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78화 (178/301)

178화

* * *

──일찍이 수정의 동토와 열사의 사막을 거점으로 과거의 대륙을 호령한 ‘제2의 제국’이 있었다.

고대 엘프들의 국가이자, 그럼에도 너무나도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기에 인간의 역사에는 그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엘프 제국.

“제국의 옛 선조들께서는, 당신들이 자연의 섭리를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

수정 여왕이 말했고, 그녀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를 ‘그림자 군주’의 앞에 드러냈다.

“그들께서는 이 행성 너머 우주의 이치와 별들의 움직임을 헤아릴 줄 아셨으며, 나아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가지고 올 결말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계셨다.”

“……!”

“이 우주는 지금도 얼어붙고 있고,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종말의 서리가 우주와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란 사실을.”

진실의 눈을 통해 데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정보.

“누군가는 이 세상이 불로 끝나리라 말하고, 누군가는 얼음으로 끝나리라 말한다.”

수정 여왕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증오에 대해 알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얼음도 불 못지않게 능히 세상을 파멸시키리라고.”

“…….”

빅 프리즈,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며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끝없이 절대영도에 가까워질 거란 종말의 가설.

백 마디의 말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 진실이, 데일의 뇌가 녹아내릴 정도의 고통을 새겨넣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섭리의 지배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어리석음이, 이 대지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폐허를 남겼지.”

수정 여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선조들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우주에 찾아올 종말을 막기 위해, 섭리의 지배자로 거듭나고자 했고…….”

그렇게 제2제국이 멸망했다.

그 후 비로소 제3제국이라 불리는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 실체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에게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사육장에 불과했다.

상처밖에 남지 않은 열사와 수정의 대지가 엘프들의 터전을 짓밟았다. 남겨진 자들은 비로소 그 섭리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였는지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과거의 과오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영겁의 정체를 택했다.”

수정 여왕이 말했다.

“따라서 그 신명(神命)을 수행하기 위해 수정과 열사의 엘프들로 이루어진 두 개의 조직이 세워졌지.”

하나, 산의 암살자. 일찍이 엘프 사회의 추방자들을 처형하는 조직.

“사막과 모래의 군주에게, 산의 암살자들이 어째서 이토록 잔혹한 자비를 베푸느냐고 물었느냐.”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자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그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지.”

“……!”

“산의 암살자가 수행하는 진짜 목적은, 알량하기 그지없는 자비와 동시에 옛 제국의 부활을 바라며 ‘제3제국’과 협력하는 제국파 엘프들을 숙청하기 위함이다.”

“제국파 엘프……?”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불과 피의 군주를 자청하는 블러드 엘프(Blood Elf) 군주와 그의 여동생을. 아니, 아마 그대에게는 이쪽의 호칭이 더 익숙하겠지.”

“──뱀파이어, 유리스 일족.”

궁극의 힘을 추구하는 적색 마탑의 정점, 핏빛공과 레이디 스칼렛.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수정 여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옛 영광을 잊지 못하고 황금의 군주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제3제국의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지배자로 거듭나 있는 자들. 그들이 바로 산의 암살자들이 처리하고자 하는 진짜 표적이다.”

비로소 이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의 실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옛 제국의 폐허에 남겨진 유산을 감시하고 수호하기로 천명한 또 하나의 조직이 있다.”

동시에 수정 여왕의 그림자에서, 그들 조직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서리 감시자(Sentinel of Frost).

“그곳에 남겨진 결코 없앨 수 없는 제2제국의 유산을 지키고자, 산의 암살자와 더불어 신명을 수행하는 스노우 엘프들의 조직이지.”

“그럼 설마 세피아 님께서는…….”

“그 아이는 서리 감시자의 조직을 통솔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고, 그 규율을 깨트렸다.”

일찍이 엘프 제국의 선조들이 손에 넣은 금기의 힘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수정 여왕의 그림자 속에, 그날의 진실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서리 감시자들이 지켜야 할 그곳에 적색 마탑의 블러드 엘프들이 습격했고, 가까스로 그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

잔혹하게 미소 짓는 레이디 스칼렛과 적색 마탑의 강자들. 그에 맞서 ‘서리 감시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거의 세피아.

그러나 그것은 결코 대가 없는 승리가 아니었다.

‘세르!’

‘누, 누님…….’

그녀의 곁에, 상처 입은 스노우 엘프가 있었다.

“블러드 엘프들을 물리치고 나서, 그 아이의 동생이자 나의 아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

“섭리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상처였지.”

비로소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무심코, 처음 세피아를 보았을 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선생님께서는 흑색 마탑의 사령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망자를 되살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생각하느냐?’

‘그,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죽음이 예정된 중병의 환자를 소생시키는 사제들의 신성(神聖)은, 자연의 뜻인가?’

그렇게 말하며 세피아가 짓는 씁쓸한 미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아이는 서리 감시자의 의무를 저버리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를 깨고 금기에 손을 댔다.”

수정 여왕이 말했다.

“죽었어야 할 그 아이의 동생이자 내 아들의 심장을 ‘절대영도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목숨을 구했지.”

그것을 위해 제2제국의 유산이자 섭리를 거스르는 금기의 마도서…… 『절대영도의 서』를 취했다.

그 행위가 갖는 의미를, 나아가 그 행위가 가져올 여파를 세피아가 모를 리 없었으리라.

그렇게 세피아는 수정의 대지에서 추방되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의무를 저버린 동족의 배신자로서.

“그것이 그 아이의 진실이다.”

수정 여왕이 말했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알 수 없는 감각이 심장을 옥죄었다.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데일이 펼치고 있는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가 소멸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저의 계약을 이행할 것입니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수정 여왕의 표정에 다시금 어머니의 동요가 깃들었고,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요정 의회의 풍경이 비로소 데일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데일 역시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해제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었다.

* * *

그 시각, 적색 마탑의 일실.

어둠 속에서 유리스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귀족 영애가 전라로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 자신이 그의 먹잇감이 될 거란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잔뜩 부풀어 있는 꿈에 취해서.

“……너무 춥구나.”

그대로 유리스 후작이 고개를 돌리고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렇게 춥지.”

옛 제국의 영광을 기억하는 지배자이자 고대 엘프 중 하나로서, 나아가 그 제국이 ‘섭리의 지배자’를 자처하며 다가올 우주의 미래를 엿보았을 때…….

장막 너머의 미래에서 휘몰아치는 ‘종말의 서리’를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의 그 어느 불꽃과 열기도 그것을 녹일 수 없다. 적색 마탑주로서 자신이 가진 불꽃조차, 그 앞에서는 휘몰아치는 태풍 속의 촛불에 불과하다.

그 시린 냉기, 종말의 서리가 지금도 그의 존재를 휘감고 있다. 영겁의 세월에 걸쳐 그를 괴롭히는 추위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망칠 수 없는 절대영도의 끝, 우주의 죽음.

이 세상은 얼음으로 끝나리라.

그러나 그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미래의 일이다. 그럼에도 영생의 삶을 가진 엘프들에게 있어, 그 까마득할 정도의 미래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불이 필요했다. 종말의 서리마저 녹여버릴 수 있을 정도의 겁화가.

“이대로 얼어붙어서 죽을 것 같아.”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귀족 영애가 몸을 뒤척이며 유리스 후작에게 고개를 파묻었다.

“이제 좀 따듯하신가요, 후작님?”

아양을 떨며 영애가 물었고, 유리스 후작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따듯함을 음미하며.

“아, 무척이나 따듯합니다.”

시퍼런 서슬을 가진 그의 송곳니를 핏빛의 입술 속으로 감추며.

* * *

요정 의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휴회(休會)를 갖고, 데일은 비로소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어이쿠, 시펄. 벌써 끝나셨소?”

의회에 출입할 수는 없으나, 그 바깥에서 데일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아직 멀었다.”

데일이 말했고, 마스터 바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데일이 되물었다.

“산상노파가 직접 너를 보증하고 출입을 허락했는데, 달리 거절한 이유라도 있나?”

마스터 바로는 결코 외부자가 아니었다. 당장 데일이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의지로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허허, 내가 거기 있어 봐야 뭐 달라지겠소?”

“내 힘이 되겠지.”

그 말에 마스터 바로가 재차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댁 앞에 대가리 박는 것은 사실이오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충성은 별개의 것이라오.”

“뭐, 그 정도야 일찌감치 알고 있지.”

데일도 딱히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네 진실을 보았다.”

“아, 그러쇼.”

데일의 말에, 마스터 바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는 데일에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에 너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도 찾기 힘들겠지.”

“이런 쉬펄.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래, 칭찬이다.”

마스터 바로가 대답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등줄기를 훑는 듯한 냉기가, 일대를 휘감았다.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아, 네놈이 그 유명한 ‘검은 공자’였나.”

수정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 남성이 그곳에 있었다. 등 뒤를 따라 침묵하고 있는 ‘서리 감시자’들을 거느린 채.

“…….”

처음 보는 얼굴, 그럼에도 데일은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일찍이 세피아가 동족의 규율을 깨트리며 목숨을 구해준 남동생이자, 수정 여왕의 아들.

“일족의 배신자가 들러붙었다고 하는 작센의 후계자가, 고작 이깟 애송이였다니.”

데일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스노우 엘프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데일은 그의 말을 흘려 넘기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곳에서 마저 하도록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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