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 *
“역겨운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뚝 솟은 탁자를 중심으로 열사와 수정의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일찍이 대륙을 일통했다고 자랑하는 제국이 감추고 있는 진실. 열사와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엘프들의 왕국.
모래와 사막의 군주, 그리고 수정 여왕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두 왕국의 지배자들이 데일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법정에 서 있는 피고를 바라보듯이.
요정 의회의 개막이었다.
“역겨운 인간이라니요, 말을 조심하시지요.”
바로 그때였다. 수정 여왕의 곁에 있는 스노우 엘프 하나가 입을 열었다.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에르제다.
“존경하시는 의원님 모두가 알고 계시듯, 우리의 앞에 있는 계시는 존재께서는 결코 보통의 인간이 아니랍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은 스노우 엘프 왕국의 의원으로서일까, 혹은 청색 마탑이 대륙에 흩뿌리고 있는 ‘거미줄’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함일까. 아마도 둘 다겠지.
“하!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짓 왕들이 우리 종족의 환심을 사고자 그 이름을 참칭(僭稱)했는지,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너무 열 내지 말게나, 존경하는 의회의 아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으려는 초로의 다크 엘프를 가로막은 것은, 어린 다크 엘프의 모습을 가진 산상노파였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이 엘프들의 다가 아니다.
“폐하!”
초로의 다크 엘프가 당혹과 함께 숨을 삼켰다. 마치 감히 우러러볼 수 없는 윗사람을 대하듯이.
“…….”
그 모습을 보며 세피아의 어머니, 수정 여왕은 말없이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어쨌거나 그림자 군주를 참칭하는 거짓 왕들 속에서, 진정으로 그 자격을 가진 자를 헤아리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 아니더냐.”
사막과 모래의 군주가 말했다.
“그 말대로입니다.”
그렇기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쏟아지는 엘프들의 눈빛, 나아가 거기에 서려 있는 적의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전개할 때와 비교할 바는 아니나, 데일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통찰은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꼭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힘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이곳을 찾은 것은 두 가지의 목적입니다.”
데일이 말을 이었다.
“하나, 그림자의 기수를 칭하는 그대들에게 그림자 군주로서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것.”
곳곳에서 조소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둘, 청색 마탑을 대행해, 수정 여왕 폐하의 따님이자 수정 대지의 추방자…… 세피아 님의 무사를 보증하고 목숨의 채무를 탕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세피아의 이름이 나왔을 때, 장내에는 깃털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
사막과 모래의 군주 곁에서, 옥좌에 앉아 있는 스노우 엘프는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냉기와 수정의 군주여, 부디 대답을 해주지 않겠나.”
수정의 대지를 지배하는 여왕이자, 겉으로 보기에 산상노파와 비슷한 어린아이의 체구를 가진 소녀였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 그렇게 하라.”
침묵 끝에, 수정 여왕이 대답했다.
“작센의 동토(凍土)에 있는 이상, 그 아이의 목숨에 대해 산의 암살자들이 손을 대는 일은 없으리라 보증하마. 달리 이의가 있는 자가 있느냐?”
그녀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수정 여왕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마치 이 이상 볼일 같은 것은 없다는 듯이.
“이것으로 의회는 폐회하겠다.”
“잠시……!”
딱 잘라 말하는 수정 여왕을 향해, 데일이 다급히 되물었다.
“그것이 다입니까?”
“달리 바라는 것이라도 있느냐, 작센의 아이야. 설마 우리가 이대로 무릎을 꿇고 왕국을 거저 넘겨주길 기대라도 했느냐?”
수정 여왕의 표정에 비로소 싸늘한 조소가 감돌았고, 데일이 입을 다물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그 아이는 네 것이 되었다. 네가 그 아이를 어떻게 다룰지는 알고 싶지 않고, 또 알 필요도 없지. 이야기는 끝이 났다.”
자신의 딸을 대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싸늘함.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수정 여왕의 말마따나 그것이 데일의 목적이란 것에 대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대로 제의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개운치가 않았다.
아직 세피아의 진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 진실을 알기 전까지, 설령 작센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임시 대책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산의 암살자들이 그들의 동족에게 베푸는 잔혹한 자비에 대해서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니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등을 돌린 수정 여왕을 향해, 데일이 입을 열었다.
촤아악!
암혈의 육체가 격동하며, 슈브의 촉수가 그의 육체를 휘감고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로 가득 차 있는 진실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에서 거짓의 장막 너머에 있는 진실을 엿보는 눈동자가, 그대로 수정 여왕의 그림자를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림자 군주가 딛고 있는 발밑 일대에서, 냉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영창이나 마력의 기류를 깨달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터무니없는 신속. 얼음의 냉기가 데일의 발밑을 시작으로 그 존재를 집어삼키는 것은 찰나의 일이리라.
그러나 지금의 데일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쫓을 수 없는 경지의 것이 아니었다.
──진실의 눈이 그것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저 남의 비밀이나 과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투란 것은 그야말로 진실과 거짓의 무도(舞蹈)와 같다. 검이 어디로 휘둘러질까, 마법이 어디로 내리꽂힐까. 상대의 의도, 블러핑, 페이크, 전투란 그 헤아릴 수 없는 결정의 기로 사이에서 하나의 진실을 헤아리는 시험과 같으니까.
‘보였다.’
그렇기에 휘몰아치는 냉기가 데일의 발밑을 집어삼키기 전에, 땅을 박차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길 필요는 없다.’
땅을 박차고 움직이며, 그림자 군주가 생각했다.
‘그저 보는 것으로 족하다.’
일순(一瞬)의 깜빡거림,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승리할 필요조차 없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니까.
설령 그 상대가 수정 여왕이라고 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다.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군주가 가진 진실의 눈이 비로소 이채(異彩)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진실의 눈에 비치고 있는 그 존재가.
──생물의 망막은 빛의 정보를 전기적 정보로 바꾸고, 시신경(視神經)을 통해 뇌로 전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체의 상을 맺고 이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데일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것은, 등을 돌린 수정 여왕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녀가 세워 올린 ‘수정의 거울’이 빛을 굴절시켜 튕겨내고 있는…… 데일 자신의 그림자였다.
“……!”
이계의 용사가 그곳에 있었다. 가슴팍을 찢고 성검의 칼날이 튀어나와 있는,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자신이.
“무엇이 보이느냐, 진실의 군주를 자처하는 인간의 아이야.”
수정 여왕이 등을 돌린 채 되물었다. 데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결코 밝힐 수 없는 진실이었으니까.
“필시 말할 수 없는 진실이겠지. 평생을 거짓의 장막 속에 감추어 놓고 싶은 비밀로서.”
수정 여왕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정작 자기 자신을 거짓의 장막에 감추어두고 있는 자가, 감히 진실의 군주를 자처하며 우리의 그림자를 염탐하려는 것이냐?”
“…….”
“네놈에게 진실의 군주를 자처할 자격 같은 것은 없다. 일찍이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는 자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 비웃음에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놈에게 있어 진실이 갖는 무게는, 청색 마탑이 생각하는 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수정 여왕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 말에 데일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진실이란 것을 상대의 목줄을 쥐는 무기, 그 이상도 이하로 여기지도 않고 있지.”
사막과 모래의 군주 역시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데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데일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수정 여왕이 비추고 있는 그녀의 거울, 그 속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
이계의 용사, 작센의 ‘검은 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세피아가, 그곳에 있었다.
다정하게 데일을 향해 미소 짓는 스승이. 일찍이 그가 가진 살육의 재능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데일을 위해 곁에 남아준 스승이.
‘나는 그저 네가 슬퍼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란다.’
세피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딛고 있는 발밑을 중심으로 일대의 세계가,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풍경을 덧씌웠다.
오로지 데일과 수정 여왕, 둘밖에 허락되지 않는 심상의 세계를 펼치며.
“여왕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데일에게 결코 전의(戰意)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저는 기꺼이, 당신에게 저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등을 돌린 수정 여왕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어린 스노우 엘프의 육체, 그럼에도 그녀의 모습에 일말의 애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실이라고 하였느냐, 인간의 아이야.”
“그렇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여전히 네놈에게 있어 진실이란 것은 그저 교섭의 카드이고, 협상의 목줄을 쥐기 위한 무기에 불과하겠지.”
수정 여왕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저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기에 밑천을 드러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더냐.”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아니, 그 말이 옳습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있어 진실이란 그저 상대의 목줄을 쥐고 협박하기 위한 카드이며, 저 자신의 약점에 불과합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에게, 기꺼이 제가 가진 카드와 밑천 전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일순 수정 여왕이 숨을 삼켰다.
“설령 그렇게 해서라도 세피아 선생님을 돕고자 하는 것이, 제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의 진실입니다.”
그림자 군주로서, 나아가 진실의 군주로서 데일이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냐?”
“세피아 선생님을 좋아하니까요.”
데일이 대답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설령 보답을 받지 못할지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아니, 내심 보답을 바라고 있지요. 그게 진실입니다. 그러나 보답받지 못할지라도, 저는 기꺼이 세피아 선생님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것 역시도 진실이지요.”
아무리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치장하려고 해도 치장할 수 없는 진실.
“그게 다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정말이지 그게 다였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시린 냉기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며.
“…….”
그 말에 수정 여왕의 표정에 비로소 동요가 어렸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림자 군주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수정의 거울로 가린 그녀가 이 이상의 악의를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절대영도의 금술(呪術)에 손을 대었다.”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저주가 그녀의 심장에 깃들어 있지.”
그 의미를 헤아린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절대영도의 서(Book of Absolute Zero)』……”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수정 여왕의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나의 딸이 수정의 대지에서 추방당한 까닭이다.”
냉기와 수정의 군주가 말했고,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딸아이를 헤아리는 부모의 동요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