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81화 (181/301)

181화

* * *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데일이 수정 왕자를 향해 물었다. 그의 체내에 흐르고 있는 흑색의 피와 종말의 냉기를 뒤로하고.

“아, 그러고 보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저주를 받았다고 했지. 불사(不死)의 왕자님.”

지금의 데일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직접 죽여줄 수도 있겠는데.”

그림자 군주가 가진 힘의 무게. 동시에 그의 앞에 있는 존재가 너무나도 덧없는 벌레처럼 느껴졌기에.

“네놈……!”

수정 왕자의 표정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서리 감시자들이 일제히 적의를 내뿜었고, 그때였다.

“아, 다들 그쯤 하쇼. 댁들이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오. 쓸데없이 깝죽거렸다가는 개죽음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걸.”

마스터 바로가 데일의 앞을 가로막고 서리 감시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로 마스터 바로가 고개를 돌린다.

평소의 웃음기가 싹 사라진 채, 얼어붙을 것 같은 표정으로 살검이 데일을 주시했다.

“그보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 맞소?”

마스터 바로가 물었다. 그림자 군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저 엘프 나으리 꼴이 내키지 않아도, 그렇게 벌레 보듯 바라보지는 않았는데 말이오.”

정곡이었다. 그 말에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시린 냉기가 육체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결코 일대의 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냉기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마저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부디 제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기에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게 다였다.

제2제국, 고대 엘프들의 들춘 장막 너머의 미래를 엿보고 오는 것. 그것이 청색의 흑막과 요정 의회가 그림자 군주에게 제시한 시험의 내용이었고, 이것이 그 시험의 결과였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스러지고 우주가 침묵에 빠질 때, 비로소 이 세계를 뒤덮게 될 종말의 냉기.

지금 데일이 손에 넣은 것은 억겁의 세월 끝에 다가올 우주의 겨울, 그 겨울의 조각이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가진 태고의 어둠과 더불어서.

* * *

그림자 군주가 의장(議場)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두 명의 엘프 군주가 무릎을 꿇었다.

데일의 심장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냉기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청색 나비들이 실내를 메우듯 날아올랐고, 나비들이 모여들어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었다.

청색의 흑막이 두 엘프 군주와 함께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그림자의 기수들이, 감히 우리의 군주를 뵙나이다. 섭리의 끝에 도달하신 자여.”

엘프들이 일말의 의심도 없이 데일을 그림자 군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우주의 겨울이 다가올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궁극의 섭리’가 그의 육체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종말의 냉기.

“섭리와 진실의 군주로서, 저는 기꺼이 그대들의 충성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림자는 곧 진실이다. 황금과 태양이 비추는 신기루 너머의 진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아름답지 않고, 때때로 차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추악하며 절망스럽다.

장막을 들추고 우주의 진실을 목격한 고대 엘프 제국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멸했듯.

그리고 그림자 군주로서, 데일이 그들에게 증명한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진실이었다.

우주의 끝에 이르러 찾아올 진실이란 오직 하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일개 필멸자들이 저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엘프 왕국은 결코 섭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얼음과 어둠으로 끝날 테니까.

* * *

제국 황성의 가장 깊숙한 일실에서, 황금의 옥좌에 앉아 있는 대제(大帝)가 고개를 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옥좌조차, 이 회당의 그림자 앞에서는 참으로 덧없구나.”

아서 대제가 말했다. 그 육중한 울림에 그림자 속에서 ‘불과 피의 군주’가 입을 열었다.

“불을 밝혀드릴까요, 폐하.”

“그리하라.”

아서 대제의 말에 그곳에 있는 핏빛공이 손가락을 튕겼다. 일체의 그림자를 몰아내며 찬란하게 빛나는 불빛이 펼쳐졌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이 세상이 얼음으로 끝나리라 말한다.”

황금의 군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처음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잔혹한 진실 앞에서 패배하도록 창조된 생물인가?”

불과 피의 군주를 필두로, 기꺼이 황금의 기수를 자처하는 군주들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그림자 군주 앞에서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처럼.

거짓의 군주 아래 무릎을 꿇고, 기꺼이 거짓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레이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폐하.”

불과 피의 군주가 입을 열었고, 그의 곁에는 양아들 레이 유리스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억하거라, 거짓의 아이야. 우리는 패배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황금의 대제가 입을 열었다. 레이 유리스가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숙였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진실에 맞서 저항하는 거짓의 군주는, 역설적으로 그 어느 인간보다도 인간다운 존재였다.

* * *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두 엘프 군주의 충성을 얻고, 그들 왕국이 기꺼이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맹약을 손에 쥐고서.

사막과 모래의 군주가 있는 열사의 대지 위에서, 그들 왕국의 옛 추방자를 마주하며.

“세피아 선생님.”

“데일…….”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세피아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장미 전쟁 속에서 세피아의 진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자유를 준 것은 데일의 결정이었다.

나아가 청색 마탑의 암시가 풀린 뒤,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목숨의 부채를 탕감해준 것도 데일의 의지였다.

달리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심 자신의 행위를 세피아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보게 돼서 기뻐요.”

데일이 말했다. 자신이 어느덧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덤덤하게.

“…….”

세피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앞에 있는 어린 제자가, 어느덧 이토록 믿음직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그 나날들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꼭두각시의 무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냐.”

그렇기에 세피아가 물었다.

“너를 향해 내가 보여준 것은 결코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짐짓 차가운 목소리를 가장하며.

“그러나 설령 당신이 보여준 것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말에 데일이 말을 이었다.

“세피아 선생님의 거짓은, 저에게 있어 그 어느 진실보다도 진실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

“당신을 좋아합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당신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남자로서.”

“그래, 참으로 멋진 남자가 되었구나.”

세피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 말할 필요 없어요.”

그러나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세피아를 향해,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수정 여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이대로 세피아 선생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데일의 말에 세피아가 숨을 삼켰다.

“세피아 님께서는 더 이상 수정 왕국의 ‘추방자’가 아니니까요.”

세피아로서는 필시 상상조차 하지 못하리라. 지금 암혈의 육체와 종말의 냉기를 손에 넣고, 데일이 무엇으로 거듭나 있는지.

“그림자 군주께서 그리 결정하셨다.”

바로 그때, 멀찍이서 침묵하고 있는 산상노파가 끼어들었다.

“네 앞에 있는 자가 ‘그림자 군주’의 자격을 증명했고, 나와 너의 어미는 기꺼이 그의 기수가 되었느니라. 아울러 군주께서는 추방자로서 너의 무죄를 바라고 계시지.”

“설마!”

그 의미를 헤아린 세피아가 숨을 삼켰다. 방금까지의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동요가 그녀를 움켜쥐었다.

일찍이 세피아는 수정 왕자에 앞서 서리 감시자의 수장이었고,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세피아 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데일이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그림자 군주로서 저의 힘과 세력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지요.”

그녀가 느끼고 있을 마음의 부채를 속이기 위해.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제국의 멸망이며, 황금의 군주를 그의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림자 군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수정 여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세피아의 망설임을 데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데일 역시 그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도 어서 가자, 바로.”

“어, 어디로 말이오?”

“어디기는, 내 영지지.”

“어, 흠흠, 알겠소.”

마스터 바로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데일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기다려다오.”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데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하실 말이 있으신가요.”

“거짓이 아니었다.”

세피아가 말했다. 데일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나날들이 진실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세피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다시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

“…….”

그 말에 일순 데일이 숨을 삼켰다.

“내 의지로, 다시금 너와 함께 작센의 동토(凍土)를 밟고 싶구나.”

세피아가 말했다. 그녀답지 않은 수줍음이 희미하게 깃들어 있었다.

“다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다.”

세피아가 말했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육체를 따라 흐르고 있는 태고의 어둠, 종말의 냉기, 누가 데일을 두고 감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세피아가 비로소 그녀의 마음을 허락해주었을 때, 데일의 가슴을 휘감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처음으로 아이처럼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 수 없었다.

세피아의 앞에서, 흑색의 눈물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 * *

“아, 오늘따라 인간들이 많이 찾아오네.”

우주의 겨울, 그 동토 속에서 ‘겨울’이 입을 열었다. 종말의 냉기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는 화신으로서.

“그림자 군주가 이곳을 찾아갔겠지요.”

그를 앞에 두고 레이 유리스가 입을 열었다.

“거짓의 아이야, 너에게 내가 진실을 알려줄까?”

“기꺼이.”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숙였고, 겨울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너는 그 아이, 그림자 군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도망칠 수 없는 잔혹한 진실이 겨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지.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어. 그게 진실이니까.”

겨울이 조롱하듯 웃었다. 레이 유리스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진실입니까?”

침묵 끝에 레이 유리스가 되물었고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진실을 앞에 두고도, 참으로 덧없는 발버둥을 치는구나.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야.”

“우리는 패배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으니까요.”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일찍이 황금의 군주가 그렇게 말했듯이.

“하, 하하! 재미있구나.”

겨울이 다시금 조롱을 터뜨렸다.

“그래, 어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 보아라, 거짓의 아이야!”

조롱과 함께 겨울이 광소를 터뜨리며 낄낄거렸다.

“네 존재가 그림자 군주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거란 운명을 뼛속에 새기고, 피할 수 없는 우주의 진실을 심장에 새겨넣고,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운명과 진실에 맞서 네놈의 거짓을 관철해 보아라!”

동시에 그의 일대에서 휘몰아치는 종말의 냉기가, 레이 유리스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운명과 진실에 저항하는 네놈의 발악과 어리석음을, 내 기꺼이 지켜봐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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