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 *
창백하게 빛나는 사막의 밤을 방황하고 있자니, 뜻밖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미, 쉬펄.”
마스터 바로가 경악에 숨을 삼켰다.
사막마의 시체가 보란 듯이 그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거, 그 엘프 아가씨가 호다닥 도망갈 때 타고 있는 말 아니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 끝에, 데일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를 무작정 사막에서 고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었나 보지.”
“아, 또 그놈의 시험이니 어찌하니 하는 개짓거리 말이오?”
“그게 그들의 방식이니까.”
엘프 사회는 극도로 경직되고 보수적이며, 강박적일 정도로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는 공동체다. 결국 그들에게 융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규칙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데일의 스승, 세피아가 추방자가 되어서 제국 사회를 전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니, 그보다 산상노파에게 검 좀 배웠다며? 이럴 때 그럴싸한 서바이벌 노하우 같은 거 없냐?”
데일이 물었고, 마스터 바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뭐 아예 없지는 않은데 말이오. 그것이 좀…….”
“좀?”
“무식할 정도로 과격한 방식이어서 말이지.”
“지금 우리가 찬밥 뜨거운 밥 가릴 처지냐?”
“허허, 거 나랑 좀 굴렀다고 천하의 공자님께서 입에 걸레짝 하나 처물고 계시는 꼴을 보아하니, 참 좆같이도 흐뭇하구려.”
“이런 시팔.”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웃었고, 데일이 다시금 입에 걸레짝을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
촤악!
마스터 바로가, 그대로 암기를 빼 들어 사막마를 향해 내리꽂았다. 데일과 바로 몫의 두 마리 사막마가 비명을 내지를 틈조차 없이 절명(絶命)했다.
동시에 두 마리 말에서 피가 울컥울컥 흩뿌려져 사막의 모래를 적셨다.
“……지금 뭐 하냐?”
“허허, 그렇다고 우리 배때기에 칼자국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마스터 바로가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비로소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마스터 바로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피가 피를 부르는 법이라고.”
사막마의 피가 흩뿌려졌고, 그로부터 머지않아서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피 냄새를 맡고 ‘사막의 포식자’ 하나가 모래 사이를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여기 있는 것들은 수백 리 밖에서도 피 냄새 하나는 귀신처럼 맡고 몰려드는 놈들이지.”
바로 그 포식자를 향해 마스터 바로가 암기를 고쳐 잡고, 그대로 내리그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촤아악!
“키에에에엑-!”
그러나 허공에 암기를 내리그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두 사람을 향해 쇄도하는 모래 괴물이 비명을 내지르며 육체를 드러냈다. 모래 위로 괴물의 피가 흩뿌려졌고, 마스터 바로가 재차 허공에 일검을 내리그었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로서 위상(位相)을 조종하는 왜곡의 힘.
좌표계의 위상을 뒤틀어, 자신이 내리긋는 지점과 모래 괴물이 잠복하고 있는 지점을 잇는 것이다.
그야말로 살검이란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허허, 내가 너무 잘나서 할 말을 잃어버리셨나?”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웃음을 터뜨렸고, 데일이 그대로 팔을 뻗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의수였다.
타앙!
그림자 의수가 일렁이며, 손가락 끝에서 어둠의 총알이 내리꽂혔다. 아무것도 없는 모래 위를 향해서. 동시에 그 지점에서 피가 흩뿌려졌고, 괴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래 잠복자였다.
“피가 피를 부르는 법이라고 했나.”
두 마리 말이 사막의 포식자들을 불렀고, 다시금 그 포식자들이 피를 흩뿌리고 있다. 나아가 그 포식자들마저 이 사막에서는 결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가 아니리라.
쿠구궁!
지진이라도 벌어진 듯 일대의 사막 지대가 뒤틀렸고, 방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크기를 가진 거체의 괴물이 미끄러지듯 질주하고 있었다.
사막의 거대 지렁이였다.
포식자의 피가, 바로 그 존재들을 사냥감으로 삼는 상위 계층의 포식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모래 잠복자 따위의 괴물 같은 것은 우습게 보일 정도의 육중함을 자랑하는 사막의 포식자.
일대를 뒤틀며 질주하는 거대 지렁이를 향해 데일이 몸을 돌렸다.
“「개틀링식」.”
어느덧 애장(愛裝)의 영역을 넘어 데일의 육체 그 자체로 동화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흑색의 총열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섀도우 불릿이 거대 지렁이의 피를 다시금 사막의 모래 위로 흩뿌렸다. 지금까지 흩뿌린 피와 감히 비교를 불허하는 피바다가 사막의 모래 위로 덧씌워졌다.
“이것보다 위의 포식자가 있나?”
“아, 이것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오. 저것 정도는 말 그대로 ‘지렁이’에 불과하니까.”
마스터 바로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졸지에 사막의 생태 구경이라도 하게 생겼네.”
어느덧 지평 너머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포식자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 * *
사막의 지평 너머로 새벽녘 어스름이 흐릿하게 스며들었다. 어둠과 꼭두서니 빛이 맞물린 보랏빛이었고, 머지않아 열사(熱砂)의 이름에 걸맞은 뜨거움이 대지에 깃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네.”
마스터 바로가 그렇게 말하며 칼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냈다.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그림자 군주,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레이디 섀도우 역시 발키리의 아바타를 갖추며 칼날을 고쳐 잡았다.
달이 내려앉고, 해가 뜰 때까지 피가 피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덧 그곳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시체의 산과 피바다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람의 형상을 가진 시체는 없었다.
끝없이 널브러져 있는 포식자들의 사체.
졸지에 생태 교란종이 되어 있는 데일 일행이었고, 동시에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스터 바로의 말마따나 보통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이 아니었다. 설령 그에 맞는 실력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괴물 무리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당장 데일이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적색 마력으로 심장에 ‘이그나이터’를 덧씌우지 않았을 경우, 진작 마력이 바닥나 괴물의 식사로 전락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이계의 심상을 바탕으로 심장에 열기관을 투영하고 끝없이 마력을 공급하는 데일의 비의.
“허허, 아주 그냥 기운이 넘치시네.”
그에 비해 마스터 바로는 아바타를 전개하는 일조차 없이,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평정을 지킬 따름이다.
‘역시 대륙 칠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확실히 그의 천박하기 그지없는 행동과 별개로 마스터 바로는 강자였다. 지금의 데일조차 승산을 감히 장담할 수 없는 강적.
나아가 그조차 이 대륙에 존재하는 군주들과 맞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리라.
세상은 넓고 강자들은 많다.
그 점에 있어 이곳은 마침 끝없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수행 장소였다.
지평 너머를 가득 메우고 있는 포식자들의 군세(軍勢).
그들에 맞서 데일이 생성한 흑색 총열이 어둠의 포화를 쏟아붓고 있었다.
사막의 괴물들에 맞서 개틀링식 포화를 쏟아붓는 데일의 모습은, 흡사 「스타쉽 트루퍼스」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래, 피가 피를 불러서 일대를 끝도 없이 뒤집어 놓는 것까지는 좋은데.”
끝없는 마력으로 이계의 포화를 쏟아부으며, 데일이 물었다.
“이게 산의 암살자들을 부르는 거랑 어떻게 이어지는지 물어도 될까?”
“거, 어디 알지도 못하는 개뼈다귀가 댁 공작령에 굴러들어와서 이 지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쇼.”
마스터 바로가 재차 허공에 핏빛의 오러를 내리그으며 말했다.
“졸라 신경이 쓰여서라도 제 발로 찾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지 않겠소?”
“……그게 다냐?”
“그게 다라오.”
마스터 바로가 태평하게 대답했고, 데일이 재차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할 때였다.
지평을 가득 메우고 있는 포식자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했다. 울부짖음 역시도. 마치 세상에 소리가 사라진 듯한 침묵과 동시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느니, 지랄부터 부려놓고 그쪽에서 찾아오게 하는 게 백 배 낫다는 거지.”
모래폭풍을 방불케 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강풍 속에서, 마스터 바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중얼거리기 무섭게 모래바람이 잦아들었다.
그곳에서 비로소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후드를 꽁꽁 둘러쓰고 있는 실루엣들이었다.
“아,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동시에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막의 포식자들이, 실루엣들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참고로 여기 사막의 포식자들은, 산의 암살자들이 기르고 있는 사냥개 같은 것이라오.”
그 의미를 헤아린 데일이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그 지랄 맞은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여전하도다.”
실루엣들 속에서, 유독 이질감을 가진 존재가 입을 열었다. 애티를 미처 벗지 못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헉, 시펄.”
동시에 마스터 바로가 처음으로 숨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어린아이의 실루엣이 모래바람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후드를 벗고, 그 속에서 구릿빛 피부의 어린 다크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망ㄱ…… 아니, 스승님이 아니십니까.”
천하의 마스터 바로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무거우신 엉덩이를 떼고 산에서 내려오실 줄은 몰랐는데.”
“네놈이 여기서 펼치고 있는 지랄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오더냐, 이 빌어먹을 제자 새끼야.”
산상노파(山上老婆)가 말했다.
미처 애티를 벗지 못한 어린 소녀의 육체를 가진 다크 엘프였다.
“허허, 그러게 좀 빙빙 돌지 말고 얌전히 나타나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마스터 바로가 말했고, 산상노파가 대답했다.
“네놈이 그리 지껄이지 않아도 알아서 그럴 생각이었느니라. 그렇지 않으냐, 나의 아이야.”
“어, 어르신……!”
그의 곁에 있는 다크 엘프 하나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 우리를 버리고 호다닥 도망가신 그 아가씨 아니신가.”
마스터 바로가 말했고, 산상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나 이 자들은 멋대로 그림자의 이름을 참칭(僭稱)하는 제국의……!”
그리고 그 다크 엘프가 말을 끝마치는 일은 없었다.
촤악!
움직임을 좇을 수조차 없었다. 그저 살기가 질주하는 것을 겨우 깨달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나의 아이야. 나는 너에게 임무를 수행하라고 했지, 생각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느니라.”
후드 차림의 다크 엘프가, 그대로 쪼개졌다. 마치 채소를 슬라이스 기계에 넣은 것처럼 토막에 토막이 이어져 후드째 육골(肉骨)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 그대가 그토록 속세의 자들이 떠들어대고 있는 ‘그림자 군주’더냐.”
산상노파가 데일을 향해 물었고, 암혈의 갑주를 전개하고 있는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산상노파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그대, 정말로 인간이기는 하더냐?”
“인간입니다.”
산상노파가 물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