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 *
“그것은 그림자 군주로서의 자격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다짜고짜 자신이 이 다크 엘프 왕국의 지배자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드넓은 엘프들의 왕국조차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속에 존재하는 일부였으며, 궁극적으로 데일이 주장하는 왕위는 바로 그 그림자의 제국 전체를 일컫는 것이었으니까.
“황금의 제국에 맞서, 저는 기꺼이 그림자를 자청하는 이들의 왕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개가 가상하구나, 인간의 아이야.”
데일의 말에 산상노파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기꺼이 그림자의 군주가 되겠다고 말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 묻겠다. 그림자가 도대체 무엇이냐?”
산상노파가 되물었다. 데일은 입을 열려다 말고, 일순 침묵을 지켰다. 그림자는 그림자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렇게 알기 쉬운 대답이 아니리라.
“어두운 것들의 왕을 자청하느냐? 그것은 이미 그대의 아버지, 어둠과 죽음의 군주가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더냐.”
산상노파, 나아가 그들 다크 엘프들은 결코 제국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아니, 어느 의미에서는 데일 이상으로 그들 제국의 비밀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리라.
“황금과 그림자, 애초에 무엇이 우리를 황금과 그림자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냐? 어째서 불과 피의 군주가 황금의 기수를 자처하며, 어둠과 죽음의 군주가 그림자의 기수를 자청하는 것이냐?”
그녀가 말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핏빛공과 흑색공의 진명(眞名)이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숨을 삼켰다.
“대답해 보아라, 그대가 무엇에 맞서 무엇들의 군주를 자처하는지.”
그녀의 물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데일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흑색공의 말처럼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을 그저 고대의 광신이라 넘겨짚으며, 그저 그림자를 칭하는 존재들의 왕이 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애초에 무엇이 그들을 황금과 그림자로 구별하는 것일까?
“자신이 무엇의 군주가 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네 기수(旗手)가 되기를 자처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의 왕이 되기를 결의했느냐?”
“…….”
그것은 그저 말 그대로의 시험이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데일이 진정 무엇들의 군주를 자청하고 있는지. 그저 데일이 그렇게 불리는 까닭에, 그들의 기수를 자처하는 얄팍하기 그지없는 이유가 아니라.
산상노파는 진정으로 데일이 가진 군주의 자격을 시험하려 하고 있었다.
까마득할 정도의 고대부터 이어진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그 대립 속에서 저마다의 세력들은 저마다의 기수를 자처하며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마따나 정작, 데일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황금과 그림자로 규정 짓는가?
도대체 무엇을 바탕으로 ‘검은 공자’는 그림자 군주를 칭왕(稱王)하고 있는가?
어두운 것의 왕을 자청하는 것은 말마따나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의 몫이다. 이 대지에 흐르고 있는 피바다의 왕을 자청하는 것은 적색 마탑주,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다. 그들이 군주로서 자청하는 것들은, 적어도 그들이 대가(大家)라고 자청하는 것들이었다.
──그럼 황금과 그림자는?
잊을 수 없는 데일의 적, 제국의 정점에 군림하는 아서 대제를 떠올렸다. 무엇이 그를 황금의 군주로서 존재하게 했지?
부? 황금의 재산? 아니다. 그렇담 황금의 군주가 되는 것은 황제나 제국이 아니라, 길드 시티의 시티 마스터나 은행장의 몫이 될 터였다. 그러나 아니다. 설령 그들이 천금의 재화를 축적하고 있더라도, 결코 그 자들이 진정으로 ‘황금의 군주’가 될 수는 없으리라.
그럼 무엇이 황금을 황금으로, 그림자를 그림자로 존재하게 하는가?
“참으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인간의 아이야.”
그 사실을 꿰뚫고 있는 산상노파가 다시금 조소를 흘렸다.
“자신이 무엇들의 군주가 되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그저 충성하는 기수들이 있기에 그들의 왕을 자처했느냐? 일찍이 그대가 작센 공작 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작센 가의 후계자’를 자처했듯이?”
“……!”
데일이 숨을 삼켰다. 산상노파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출생의 귀천과 그 불공평함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그대가 말하는 그림자 군주의 이름이 갖는 무게는, 그대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임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지.”
일찍이 슈브나 ‘죽음’처럼 데일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지적이 결코 그 의미를 잃는 것도 아니리라.
침묵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니, 아이야?」
바로 그때, 그림자의 여신…… 옛 어둠과 검은 풍요의 어머니가 물었다.
여느 때처럼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성숙하고 기품 있는 숙녀의 형태가 되어서.
그녀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됐어, 슈브.”
그러나 데일은 그녀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망설임 역시 길지 않았다.
“누구나 옷장 속에 해골을 감추고 있다.”
데일이 말했다.
“호오.”
그 말에 산상노파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존재하며,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요.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림자를 갖고 있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결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임시 대책이나 무엇이 아니라, 그저 산상노파의 물음 속에서 깨달은 ‘그림자의 진실’을 입에 담기 위해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조차, 설령 천금의 재화와 힘을 가진 존재들조차 그 규칙에서 예외일 수 없겠지요.”
“그럼 다시 묻겠다, 그림자의 왕을 칭왕하는 인간의 아이야.”
그 물음에 비로소 산상노파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림자란 무엇이냐?”
그리고 데일이 대답했다.
“──도망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누구나 옷장 속에 감추고 싶어 하는 해골.
“황금의 제국, 나아가 황금의 군주가 찬란하게 빛나는 금으로 그들의 치부를 가리고…… 거짓의 군주를 자처하듯이. 저는 그들과 맞서, 기꺼이 진실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군주가 되고자 합니다.”
불과 빛의 제국에 맞서 데일이 군주로서 가져오고자 하는 제국.
일평생을 제국의 용사로 그들의 거짓과 황금을 치장하는 데 희생당했다. 그러나 데일은 그 황금 속에 감추어진 추악함을 그 무엇보다 뼈저리게 이해하는 자였다.
황금과 보석,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치장(治粧)하는 것은 곧 그들의 진실을 덮는 것과 같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은 바로 그 거짓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데일이 그들 황금의 제국에 맞서 ‘그림자 군주’를 칭왕하는 것.
그 무게를 비로소 곱씹으며,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말을 이었다.
비로소 데일의 적, 황금의 군주와 그가 내세우고 있는 제국의 가장 추악한 진실을 이해한 까닭에.
“저는, 기꺼이 저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을 위해 진실의 군주가 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그 말은 결코 지금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한 거짓도 무엇도 아니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콰직!
그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서클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5의 서클을 휘감고 있는 슈브의 촉수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3서클 이후부터 마법사의 성장이란 결코 기교나 지식의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대륙의 역사 속에서도 고위 마법사들의 수가 적은 이유는, 그 깨달음을 목도하고도 그것을 이해할 정도의 깊이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데일의 경우는 예외였다.
이제 막 5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고 자리를 잡아야 할 마법사가, 또다시 그의 앞에 있는 깨달음을 앞두고 있었다. 두 삶의 경험을 토대로.
“호오……!”
뒤틀리고 있는 심장과 마나의 동요 속에서, 암혈의 육체가 폭발하듯 데일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속삭임이 들려왔다.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이즈처럼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속삭임이, 비로소 데일의 머릿속에서 그 형태를 갖추었다.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데일의 시야에, 비로소 이 세상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쏟아지는 열사의 대지와 빛이 사라지고, 짙게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 속의 진실이.
마스터 바로의 그림자, 나아가 그림자 속에 그의 진실이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미쳐버린 주군이 발광하며 그의 딸아이를 죽이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마스터 바로는 주군의 명령을 거스르며 기사의 수치가 되기를 자처했다.
‘도와줘, 바로. 바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제가 아가씨를 지켜드릴 겁니다.’
아가씨, 그림자 성녀를 위해 기꺼이 대륙 칠검의 명예와 기사로서의 전부를 희생했다. 그것이 그의 그림자였고, 그의 진실이었다.
데일의 눈동자에, 비로소 그림자 속의 진실이 비치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가 가진 진실의 눈.
다시금 고개를 돌려 산상노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바로 그때였다.
“아직 네가 감당하기에는 때가 이르구나.”
카앙!
깨닫기도 전에 산상노파의 검이 휘둘러졌고, 그림자 갑주의 아바타…… 암혈의 갑주가 파쇄되며 데일의 시야가 되돌아왔다. 동시에 데일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그림자들 역시 사라졌다.
“어이쿠, 시펄.”
비틀거리며 데일의 육체가 중심을 잃었고, 마스터 바로가 다급히 데일을 부축해 주었다. 일찍이 지금껏 아바타를 전개했을 때와 비교를 불허하는 터무니없는 마력의 소모, 나아가 그 이상의 피로가 데일의 뇌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어떠냐, 진실의 눈으로 이 세상의 그림자를 목격한 소감은.”
“이것이 그림자 군주의 힘입니까?”
황금의 치장과 거짓에 가려진 장막 너머의 것들을 파악하는 능력.
“……불사공 프레데릭도 제가 목격한 것과 같은 풍경을 보았습니까?”
“너의 생각은 어떠냐, 아이야.”
“…….”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실의 눈’을 갖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초대 그림자 군주라 말하는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작센의 피, 너와 함께 존재하는 옛 어둠의 어머니…… 그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다.”
“…….”
“지금의 제국에 황금의 가치를 이해하는 자는 있어도, 그림자의 가치를 이해하는 자들은 없지.”
산상노파가 말했다.
“진실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라, 인간의 아이야.”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로소 그대가 ‘그림자 군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렇게 말하며 산상노파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다크 엘프의 왕국을 가리키며.
“자, 부디 나의 왕국에 어서 오거라.”
“……!”
“사막과 모래의 군주로서, 기꺼이 그림자의 군주를 뵙나니.”
산상노파, 다크 엘프 왕국의 여왕이 미소 지었다.
동시에 산의 암살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을 보며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허미, 쉬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