피아가 어린 데일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듯, 어린 리제의 새 스승이 그곳에 있었다.

* * *

“어허, 시팔. 세상에 평화처럼 좋은 게 없는데 말이여.”

그 시각, 작센 공작 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그림자 대법정.

“도대체 이놈의 새끼들은 뭐가 그리 좋다고 전쟁질이나 처해대고 자빠졌는지 모르겠어.”

탁자 위에 두 발을 걸치며 마스터 바로가 맥주를 홀짝였고, 그 곁에서 그림자 성녀가 미소 지었다.

“세상의 끝이 올 때까지, 황금과 그림자의 투쟁은 끝나지 않으니까요.”

기사의 레이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림자 여신을 섬기는 성녀로서.

그러나 그림자 법정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들 살수가 다가 아니었다.

“참으로 추운 곳이구나.”

후드를 둘러쓰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엘프 사회의 신명을 수행하는 집행자들, 산의 암살자였다.

그것도 제국 국경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제국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강자들이다.

그림자 법정과 산의 암살자.

그들 모두가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고, 나아가 산의 암살자가 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작센 가의 힘을 빌리는 것은 결코 이상할 게 없었으므로.

“다크 엘프들에게 익숙한 기후는 아니겠지요.”

그림자 군주가 말했고, 산의 암살자 하나가 무릎을 꿇었다.

아울러 그림자 법정의 쌍두(雙頭)라 할 수 있는 마스터 바로와 그림자 성녀를 필두로, 법정의 살수들이 그곳에 있었다.

“고대의 맹약에 따라 엘프 왕국이 충성을 바치는 이상, 저 역시 그림자 군주로서 그대들을 위해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색의 흑막이시여.”

나아가 암행의 대가라 일컬어지는 두 조직과 더불어, 그들을 하나로 묶을 마지막 조각이 그곳에 있었다.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그림자 법정과 산의 암살자, 나아가 청색 마탑의 거미줄…… 우리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동시에 하나의 의무를 위해 기꺼이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데일이 말했다.

─ 때가 되었지요. 우리 청색 마탑 역시, 기꺼이 그림자 군주를 위해 침묵을 깨트릴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어디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저에게 충성하는 조직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제국 전체에 그 거미줄을 확실히 구축하는 대작업이 되겠지요.”

가령 그림자 법정의 수뇌를 자처하는 대법정의 경우, 그들도 자기네 조직 전체의 규모에 대해서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점조직 형태의 암살자 길드로 활동하며, 사람 목숨을 금화 몇 닢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소법정’들. 어느 의미에서 이것들은 통제할 수 없는 범죄 조직들의 무리와 같다.

그렇기에 지금도 제국 각지에 흩어져 암약하는 점조직들을 확실히 규합하고 통솔하는 것.

나아가 산의 암살자와 청색 마탑의 거미줄, 거기에 더해 길드 시티가 흩뿌리고 있는 ‘양지의 거미줄’마저 하나로 융합하는 대작업이 되겠지. 그 결과물이 데일에게 가져다줄 이점에 대해서는 굳이 깊게 생각할 것조차 없었다.

침묵의 서약을 맺고 그림자 속에서 충성하는 작센 공작 직속의 최고 친위대 《그레이브 가드(Grave Guard)》들이 그러하듯이.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가, 양지와 암지 모두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하나의 첩보 조직으로 거듭날 겁니다”

오로지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며 암약하는 《그레이브 워커(Grave Walker)》로서.

“허허, 뭐 졸지에 밤의 제왕이라도 되려고 그러시나?”

마스터 바로가 껄껄 웃으며 말했고,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뭐 못 될 거라도 있나?”

하나의 여정이 끝나고 데일이 손에 넣은 것들은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다시금 새 여정을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다음 여정을 시작할 무대는 작센 공작령 너머의 마왕령이나 극동에 있는 열사의 대지도 아니었다.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제국이란 나라 전체, 바로 그 나라의 밤거리와 그림자 속이었으니까.

* * *

제국의 밤거리와 그림자 속.

“아이야, 어서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어 보려무나.”

무척이나 상냥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있어, 그 남자의 존재는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제국의 그림자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다.

가령 도시의 사람 두어 명이 사라지는 것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목숨의 값어치는 낮다. 그렇기에 그 사실이 ‘질 드 레’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았다.

브리타니아 섬을 떠나, 제국의 악마숭배자 결사와 합류하고 적지 않은 시일이 흘렀다.

그의 실험실에 차고 넘치는 재료들과 더불어, 그들 결사(Lodge)의 성과와 함께 강마의 의식은 빠르게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신 같은 것은 없다. 그날, 성처녀가 작센의 동토에서 불타고 스러졌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이 없다는 것이 곧 악마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성처녀시여…….”

이 세상에 자비와 자애의 여신 같은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악신(惡神)이며, 그 악마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질 드 레가 가진 최후의 사명이었다.

“일찍이 당신이 느꼈을 배신감, 신이 없다는 절망감…… 이 질 드 레가, 제국의 모두에게 똑똑히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여신의 자애와 자비를 부르짖는 아이의 목젖을 칼로 내리그으며, 질 드 레가 황홀하게 웃었다.

울컥울컥 피가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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