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 *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이자 산의 암살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존재.
그녀의 정체가 스노우 엘프란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그림자 군주를 뵙게 될 줄이야.”
도시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며 에르제가 말했고, 마스터 바로가 표정을 찌푸렸다.
“어이구, 또 그놈의 그림자 타령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지.”
“그림자 법정의 살검(殺劍)께서 하실 말씀이신가요?”
소서리스 에르제가 되물었고, 그 말에 일순 마스터 바로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그리고 그녀들이 가진 정보망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쯤 해라, 바로.”
데일이 이내 바로를 제지했고, 에르제를 향해 물었다.
“이대로 열사의 사막까지 향하는 겁니까?”
“이 꼴로 사막에 들어갔다가는 며칠도 못 지나서 모래 귀신 신세가 될 거요.”
마스터 바로가 끼어들었고,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림자 군주께서는 ‘산상노파(山上老婆)’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실 테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세피아 님의 일 외에도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에르제의 말에 데일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나 마침 산상노파께서도 그림자 군주의 존재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갖고 계시는 듯합니다.”
“…….”
“어디까지나 그녀가 계시는 사막산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산의 암살자라 불리는 조직의 수장을 칭하는 이명.
그 이름이 나오자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고, 마스터 바로가 끼어들었다.
“그 할망구는 아직도 살아 있나?”
“엘프니까요.”
에르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허허, 이것 참.”
마스터 바로가 다시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그러지?”
“아니, 다시 스승님 얼굴을 뵐 낯짝이 없어서 말이오.”
“네가 말하는 옛 스승이 다크 엘프 조직의 수장이라고?”
“거, 어디까지나 내 대가리에 피도 마르기 전의 옛날 일이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살검. 이미 세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그대의 명성에 대해 산상노파께서는 그녀 나름대로 흐뭇함을 느끼고 계시니까요.”
에르제의 말에 다시금 바로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새와 쥐들이 물어오는 온갖 속삭임들로부터랍니다.”
에르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림자 여신의 계시를 받은 성녀님에게 마지막까지 충애(忠愛)를 바치고 있는, 어느 고결하신 기사님의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지요.”
스릉.
그리고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스터 바로의 칼날이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아, 참으로 고결하신 기사님께 어울리지 않는 무례와 천박함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허허, 모름지기 무례하고 천박한 쌍놈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오.”
에르제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데일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쯤 하십시오, 청색 마탑의 에르제 님. 이 이상 입을 놀려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부디 군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지요.”
에르제가 재차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마스터 바로가 칼날을 거두었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공기 속에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바람 잘 날이 없냐.’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데일이 어이가 없어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허, 살기(殺氣)가 느껴지는데.”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직후, 데일 역시 모종의 기척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스산함이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러나 에르제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을 따름이다.
도시의 슬럼으로 이어지는 뒷골목 너머를 바라보며.
“도시 뒷골목에서는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마스터 바로가 태평하게 말했고, 에르제가 대답했다.
“이곳은 열사의 사막과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곳에서 그들과 조우하는 것도 그리 드물다고 할 정도의 일은 아니지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나?”
“마침 타이밍이 참으로 공교롭게 맞아떨어졌을 따름이지요.”
에르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흐렸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데일이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달빛이 스러지고 있는 뒷골목을 향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 데일이 찾는 그녀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과 더불어…… 그녀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을 산의 암살자를 떠올리며.
* * *
창백하게 빛나는 밤하늘 속에서, 후드 차림의 여성이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조각이 흩뿌려지며 후드 속 구릿빛 피부를 드러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구릿빛 피부의 엘프였다. 세피아가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으나, 아직 육체의 성장이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나이가 있는 엘프 같지는 않다.
몸 곳곳에 상처가 무척이나 심했다.
데일의 기척에 후드 차림의 암살자가 고개를 돌렸다. 구릿빛 피부의 여성. 몸을 꽁꽁 싸매고 있으나, 그 손에 들린 암기로 미루어 그녀의 정체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산의 암살자(Hashishin). 속세의 추방자 엘프를 숙청하는 다크 엘프 집행자다.
“사, 살려주세요!”
어린 엘프. 그녀 역시 산의 암살자와 같은 다크 엘프였다. 그러나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물러나라, 제국의 인간이여.”
산의 암살자가 데일을 향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이 이상 우리의 일에 엮였다가는 너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니.”
“그녀가 죽어야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러나 데일은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것을 헤아리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고, 더더욱 제국의 사람이 신경 쓸 일 역시 아니다.”
산의 암살자가 대답했고,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렇지 않다는 거지?”
“저는 ‘제국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데일이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림자 군주로서, 그림자의 여신을 섬기는 그대들의 수장과 이야기를 나누러 왔습니다.”
일순, 다크 엘프의 표정에 다시금 살기가 어렸다.
“네놈 따위가 감히 그림자를 입에 담는 것이냐.”
“필요하실 경우,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동시에 그의 육체 속에 흐르고 있는 흑색의 피가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암혈의 갑주가 데일을 휘감았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다섯 개의 서클이 데일의 심장을 휘감고 어둠의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보기 무섭게 다크 엘프가 데일을 향해 땅을 박찼다. 그녀의 앞에 있는 피투성이 엘프 소녀가 아니라.
빨랐다. 그러나 5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고 있는 데일의 육체마저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크 엘프의 암기를 따라 핏빛의 오러가 휘감겼고, 그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색이었다.
마스터 바로가 보여주는 핏빛의 검과 같았으니까.
“오렐리아 님.”
그렇기에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데일이 그림자 속에 있는 그녀의 기사를 불렀다.
“……!”
그림자 속에서 칠흑의 발키리가 모습을 드러내며, 다크 엘프의 그것과 같은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를 휘감았다.
살검에 의해 철저한 암살자의 검으로 거듭나 있는 레이디 섀도우.
마스터 바로가 그의 말처럼 산의 암살자에게 검의 수행을 받았다고 가정할 경우, 살검의 제자 레이디 섀도우 역시 ‘산의 암살자들이 구사하는 검식(劍式)’을 계승하고 있는 셈이리라.
카앙!
일검을 맞대고 나서 상대 역시 직감할 수 있었다.
“어떻게 우리의 검을……!”
오렐리아의 혈검(血劍)이 다크 엘프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말했다.
“그녀의 오러, 그리고 검이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이 맞습니다, 산의 암살자여.”
바로 그때, 소서리스 에르제가 뒷골목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에르제, 수정 여왕의 일족이 황금에 굴복했느냐……!”
“어머, 그럴 리가요.”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로서, 청색의 마력을 뿜어내며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림자의 기수로서, 우리가 마땅히 섬겨야 할 군주에게 충성할 따름이랍니다. 그 고대의 맹약에 대해서는 산의 암살자들 역시 예외일 수 없지요.”
“불사공 같은 북부의 괴물 놈에게 정녕 그림자 군주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없습니다.”
바로 그때, 데일이 대답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는 일답이었다.
그 말에 다크 엘프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적어도 그러한 괴물에게 그대들 모두가 충성을 바쳐야 할 까닭은 없지요.”
“…….”
“그러나 고대의 규칙에 따라 저는 정당하게 ‘그림자 군주’의 자격을 손에 넣었고, 나아가 그 자격을 결코 누구에게도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호오, 그렇담 무엇으로 우리를 설득하려는 것이냐?”
다크 엘프가 차갑게 되물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산상노파께서 직접 저의 자격을 헤아리고 결정을 내리시겠지요.”
“……!”
“동족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요.”
에르제가 데일의 곁에서 그를 거들었고, 오렐리아가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대가 정녕 그렇게까지 보증하고 있으니, 달리 도리가 없겠지.”
다크 엘프가 그녀의 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대로 그녀의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 엘프를 향하며.
“그러나 내 의무를 방해하지 말아라.”
칼자루를 빙글 돌리며, 그녀의 칼끝이 어린 엘프에게 향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칼끝이 내리꽂히려 할 때였다.
카앙!
다시금 그녀의 검을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
마찬가지로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며, 그러나 레이디 섀도우 이상의 압도적 기백을 품고 있는 자였다.
살검의 이름을 가진 검사이자 대륙 제일의 암살자.
“우리의 의무를 방해하려 하지 말고 그 검을 치워라. 그러지 않을 경우, 너희가 어르신을 뵙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가씨가 죽는 것처럼 잠자리 뒤숭숭한 게 없어서 좀.”
마스터 바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쯤에서 빠질 수 없나? 할망구가 날 죽이려 들 것 같아서 말이지.”
“…….”
짤막하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아, 이런 쉬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침묵 끝에 데일이 싸늘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산의 암살자여.”
가로막으며 데일이 말을 잇는다.
“어째서 이 아이를 죽이려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녀에게 베풀어주는 마지막 자비다.”
“참으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비네요.”
“추악한 황금의 제국에 떨어진 힘 없는 엘프들의 말로를 알고 있나?”
다크 엘프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이것은 그녀들이 오욕(汚辱)에 더럽혀지기 전에 우리가 베풀어줄 수 있는 유일의 자비다.”
다크 엘프가 말했고, 데일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냥 처음부터 내쫓지나 마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