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 *
서리 감시자들을 따라 그림자 군주가 수정의 대지를 걷고 있었다. 그들 왕국의 가장 깊숙한 곳,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금기의 장소를 향해서.
“아, 이런 시펄. 나는 어쩌다 졸지에 세트로 끌려와 버린 것이오?”
그의 곁에 있는 마스터 바로가 되물었고, 서리 감시자들의 표정에 다시금 적의가 서렸다.
“제발 부탁이니까 쓸데없이 신경 좀 긁지 마라.”
“허허, 이 친구들은 우리가 뭘 해도 신경을 박박 긁고 있는 심정일 거라오.”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웃었고, 서리 감시자들의 수장이자 ‘수정 왕자’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천박하기 그지없는 입을 다물어라, 역겨운 인간아.”
“어이쿠, 역겨운 인간이라고 하셨습니까, 왕자 나리.”
마스터 바로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 내가 느그 옆동네 엘프 여왕님이랑 어? 제국에서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본 사이여.”
그 말에 데일이 어이가 없어 끼어들었다.
“그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가 산상노파 앞에서 다시 들려줘도 되냐?”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소.”
노골적으로 감도는 살벌한 공기 속에서, 수정 왕국의 심부에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도 없는 폐허였다.
일찍이 대륙을 호령한 제2제국의 폐허.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그 모습을 보며 그림자 군주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일찍이 그가 기억하는 옛 세계의 시(詩)였다.
“──그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네. 뭉툭하게 삭아버린 그 거대한 잔해의 주위로 끝없이 황량하며 외로운 모래의 지평이 저 멀리 뻗쳐 있었을 따름이었네.”
“어이쿠, 거 졸라 그럴싸한 음유시구려.”
제국의 폐허를 뒤로하고, 그 너머에 아가리를 벌린 것은 수정의 동굴이었다.
동굴은 끝을 알 수 없는 지저의 밑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내 일대를 휘감고 있는 수정과 얼음조차 사라지고, 그저 대지의 심해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 어둠이 그들을 마주할 따름이었다.
옛 엘프 제국이 섭리의 끝에 닿기 위해 세워 올린 ‘실험장’이 있는 곳.
“저것이다.”
그 끝에서, 수정 왕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대지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옛 제국의 위상을 알 수 있는 화려한 장식과 부조(浮彫)를 새겨넣은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이 너머에 네놈이 치러야 할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선조들께서는 섭리 지배자를 자처하기 위해 사상의 너머로 도달하고자 하셨고,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아물지 않는 참혹한 폐허와 상처가 바로 저 너머에 있지.”
“…….”
“우리는 그것을 게이트(Gate)라고 부르고 있다.”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들어가라.”
수정 왕자가 말했고, 동시에 서리 감시자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었다. 뒤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네놈에게 진정으로 ‘그림자 군주’의 자격이 있다고 할 경우…… 저 너머, 섭리의 끝에 있는 진실을 손에 쥐고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수정 왕자가 차갑게 웃었다.
“그럴 경우, 우리 엘프 왕국은 고대의 맹약에 따라 기꺼이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할 것이다.”
처음부터 데일이 살아서 돌아올 거란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자, 부디 네놈이 군주로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길 바라마.”
“기꺼이 그리하지요.”
그 말에 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찍이 고대 엘프 제국이 닿고자 하는 섭리의 끝, 게이트의 너머를 향해서.
* * *
사슬과 마법으로 굳게 봉해져 있는 신전 입구를 열고, 데일이 망설임 없이 그 너머로 향했다.
신전 내부에 있는 것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광휘였다.
동시에 그 빛은 결코 이 세상의 색상이 아니었다. 수정색이라고 생각하자 비취색으로 바뀌고, 비취색이라 생각하자 자색(紫色)을 머금었으며, 자색이라고 생각하지 비취색이 되었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오렐리아 님.”
그 풍경을 보며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림자 속에서 암묵의 긍정이 돌아왔다.
그렇기에 데일이 그곳에 있는 색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주에서 온 색채(The Colour Out of Space)를 향해서.
빛이 데일의 몸을 휩싸았고, 일찍이 고대 엘프 제국이 들춘 장막 너머의 미래가 펼쳐졌다.
* * *
시린 냉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겨울밤이었다.
바로 그 겨울밤의 풍경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고개를 들었다.
“…….”
그러나 그곳은 결코 데일의 세계가 아니었다.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폐허의 풍경. 황금의 대제조차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이, 그곳에 있었다.
어느 제국과 군주들조차 피할 수 없는 섭리의 끝. 종말의 서리.
“증오에 대해 알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얼음도 불 못지않게 능히 세상을 파멸시키리라고.”
바로 그곳에서, 그림자 군주는 일찍이 수정 여왕이 중얼거린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살과 영혼을 도리는 것 같은 서리가 일대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존재는 그곳에 있었다.
사람의 실루엣을 취하고 있는 백색의 서리였다.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이 세상의 빛과 불꽃을 꺼트릴 것 같은 냉기를 흩뿌리며.
“아, 또 찾아왔네?”
새하얀 냉기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겨울(Winter).”
“엘프들이 나를 시험하기 위해 이곳으로 보냈다.”
“엘프? 아, 나는 벌레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러나…… 아아, 제가 어찌 감히 당신의 존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겨울이라 칭하는 존재가 말했다. 데일이 숨을 삼켰고, 그러나 그것은 데일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이아 슈브 니구라스.”
─ …….
어느덧 데일의 곁에는 옛 어둠의 어머니가 있었고, 슈브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겨울이 다시금 물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는 말없이 드레스 밑의 촉수를 꿈틀거릴 따름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의 소통 방식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리라.
“나에게 네 피를 보여다오, 그림자의 아이야.”
겨울이 말했다. 데일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청색 마력을 응집시켜, 얼음의 칼날로 손목을 내리그었다.
촤아악!
체내에 흐르고 있는 암혈(暗血)이 겨울의 밑바닥 위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 상처를 향해 겨울이 팔을 뻗었다.
냉기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쇄도하며, 데일의 육체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세상의 끝을 가져오는 종말의 냉기였다.
“……!”
말 그대로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소름이 끼쳤고, 소름 속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림자 군주라고 했나.”
겨울이 말했다.
“시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그 말에 그림자 군주는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체내의 혈류(血流)를 따라 암혈의 육체를 헤엄치고 있는 냉기가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 같았다.
“지금부터 결코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종말이, 네 육체 속을 끝없이 흘러 다닐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키에에에엑!」
듣는 것으로 소름이 돋을 것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데일이 딛고 있는 일대의 경계가 뒤틀리며, 마치 시공이 쪼개지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일이 알고 있는 세계의 그 어느 짐승과도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하고 추악한 형체를 가진 사냥개였다.
“아, 사냥개가 ‘부주의한 여행자’를 찾아냈군.”
그것을 보며 겨울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동시에 데일이 그들을 향해 ‘섀도우 불릿’을 영창했다. 개틀링식을 투영하며 끝없이 쏟아지는 어둠의 포화가 사냥개들을 찢어발겼고, 바로 그때였다.
칠흑의 피를 흩뿌리며 고기 조각이 되어 있는 그들의 육체가, 살아 있는 슬라임처럼 꿈틀거리며 다시 융합되었다.
“사냥개들이 너의 냄새를 맡았다.”
겨울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섭리의 그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고, 절대로 도망칠 수도 없는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지. 자,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에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암혈의 육체, 나아가 그 육체 속을 잠식하고 있는 종말의 냉기.
체내를 흐르고 있는 냉기가 그의 심장을 휘감았고, 거기에 휘감겨 있는 슈브의 촉수가 융합하며 미친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데일이 다섯 개의 서클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흑청(黑靑)의 마력.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보통 마법사의 마력’이 아니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가진 끝없는 무저갱의 어둠, 그리고 우주의 끝에 다가올 종말의 냉기.
섭리의 너머에 존재하는 어둠과 냉기, 흑청의 마력이 데일의 발밑을 따라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나의 기사들아.”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말과 함께 휘몰아치는 마력이 데일의 곁에서 사람의 육골(肉骨)을 갖기 시작했다.
사령술사가 마력 하나로 피조물을 생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불가능하지 않다. 데일 정도의 사령술사에게 있어 그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리라.
그러나 그 결과물은 그렇지 않았다.
섭리 바깥의 힘을 손에 넣은 그림자 군주의 피조물.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로 이루어져 있는 기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나아가 그 기사들이 칼끝을 따라 그들의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작센의 흑검(黑劍)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결코 이 세상의 어느 색도 아니었다. 흑색도, 핏빛도, 자색이나 비취색조차 아니었다.
우주에서 온 색채가 그들의 오러에 깃들어 있었다.
그림자 군주의 기사가 비로소 그들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쇄도했다. 사냥개 무리에게 섭리 바깥의 색을 머금고 있는 오러 블레이드가 휘둘러졌고, 다시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림자 군주는 그곳에 있었다.
“슈브.”
미동조차 없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 응, 오빠.
“나는 아직도 인간이지?”
데일이 물었다. 겨울은 아무 대가 없이 힘을 준 것이 아니다. 일찍이 슈브에 의해 암혈의 육체로 거듭나 있듯이, 지금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는 것은 바로 그 종말의 냉기였으니까.
우주의 겨울이 다가올 때까지, 평생토록 데일의 육체를 괴롭힐 종말의 냉기.
─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바로 그때, 어린 슈브가 사랑스러운 듯 데일의 뺨을 휘감으며 물었다.
“……아주 개인적인 일.”
데일이 대답했다.
당장에라도 그의 인간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것 같은 힘과 욕망, 공포를 뒤로하고.
* * *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거느린 채, 섭리 너머의 힘을 손에 쥐고서.
“어, 어떻게…….”
그 모습을 보고 수정 왕자와 서리 감시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보고 있는 데일의 마음속에는, 아무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춥고 추워서, 그의 마음을 녹여줄 온기가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추워.”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종말의 냉기로부터 그의 마음을 녹여줄 수 없다는 것을, 그림자 군주는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