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 *
“인간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를 해제하며.
“호오.”
데일의 대답을 듣고 산상노파가 즐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린 다크 엘프의 육체를 갖고, 산의 암살자 사이에서 홀로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존재감을 뿜어내며.
“그래, 그럼 그 인간께서 친히 엘프의 대지를 찾아오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저는 일찍이, 청색 마탑이 그대들과 맺고 있는 계약을 흑색의 이름으로 넘겨받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와 청색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계약이 있지. 그중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제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어디까지나, 세피아 님의 무사를 보증받기 위해서입니다.”
세피아. 그 이름을 입에 담기 무섭게 산의 암살자들 사이의 기류가 불길하게 요동쳤다. 그럼에도 산상노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호오, 청색의 꼭두각시 하나를 지키고자 ‘그림자 군주’께서 이곳까지 몸소 행차하셨다고?”
“처음에는 그랬지요.”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국의 도시에 있는 또 하나의 추방자를 목격하고, 나아가 그 아이에게 그대들이 베풀어주는 ‘자비’를 보고 나서…… 조금 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호기심이라. 말해보아라.”
산상노파가 즐겁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그대들의 동족에게 이토록 잔혹한 자비를 베푸는 겁니까?”
“허미, 쉬펄. 내가 설마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거 입 좀 조심하실 수 없겠소?”
데일이 말과 동시에, 산의 암살자들 사이에서 살기가 모래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스터 바로조차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끼어들었고,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산의 암살자들은 그림자의 여신을 섬기는 신명(神命)의 집행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의 행위가 정녕 ‘그림자의 여신’께서 바라시는 뜻일지, 저로서는 의아함이 앞서네요.”
“그럼 그대는 그림자 여신께서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냐?”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 군주니까요.”
데일이 대답했다.
황금과 그림자. 일찍이 흑색공이 말했듯 이 대륙의 누구도 고대부터 이어지는 광신(狂信)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데일이 설령 그것을 바라고 바라지 않고를 떠나 그림자 군주로 존재하는 이상…… 거저 주어진 자산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작센 공작 가의 후계자로서 그 직함을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저는 그저 산의 암살자들이, 나아가 엘프 전체가 어째서 이토록 잔혹한 피의 전통과 자비에 집착하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저 세피아의 무사를 보증하기 위해 산의 암살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제국 동부의 도시에서 겁에 질린 어린 엘프 추방자를 보았을 때, 데일과 마스터 바로를 행동하게 이끌어준 것은 순수한 ‘인간성’이었다.
아무 이득이나 이해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지나칠 수 없다는 마음가짐 하나에서 비롯되는 이타(利他)의 행동.
“도대체 그 아이가 무엇을 저질렀기에 엘프 사회로부터 추방당해야 하며, 그것도 모자라 자비를 베풀어준다는 그럴싸한 이름 아래 그녀를 추적하는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그림자 여신의 신명을 집행하는 조직의 수장에게 그 이유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하하, 하!”
데일의 말에 산상노파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오지랖이 넓다 못해 웃음마저 나올 지경이구나.”
“세피아 님께서는, 그리고 그 아이는 어째서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했고, 무엇으로 그대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까?”
“어르신 앞에서 그 입을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인간……!”
“되었다, 아이야. 그쯤 하라.”
이윽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 산의 암살자를 가로막고, 산상노파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암살자 하나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모처럼 찾아오신 손님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우리가 쇠퇴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지.”
산상노파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인간들아.”
그대로 산의 암살자 하나가 손가락을 튕겼고, 불과 직전까지 피가 피를 부르고 있는 사막의 포식자 중 하나가 바로와 데일의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허허, 시펄. 설마하니 이놈 타고 모래구덩이 밑으로 끌려 들어가지는 않겠지?”
마스터 바로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고, 등을 돌린 산상노파가 대답했다.
“그야 네놈의 업보 나름이 아니겠느냐, 이 빌어먹을 제자야.”
“참으로 보기 좋은 스승과 제자네요.”
둘의 대화를 뒤로하고,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 * *
사막마를 타고 쉼 없이 며칠 밤낮, 그 이상이 걸려도 도착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데일에게 등을 내어준 사막의 괴물이 ‘그들의 왕국’까지 도달하는 것은 고작 아침 해가 저물녘 너머로 가라앉을 무렵의 일이었다.
황금의 대제가 지배하는 제국이란 나라는, 대륙 전체를 일통(一統)했다며 그들의 위업을 자랑하길 마지않았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의 국가임을 천명하며.
제국이 자랑하는 정복의 기수이자 사냥개로서 일생을 바친 데일이기에, 그 말이 결코 까닭 없는 허풍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데일이 이 대륙의 진실을 깨달을수록 절감하게 되는 진실은, 제국이란 나라가 천명하는 대의의 덧없음이자 신기루 그 자체였다.
당장 작센 공작 가의 북부 마왕령 너머에는 《엘드리치》들이 다스리는 ‘마의 제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울러 이곳 열사의 사막 너머에 끝없이 펼쳐진 것은, 일찍이 베일에 싸여 있는 다크 엘프들의 왕국 그 자체였다.
거기에 더해 남극의 끝에 존재하는 수정의 대지, 스노우 엘프들의 땅.
그게 다가 아니리라.
나아가 제국이란 나라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군주들…… 애초에 이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마경(魔境)의 강자들이었고, 하물며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대양 너머로 떠나 증명한 ‘아나톨리아 동대륙’에 대해서는 말할 것조차 없으리라.
그렇기에 제국이 주장하고 있는 지상 유일의 국가란 것은 결국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수작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데일이 느끼는 것은 말 그대로의 경악 그 자체였다.
넓어도 너무 넓었다.
“도대체 무엇을 상상했느냐, 인간의 아이야.”
비로소 그들의 왕국을 내려다보며 산상노파가 웃었다.
“설마 대륙 구석에 초라한 천막을 세우고, 촌락을 이루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미개자들의 공동체를 상상이라도 했느냐?”
“…….”
솔직히 말해서, 마냥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설마하니,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 ‘국가’를 자청할 정도의 대지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까닭이다.
일찍이 제국의 가장 야망에 차 있는 탐험가들조차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사막의 끝자락, 그러나 그 끝자락은 믿을 수 없게도 그들 ‘다크 엘프 왕국’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지평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는 말 그대로의 왕국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저물녘의 태양조차 가릴 정도로 우뚝 솟아 있는 그들의 거성과 도시의 풍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 사막 대지의 끝자락에서, 바다를 끼고 우리는 스노우 엘프들의 동토(凍土)와 이어지고 있다.”
산상노파가 어린아이에게 ‘이 세계의 넓음’을 설명하듯 즐겁게 말했다.
“어찌하여 엘프의 대지에서 추방자들이 금기를 범하고 쫓겨나느냐고 물었느냐?”
“…….”
“너희 제국의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귀족이 하루아침에 멸족(滅族)되고, 그 일가족이 길거리에 나앉는 것에 대해 되물은 적이 있더냐?”
산상노파가 되물었다. 그 말에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과 영욕 끝에,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음의 벽지로 유배하는 것이 그토록 새삼스러운 일이었느냐?”
“…….”
“잔혹한 자비라고 말을 했느냐, 아이야.”
산상노파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희 제국의 자들은, 그러한 잔혹한 자비를 베풀 생각이라도 하였느냐?”
데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국이 헤아릴 수 없는 대륙의 왕국을 굴복시키고, 침략자들이 아내를 범하고 아들딸을 도륙하는 지옥 속에서, 너희들은 그러한 잔혹한 자비를 베풀 생각이라도 해보았느냐?”
어느덧 산상노파의 표정에는 웃음기마저 사라져 있었다.
“그토록 좁쌀처럼 작고 비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감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황금과 그림자의 이름을 참칭(僭稱)하는 그 어리석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재고를 해보았느냐?”
일찍이 데일을 조롱한 제국 도시의 다크 엘프가 그렇게 말했듯이.
그러나 산상노파가 그녀를 처형한 것은 결코 그녀의 주장이 잘못되어 있는 까닭이 아니었다. 그저 일개 병졸이 상사의 명령을 거슬렀기에, 그 하나의 이유였다.
“허허, 스승님. 부디 그쯤 해주시지요.”
비로소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산상노파를 향해, 비로소 마스터 바로가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촤아악!
마스터 바로가 딛고 있는 땅을 중심으로 칼날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럼에도 그 소용돌이가 마스터 바로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딛고 있는 땅이 이어져 있는 좌표계는 마스터 바로의 육체가 아니었으니까.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칼날의 바람에 휘감기며 일그러졌다. 시공 그 자체가 뒤틀리는 듯 터무니없는 파쇄의 힘이었다.
“어이쿠, 시펄. 스승님 성깔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네놈 깡다구는 졸지에 개미 쓸개보다도 작아졌구나.”
“허허, 사람이란 게 나이를 먹으니 죄다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요.”
마스터 바로가 웃으며 슬쩍 걸음을 물렸고, 산의 암살자들 사이에서 산상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자, 부디 다시 지껄여 보아라. 그림자의 왕을 칭하는 인간의 아이야.”
어린 다크 엘프가 데일을 향해 물었다.
“이 넓은 우리 동족의 대지와 왕국 속에서 벌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지랄 맞은 암투와 정쟁, 동족들 사이에서 피가 피를 부르는 끝없는 내전(內戰) 속에서…….”
참으로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감히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자청하는 자로서, 부디 이 왕국에 무궁의 무사와 영광을 가져올 방법을 말이다.”
그 말에 데일은 무엇 하나 대답할 수 없었다.
당장 지금도 제국에서 벌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암투, 그에 희생되는 죄없는 아이들을 알고 있는 데일이기에. 무엇이 다를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산상노파의 말처럼, 엘프 공동체를 미개하기 이를 데 없는 부족 사회라 넘겨짚은 것은 데일이었다.
“…….”
그렇기에 침묵 끝에, 데일이 무릎을 꿇었다.
“우물 속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 저의 어리석음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호오.”
“그렇기에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 감히 말하기를…….”
산상노파가 다시금 미소 지었고, 데일이 말을 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다고 해야겠지요.”
“무엇이 말이냐?”
“당신과 이 왕국의 이들에게, 제가 군주로서의 자격을 증명할 기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의 육신 속에서 끝없이 휘몰아치고 있는 흑색의 피를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