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 *
다크 엘프의 왕국, 그리고 그 왕국의 여왕을 자처하는 사막과 모래의 군주.
마스터 바로와 데일이 있는 곳은 바로 왕성의 호사스러운 일실이었다.
“허허, 이 땅덩어리에 제국 말고도 이런 군주들의 왕국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산상노파의 밑에서 검을 사사했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내 스승이 여왕 폐하였을 줄은 몰랐다오. 이럴 줄 알았음 좀 더 제대로 모실 거였는데 말이지.”
“꼬라지를 보아하니 별로 좋은 제자는 아니었나 보지.”
“허허, 까놓고 말해서 스승도 남 말을 하실 처지는 아니셨다오.”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어릴 적, 제국 뒷골목에서 부모도 없이 굶어 뒤지기 직전의 나를 거두어주셨지. 거, 사람 모가지 따는 싹수가 있다나 뭐라나.”
“……남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 평생 대가리 박고 살아도 부족할 것 같은데.”
데일의 말에도 마스터 바로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즈음 스승님께서는 제국을 전전하며 ‘산의 암살자’로 활약하셨고, 덕택에 나 역시 스승님 곁에서 실컷 좆뺑이도 치고 콩고물도 이것저것 주워 먹었지.”
“그래서 살검(殺劍)으로 거듭날 수 있었나.”
마스터 바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스승님께서 열사의 사막으로 돌아가시고, 나도 그 길로 이름 좀 떨치다 어느 대귀족 밑에 들어갔지. 뭐, 그렇게 스무 해쯤 꿀 같은 직장에서 꿀 좀 빨다가…… 그다음에는 보시다시피 말해준 대로요.”
딸에게 악마가 씌였다며 날뛰는 주군의 등에 칼을 찌르고,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기사로서의 전부를 내버렸다. 마스터 바로의 말처럼, 그것이 데일이 그의 그림자에서 목격한 진실이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이라.’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손에 넣은 이형의 능력, 진실의 눈. 비로소 그 능력의 무게를 이해하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훑었다. 동시에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마력량.
5서클과 더불어 적색 마력으로 심장에 열기관을 생성할 수 있는 지금조차 그 능력을 유지하기가 벅차다. 그리고 그것은 능히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힘이었다.
“그러시는 댁도, 애초에 스승의 일로 이곳 열사의 사막을 찾은 게 아니오?”
데일이 상념에 잠겨 있는 그때, 마스터 바로가 입을 열었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의 암살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처신을 두고 뜻이 엇갈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 협상을 위해서 열사의 대지를 찾았는데…….”
이렇게 스케일이 커질 줄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산상노파이자 사막과 모래의 군주에게 세피아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여왕이 돌려준 것은 그녀 홀로 세피아의 처신을 결정할 수 없다는 맥빠지는 대답이었다.
열사의 대지에 있는 다크 엘프의 왕국, 나아가 수정의 동토에 있는 스노우 엘프의 왕국. 엘프 사회의 추방자 세피아는, 지금도 두 왕국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와 다툼의 중심에 존재했다.
“거, 처음에 세운 그럴싸한 계획은 다 조져버리신 모양이지.”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설마하니 댁의 스승님이 엘프 왕가의 혈통이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수정 여왕의 어린 딸이자, 스노우 엘프 왕국의 추방자.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럼에도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산의 암살자들로부터 세피아 님을 지켜드리는 것은 내가 진 빚을 갚을 유일의 방법이고, 그것을 위해 그림자 군주로서 그들을 설득할 테니까.”
데일이 설득해야 하는 것은 결코 다크 엘프 왕국의 여왕 하나가 아니었다.
“요정 의회라, 이름부터 참 졸라게 꽉 막혀 있는 냄새가 풀풀 나는데.”
“별수 있나.”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세피아는 결코 산의 암살자들이 가진 칼날에 맞서,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정도로 약하지 않다. 그러나 일찍이 산상노파가 보여준 모습을 알고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정말 그럴 마음을 먹을 경우, 설령 천하의 세피아라 하더라도 그들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청색의 암시에서 풀려나 자유의지를 손에 넣은 세피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보장은커녕 그녀가 데일을 어떻게 생각할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의 말마따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허허, 참으로 스승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상하구려.”
마스터 바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데일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 * *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홀로 제국의 땅을 정처 없이 방황하는 추방자의 앞에.
“……새로운 임무입니까.”
청색의 꼭두각시, 어리석은 요정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청색의 첩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첩자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찍이 교회 첩보 조직의 수장 디미르가 그러하듯이. 세피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세피아가 청색의 첩자로서 데일의 곁을 지킬 때, 그녀는 결코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피아의 진실을 깨닫고 나서 ‘그녀의 제자’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손에 넣은 자유였고,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청색 마탑은 여전히 그녀의 목숨을 저당잡고 있고, 세피아는 청색의 꼭두각시로서 다시금 내려질 임무를 기다릴 따름이니까.
─ 그렇지 않다, 수정 여왕의 어리석은 딸아.
그러나 청색의 나비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은, 무척 뜻밖의 말이었다.
─ 네가 우리에게 짊어진 ‘목숨의 부채’는 모두 갚아졌다.
“……자유입니까.”
그러나 동요는 잠시였다. 자유를 손에 넣고 나서 그 뒤에 찾아올 것을, 모를 리가 없는 그녀였으니까.
엘프 사회의 추방자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신, 산의 암살자들.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세피아는 동요하지 않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 무엇을 착각하고 있구나.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성질의 것이었다.
─ 네 목숨의 부채는 말 그대로 모두 탕감되었다. 그리고 무척 다행스럽게도, 네 빚을 탕감해준 그림자 군주께서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있더구나.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세피아가 아니었다.
“어째서…….”
그러나 세피아가 데일의 곁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청색의 첩자로서 수행한 임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림자 군주’는 기꺼이 그녀가 청색에 지고 있는 목숨의 빚을 갚아주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 그리고 지금 그림자 군주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산의 암살자’들과 채무를 이행하고자 열사의 대지에 머물고 계시지.
이어지는 말에, 세피아는 다시금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자, 비로소 자유를 손에 넣은 아이야. 이제 너의 길을 가려무나.
청색의 흑막이 속삭였다.
음습한 거미줄로 가득 찬 그녀의 둥지, 청색 마탑의 정점에서…… 그녀의 나비들이 물어오는 속삭임을 뒤로하고.
* * *
암혈의 갑주가 데일의 육체를 휘감았고,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전개되었다.
“……!”
그러나 그 아바타는 이전처럼 알기 쉬운 형태의 힘을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상에서 빛이 사라졌다.
열사의 사막을 비추고 있는 햇빛이 사라지고,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풍경이 데일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마치 죽은 자들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저승이 펼쳐져 있었다.
동시에 급속도로 심장의 마력이 고갈되었고, 다섯 개의 서클을 회전시키며 적색 마력을 통해 ‘열기관’을 덧씌운다.
열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어 동력을 발생시키는 이계의 심상.
밑 빠진 독처럼 마력을 잡아먹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전력을 통해 마력을 짜내기 시작했다.
그대로 다크 엘프 여왕의 왕성, 그 일실에서 ‘진실의 눈’을 가진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펼쳐져 있는 왕도의 거리. 그곳을 오가고 있는 다크 엘프들의 존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이었다.
진실이란 것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나아가 그것은 엘프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은 그림자를 지니고 있고, 그림자 군주의 눈에 비치는 것은 바로 그 진실이었다.
마스터 바로가 성자(聖子)처럼 느껴질 정도의 추악한 진실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질투, 욕망, 증오, 그들이 옷장 속에 감추고 있는 가장 비밀스러운 해골들이 펼쳐져 있었다.
뇌가 타버릴 것 같은 격통 속에서 데일의 육체가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그의 그림자가 움직이며 여성의 실루엣을 이루었다.
레이디 섀도우, 오렐리아.
“주군!”
자세를 잃고 무너지는 데일을 부축하는 오렐리아였고, 그녀의 그림자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피바다 속에서, 오로지 제국을 향해 복수를 결의하는 핏빛 성처녀.
그녀가 느끼고 있을 살육의 희열, 성처녀의 이름 뒤에 가려진 핏빛의 진실이 그곳에 있었다.
나아가 ‘검은 공자’ 앞에서 패배하고 왕국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절망마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데일의 충성스러운 꼭두각시이자 그림자 속의 검이 되기를 자청했다.
“…….”
그것이 오렐리아의 진실이었고,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데일이 짊어져야 할 것들의 무게가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천금처럼 무겁고 무거워, 당장에라도 압사당할 것 같은 무게였다.
* * *
엘프의 왕국에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주 유례가 없는 일은 아니란 듯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림자들의 군주를 자처하며, 나아가 엘프 사회의 규칙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결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무게를 알고 있는 까닭에 ‘요정 의회’가 소집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데일이 열사의 대지에 도착하고 나서, 그로부터 얼마 후.
다크 엘프의 왕국과 스노우 엘프의 왕국 사이에 있는 접경지.
열사와 수정의 대지가 마주하고 있는 접경지는 바다였고, 요정 의회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그 바다 위의 어느 섬이었다.
그림자 군주와 마스터 바로는 그곳에 있었다.
산상노파이자 사막과 모래의 군주, 나아가 요정 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다크 엘프 사회의 의결자들과 더불어…….
동토의 대지에서 자신의 딸을 추방한 어머니, 수정 여왕과 스노우 엘프 사회의 장로들과 함께.
일찍이 대륙을 일통하고 유일무이의 국가를 천명한 제국조차,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두 왕국의 수뇌가 모여 있는 자리였다.
그 무게를 모를 데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진실의 눈’을 손에 넣은 데일이다. 해야 할 것은 명쾌했다.
추방자로서 동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세피아의 빚을 탕감하고, 나아가 그림자 군주로서 기수(旗手)들을 마주하며, 그 무엇보다도…….
어째서 그녀가 동족들의 고향에서 추방되어, 이방자들의 대지를 전전하고 있는지.
비로소 세피아의 진실과 마주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