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72화 (172/301)

172화

* * *

‘검은 공자’에게 패배하고 절대복종의 기아스를 새겨넣은 뒤, 데일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이는 니콜라이 추기경의 존재는 교황령 내에서 적지 않은 의심을 사고 있었다.

교황청 내 아홉 심의회 중, 교회 내의 부정과 이적 행위를 감시하는 첩보 조직.

감찰성성(S. Congregatio Inquisitionis).

그 조직의 수장으로서 디미르 추기경이 동료 니콜라이 추기경을 향하고 있는 의혹이란 무척이나 집요했다.

그리고 디미르 추기경의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추적 끝에, 동료의 배신을 증명할 ‘유일의 증거’를 손에 넣었을 때…….

청색의 나비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디미르 추기경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예의 증거를 등 뒤의 화로(火爐) 속으로 집어넣었다.

청색 마탑의 첩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결코 ‘청색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국의 황실과 헤아릴 수 없는 귀족들, 교회, 심지어 백색과 적색 마탑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아울러 교회 제일의 첩보 조직이라 할 수 있는 감찰성성의 수장이자 백색 마탑의 장로로서, 디미르 추기경은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비밀스러운 진실을 하나씩 손에 넣을 때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자 역시 존재했다.

청색의 흑막이었다.

* * *

“네놈 따위가 우리 동족의 규율에 대해 무엇을 알고 지껄이는 것이냐.”

다크 엘프가 싸늘하게 내뱉었고, 그러나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대들이 말하는 자비 속에, 당사자의 입장이나 처지를 헤아리는 ‘자비’가 정말로 존재하기는 합니까?”

“제국의 사람이 감히……!”

“거듭 말씀드렸듯이, 저는 결코 제국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휘감고 있는 ‘검은 공자’가 말했다.

“산의 암살자들이, 제국 각지로 추방되어 전전하는 엘프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제국의 정세에 무지할 수는 없을 테지요.”

“그래, 그럼 그 아이들이 황금의 제국에서 더럽혀지게 될 치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지.”

다크 엘프가 차갑게 말을 잇는다.

“힘 있는 귀족의 노리개가 되거나, 남자들의 욕망을 쏟아내는 창부로 거듭나…… 영생에 가까운 엘프의 수명마저, 그녀들에는 끝없는 지옥의 기약과 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추방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유일의 자비라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국에 추방자 엘프들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정보망이 필요하며, 나아가 고위 귀족의 저택 가장 깊숙한 곳까지 잠입할 수 있는 실력과 그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하다.

결코 제국에 대해 무지하고서 수행할 수 없는 사명이리라.

‘아니,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쫓지나 마시래도.’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는 말을 애써 억누르며, 데일이 입을 열었다. 신념을 가진 상대에게 신념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신념을 어기지 않는 내에서 타협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니까.

“그럼 황금의 제국이 아니라, 그림자의 제국은 어떻습니까?”

제국의 북부, 일찍이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다스리고 있는 동토의 대지. 작센 공작령.

“그림자 군주의 이름에 맹세코, 저와 작센이 이 어린 엘프를 거두어들이겠다고 말할 경우…… 그대들이 걱정하고 있는 황금의 오욕에 더럽혀질 염려는 없을 테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칼끝을 겨누시겠습니까?”

“작센의 애송이가 감히 겁도 없이 ‘그림자의 왕’을 참칭(僭稱)하려는 것이냐.”

“말씀드렸듯이, 저는 지금부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대의 수장을 뵙고자 청하고 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다음이 되어도 늦지 않을 테지요.”

마스터 바로가 겁에 질린 엘프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아바타를 전개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와 레이디 섀도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아무리 신념을 중시하는 다크 엘프라 하더라도 타협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산의 암살자여, 산상노파 역시 그림자 군주에게 흥미를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요.”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이자 그녀의 동족이라 할 수 있는 스노우 엘프,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그 사이, 제가 동족의 명예를 걸고 이 아이를 데리고 있도록 하지요.”

“…….”

“이 상황에서 고집을 부려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대가 어리석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에르제가 말했고, 비로소 다크 엘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자루를 후드 속에 집어넣었다.

“따라와라. 날이 밝기 전에 우리의 땅으로 데려다줄 것이니.”

집어넣고 나서 다크 엘프가 말했다.

“설령 뒤처지거나 사막에 낙오되어도, 그것은 너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허허, 어째 모래지옥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드는 것 같네.”

그 말을 듣고 마스터 바로가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산의 암살자가 준비해 놓은 사막마(沙漠馬)에 짐을 싣고서, 새벽녘 어둠을 틈타 도시를 벗어났다.

소서리스 에르제는 홀로 도시에 남아 어린 엘프를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했다.

눅눅하고 말라붙어 있는 바람이 불어왔고, 듬성듬성 보이는 잡초마저 빠르게 사라졌다. 도시에 이를 즈음부터 지평 너머로 얼핏 보이기 시작한 사막 지대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사의 대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냉기를 머금고 피부를 도려내는 것 같은 밤의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는 바람이었다.

사막의 밤은 낮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춥다. 영하로 내려가 있는 추위. 깊이 내려앉은 어둠.

저 멀리,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구의 지평 너머로 어둠이 푸르스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데일이 흘끗 고개를 들자, 사막의 밤하늘 사이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별들이 흩뿌려져 빛나고 있었다.

사막마는 좀처럼 멈추는 일 없이, 정확히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다는 듯 발자국을 새기며 달리고 있었다. 제국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막 지대에서 자라며 철저하게 교육을 마친 말들이었다.

‘세 마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에도 다크 엘프들이 있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제국 곳곳에 있는 추방자 엘프들을 추적해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필요에 따라서 지금도 제국 깊숙이 잠입해 있는 이들도 드물지 않겠지. 어느 의미에서는 그림자 법정과 여러 가지로 닮아 있는 조직이었다.

‘마스터 바로가 뜻밖의 교점(交點)이 되어주었다.’

순수하게 세피아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행동과 별개로, 데일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냉정하기 그지없는 이득의 저울추가 움직이고 있었다.

발자국이 새겨지기 무섭게 바람이 불어왔고,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이 그들의 자취를 뒤덮었다.

* * *

어둠이 가라앉고, 동녘 하늘 너머에서 새벽 어스름이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시린 냉기와 어둠이 사라지고 열사(熱砂)의 이름에 걸맞은 사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이구, 이런 시펄. 얼마 전까지는 좆 같이 춥더니 이제는 또 좆 같이 덥네.”

“부탁이니까 제발 뭣 같은 소리 좀 하지 마라.”

“아니, 좆 같은 걸 좆 같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야 하오?”

“이런 시팔.”

데일이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바로 그때, 그들의 앞에서 달리고 있는 다크 엘프의 사막마가 멈추었다.

“아, 죄송하오. 내 딱히 그쪽이 뭣 같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이쿠.”

바로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말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쿠구궁!

딛고 있는 발밑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다크 엘프가 입을 열었다.

“모래 잠복자(Sand Lurker)다.”

“어이쿠.”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키에에에엑!」

데일이 걸치고 있는 흑색의 로브가 일렁이며, 일대의 모래 지대를 어둠으로 뒤덮었다.

“사막의 포식자를 마주하는 것치고는 제법 태평하시네요.”

그림자 망토로 일대를 어둠 속으로 수몰시키며, 데일이 말했다. 다크 엘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림자와 모래가 뒤엉키고 있는 일대에서, 두 마리의 잠복자들이 마주쳤다.

그림자 군주의 명령에 따라 충성하는 《섀도우 러커》들이,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시뼈를 내뿜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림자의 호수 위로 생물의 살과 피와 뼈가 떠올랐다.

“말하지 않았나.”

그 모습을 보며 다크 엘프가 말했다.

“설령 뒤처지거나 사막에 낙오되어도, 그것은 너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동시에 사막마에 박차를 가하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다크 엘프를 쫓아, 데일과 바로 역시 사막마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두 마리 사막마는 처음과 달리 앞서 달리고 있는 그녀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 곳곳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모래 잠복자들의 존재에 동요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허미, 쉬펄.”

빠르게 멀어지는 다크 엘프를 보며,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좆 됐네.”

졸지에 그 자리에 남겨진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게 내가 좆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열사의 사막에서, 얼마 없는 물과 식량을 가진 채 남겨진 두 사람이었다.

* * *

“내가 말하지 않았소,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고. 죽빵을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지.”

사막의 해가 지고, 밤의 어둠이 드리워졌다. 이글거리는 열사의 대지가 거짓이었다는 듯 냉기와 어둠이 고개를 쳐들었고, 창백하게 빛나는 사구가 지평 너머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며칠도 없는 물과 식량이라.”

졸지에 남겨져 있는 짐을 챙기며 마스터 바로가 중얼거렸다.

“얼마까지 버틸 수 있겠소?”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데?”

“허허, 대륙 칠검이 버틸 수 있을 정도는 버티겠지.”

마스터 바로가 대답했고, 데일이 그걸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상노파는 사막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했으니, 그걸 토대로 주위를 뒤지는 수밖에 없겠네.”

“바늘보다는 그나마 나아서 다행이오.”

* * *

어둠 속에서, 몇 마리의 청색 나비들이 날갯짓하고 있었다.

날갯짓 끝에, 그대로 거미줄에 걸려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말의 저항조차 없이.

사방이 거미줄로 가득 차 있는 음습한 일실이었다.

그 일실에서, 청색의 흑막이 비로소 ‘그녀의 몸’을 움직였다. 거미의 다리가 꿈틀거리며 거미집 사이를 능숙히 가로질렀고, 그곳에 걸려 있는 나비를 풀어주었다.

청색의 나비가 그녀의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고, 그 모습을 보며 전라의 여성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 또다시 새로운 속삭임을 가지고 왔구나.”

제국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 그것은 결코 비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 어서 가서 그림자 군주의 앞길을 비추어 주려무나.”

그녀가 풀어준 청색 나비가 날갯짓하며 사라졌고, 그 모습을 보며 청색의 흑막 ‘아라크네(Arachne)’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