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 *
“아니, 달랑 두 명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공작 가 장남이 정말 이래도 되는 거요?”
“대륙 칠검이 함께하고 있는데, 걱정할 게 있나. 그리고…….”
“그리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마스터 바로의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곳에 있는 것은 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두 남자가 말을 타고 제국의 땅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달리 그들을 지켜줄 호위나 그 외의 수족들조차 없이.
작센 공작령이 있는 제국 북부를 지나, 열사(熱砂)의 사막이 펼쳐져 있는 제국의 극동 지대를 향해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두었고, 적어도 내 부재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작센 공작령으로 돌아오게 될 거다.”
“뭐, 다들 계획 세울 때는 늘 그럴싸하게 세우는 법 아니겠소.”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내 칼에 삼도천 프리패스 티켓을 끊은 놈들도 말이여, 모가지가 잘리기 전까지는 자기들 나름대로 그럴싸한 계획들을 세우고 있었다오.”
“…….”
달리고 있는 말 위에서,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산의 암살자들과 마땅히 접촉할 방법은 있는 것이오?”
“도중에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자와 합류하기로 했다.”
“인간이오?”
“글쎄.”
“흐음, 거 등골이 졸라 싸하네.”
“그들에 대해 달리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우리네 광신도 새끼들이랑 비슷하지.”
아마도 그림자 법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기네가 신명(神命)을 수행하는 자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엘프 사회의 암살 조직이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기야 하는데, 대체로 말이 통하지 않는 정신병자들이지.”
“생각보다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모양이네.”
“아, 말하지 않았소?”
데일의 물음에 마스터 바로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내 옛 스승이 그쪽 동네 출신이라오.”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넘기는 그 말에, 데일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방금 뭐라고 했냐?”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고, 마스터 바로가 그것도 몰랐냐는 듯 대답했다.
“어, 그래서 날 데리고 가신 거 아니었소?”
“아니었는데.”
“흠, 이런 염병.”
“왜 그러지?”
“아니, 스승께서 내 얼굴을 썩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서.”
“혹시 그쪽 다크 엘프들에게 척이라도 졌나?”
“뭐,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데 말이지…….”
마스터 바로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갑자기 공작령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네.”
“……이런 시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 * *
엘프 사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알려진 것들이 적다. 남극이라 일컬어지는 수정의 대지, 그리고 극동(極東)이라 일컬어지는 열사의 대지, 마지막으로 녹색 마탑이 있는 대수림을 거처로 삼고 있으며…… 셋 다 사람이 살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땅이기에, 제국조차 그들의 땅을 향해 달리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다.
극도로 배타적이고 폐쇄적 사회를 구축하고 있으며, 엄격하기 그지없는 규율을 중시하는 공동체.
데일이 알고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그 점에 있어 세피아는 여느 엘프들과 달리 개방적이고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그것이, 그들 엘프 사회에 있어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금기였으리라.
“…….”
여기까지 와서 세피아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피아로서는 아마 데일이 그녀의 빚을 탕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테니까. 그저 데일이 그 나름대로 그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날, 세피아의 암시를 해제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소서리스 의회와 접촉하기로 약속한 제국 동부의 어느 자유도시.
일주일하고 며칠의 노숙 끝에 데일과 바로가 도착했을 즈음에는, 저물녘 어스름이 짙게 깔린 뒤였다.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보자.”
“흠, 내가 딱히 밤낮으로 공자님 곁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
“이런 데서까지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
“허허, 역시 작센 가의 장남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여.”
목로주점에 있는 2층에 두 개의 방을 예약하고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마스터 바로는 그대로 주점 1층 목로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앉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주점의 2층 일실.
침대라고 부를 것조차 없이, 볏짚을 적당히 깔아놓은 방이었다.
“오렐리아 님.”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작센 가의 ‘검은 공자’를 보좌하는 그림자, 레이디 섀도우.
“부르셨습니까.”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지요.”
“식사라…….”
그렇게 말하며 오렐리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그림자 속에 있을 때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잊을 수 있게 됩니다.”
슈브와 특별한 계약을 맺고, 그녀의 그림자 속에 머물 수 있는 자격.
옛 어둠의 어머니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 존재함으로써, 그녀는 응당 사람의 육체가 갖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당장 암혈의 육체로 거듭나 있는 지금의 데일처럼.
“지금 당신의 육체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오렐리아의 말에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여신의 계시를 받고 옛 브라티나아 왕국을 위해 싸운 과거조차, 이제는 아득한 옛 시절의 꿈처럼 느껴지지요.”
“…….”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아무것도 괴로워할 필요 없이…… 조금씩 사람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답니다.”
오렐리아, 레이디 섀도우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저 필요에 따라 그림자 속의 검이 되어, 당신을 위해 휘둘러지는 것이 제 존재의 전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오렐리아 님이 바라는 것입니까?”
사람에서 멀어지는 것. 데일이 다시금 물었고, 오렐리아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제국의 멸망을 바라고 계시니까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녀의 의지였다.
“그림자 속에서 당신의 많은 것들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국의 멸망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바치고 있는지 역시 알 수 있지요.”
데일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제 역할은 그저 그것을 감시하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검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림자 속의 감시자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그림자 속에서 춤추는 꼭두각시가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다행이네요.”
데일이 말했고, 오렐리아가 말없이 웃었다.
* * *
그 시각.
“야, 이 새끼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 새끼야? 감히 형님 얼굴도 못 알아보고…….”
데일과 오렐리아가 있는 일실을 뒤로하고, 주점 1층에서 뜻밖의 소요가 펼쳐지고 있었다.
도시의 거리마다, 나아가 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주점에는 늘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패거리가 있는 법이다.
작게는 도시 내에 행패를 부리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무법자로, 크게는 도시 내에 그들의 조직을 세워 이득을 취하는 폭력배들까지.
그러나 마스터 바로는 그들 앞에서 순순히 고개를 숙여줄 사람이 아니었다.
“어허, 이런 시펄 새끼들이.”
허리춤에 서슬 퍼런 도끼 따위를 차고 있는 무리 앞에서, 마스터 바로가 태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거, 뭐 그리 잘났다고 사람 술 마시는데 시비나 처 걸고 지랄이여?
주점 곳곳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바뀌었고, 패거리 하나가 보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 이거, 보아하니 아직 이 도시에서 사는 법을 모르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며,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허리춤의 손도끼에 팔을 올리려 할 때였다.
“어?”
그러나 도낏자루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팔 자체에 감각이 없었다.
촤아악!
그저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느그들 힘자랑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좆빠지게 행차하신 줄 아냐? 어?”
마스터 바로는 여전히 두 다리를 탁자 위에 걸치고, 맥주를 홀짝이며 태평하게 말을 잇는다.
촤악!
그러나 다시금 패거리 하나의 육체에 혈선(血腺)이 그어졌다.
“아아악!”
그때마다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잘리며,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가 이 도시에서 사는 법은 몰라도, 이 나라에서 살아남는 법은 아주 졸라게 잘 알고 있지.”
울려 퍼지는 비명을 뒤로하고, 맥주를 홀짝이며 마스터 바로가 말했다.
뒤늦게 동료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도망치려는 패거리의 등 뒤를 바라보며.
“어허, 그렇게 시비를 털어놓고 어딜 도망가려고?”
다급히 도망치려는 그들의 발밑, 정확히는 발등을 향해 무엇이 내리꽂혔다.
암기였다.
마치 이 이상 도망치게 놔둘 수 없다는 듯, 암기가 그들의 발등을 내리찍어 고정하고 있었다.
울려 퍼지는 비명을 뒤로하고, 마스터 바로가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이런.”
그가 섬기고 있는 공작 가의 장남이 그곳에 있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냐?”
“거 졸라 송구하게 됐수다.”
마스터 바로가 멋쩍은 듯 고개를 긁적거렸다.
“내가 병신들을 보고 도무지 그냥 못 지나치는 타입이라서.”
“…….”
데일이 고개를 돌렸고, 피바다가 되어 목숨을 애걸하고 있는 패거리가 있었다.
“여기서 그쪽 사람이랑 접촉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사람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바로 그때였다.
“있네.”
데일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로브 차림의 수상쩍은 존재가 주점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저를 불러주실 줄이야.”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였고,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참으로 품위도 없고 무례하며, 요란스러운 방식이네요.”
여성이 비로소 후드를 벗었다. 수정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고, 뾰족하게 솟은 두 귀가 드러났다.
“제가 상상하는 ‘검은 공자’께서는, 조금 더 우아하고 기품 있는 방식으로 저를 부르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스노우 엘프였다. 그러나 세피아가 아니었다.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에르제라고 합니다.”
“허허, 누가 댁을 불렀다고 그러쇼? 이거 착각도 아주 중증 공주병일세.”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순 에르제가 당황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끔벅거리고 나서는 이내 청색의 냉기가 일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니,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에르제 님.”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데일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이 사람이 약속대로 우리를 ‘산의 암살자’에게 데려다줄 것이다.”
“허미, 쉬펄.”
마스터 바로가 당황하며 맥주를 마저 홀짝였다.
“몰라봐서 송구하게 됐수다, 엘프 아가씨.”
“……밤이 깊어 내일 아침에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네요.”
데일 역시 멋쩍은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것은 없으니, 바로 움직이도록 할까요.”
그 말에 비로소 에르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주점 전체를 덮어씌우고 있는 피바다를 뒤로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작부터 꼬일 대로 꼬여버린 첫 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