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 *
북부 마왕령의 개척과 흑색 마탑의 개혁.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작센 공작 가의 중심에는, 두말할 것 없이 작센 공작의 대리자로서 활약하고 있는 데일의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데일이 작센 자작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왕령의 일실에 체류하는 사이, 의회가 소집되었다.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탑, 소서리스 의회였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데일 공자님.”
직전까지 데일은 작센 자작성의 집무실에 있었다. 그러나 시티 마스터의 밀사가 데일을 찾아왔고, 그를 매개로 물리적 거리마저 초월해 의식이 결속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부 작센 공작령의 대칭, 수정의 대지라 불리는 남극의 동토.
바로 그 대지 위에 탁자가 놓여 있었고, 청색 마탑의 지배자라 일컬어지는 소서리스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주최하고 있는 의회에 물리적 거리나 위치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의 여부를 떠나 필요할 때 정보를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그 행위가 갖는 의미의 중차대함을 모를 데일이 아니었다.
“작센의 데일, 의장님을 뵙겠습니다.”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후드로 정체를 가리고 있는 청색 마탑주…… 의장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몇 마리 나비들이 그녀의 등 뒤를 따라 날아올랐다.
청색의 나비였다.
“흑색 마탑에서 공자님이 보여주신 활약에 대해서는,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어요.”
나비가 날아올랐고, 소서리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척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키아라 황녀님.”
제국의 제5황녀 키아라, 용의 피를 잇는 황실의 일족이자 동시에 청색 마탑의 첩자로 암약하고 있는 소서리스.
“후후, 제 정체를 입에 담아도 달라질 것은 없답니다.”
키아라가 후드를 벗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저 역시, 이렇게나마 황녀님을 다시 뵙게 되어 기쁠 따름이었습니다.”
“어머나.”
“사담은 그 정도로 해두지요.”
데일의 말에 키아라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고, 의장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데일 공자님, 바쁘실 시기에 어려운 걸음을 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달리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참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의장이 말했다.
“5서클의 경지가 되어 ‘옛 어둠의 어머니’와 하나로 거듭나셨고, 나아가 작센 공작령에서의 활약에 대해서는 저희 역시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답니다.”
“작센 공작령에 청색 마탑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우리 청색의 사람들에게는 늘 비밀스러움과 신중함이 요구되고 있지요.”
“세피아 님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까?”
데일이 짐짓 차갑게 되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데일 공자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 청색 마탑의 외부자가 아니니까요.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존재이지요.”
의장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그림자 군주시여.”
“쓸데없는 사담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까?”
“후후, 그럴 리가요. 공자님의 신뢰를 얻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랍니다.”
의장이 말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자님의 신뢰를 얻기 위해 소집한 의회니까요.”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저 우리의 새와 쥐들이 들은 비밀스러운 밤말과 낮말들을, 함께 공유하고자 함이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제국이 어느 때 이상으로 깊이 작센을 주시하고 있답니다.”
의장이 말했고, 데일이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주시하지 않는 쪽이 이상하겠지요. 그것이 그렇게 비밀스러운 가치를 가진 이야기입니까?”
“부디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주세요, 총명하신 공자님.”
의장이 말했다.
“그럼 다음으로, 요크의 티타니아.”
일찍이 데일의 활약을 통해, 장미 전쟁에서 승리하고 실질적으로 랭커스터 공작 가를 흡수한 몽마의 일족들.
“적색 마탑이 천검 랭커스터 공과 접촉했고, 장미 전쟁의 배후에 작센 가가 개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답니다.”
“……!”
“다음으로, 에르제.”
“산의 암살자 내부에서 세피아 양의 처신을 두고 뜻이 엇갈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니콜라이 추기경의 수상쩍은 행동을 두고 교회 내부에서 의심하는 자들이 늘고 있답니다.”
데일과 밀접하게 엮여 있는 제국 각지의 비밀들이, 소서리스들의 입을 통해 차례차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아가 데일과 직접 엮여 있지 않더라도,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중대 사항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데일 역시 예상 내의 일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데일의 비밀이어야 할 정보들이 청색 마탑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상세하게 밝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상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비밀을 고백하는 것처럼, 확실한 신뢰의 증표도 없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차례대로 소서리스들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의장이 미소 지었다.
“달리 협박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협박이라니요,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하고 있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들에 대해서는 저희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두고 있지요.”
의장이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산의 암살자들.”
의장이 말했다.
“공자님과 약속했다시피, 이 이상 세피아 양을 지켜드리는 것은 우리 청색의 역할이 아니니까요.”
그날, 데일은 세피아의 부채를 대신해서 짊어지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기에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흑색 마탑과 데일 공자님의 몫으로 남겨 두었답니다.”
“참으로 약속을 철저하게 지켜주시네요.”
“공자님께서 마음이 바뀌실 경우, 저희가 다시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의장이 말했고, 그러나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듯이, 세피아 님을 지켜드리는 것은 저와 작센 가가 수행해야 할 일입니다.”
젓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나아가 그대들이 알려주신 것과 그 조치들에 대해서는, 거듭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지금도 대륙 각지의 온갖 비밀과 정보들을 손에 넣고 조종하는 자들.
청색의 흑막(Mastermind).
“말씀드렸듯이, 저희 청색은 늘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청색 마탑주가 말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의식의 결속이 깨지고 데일이 있는 곳은 어느덧 작센 자작성의 집무실이었다.
“…….”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하고 있는 시티 마스터의 밀사를 돌려보냈다.
제국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청색의 정보망. 그들의 솜씨를 얕볼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적어도 지금 당장으로서 그들이 그림자 군주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나아가 그들의 ‘청색 거미줄’이 당장 데일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망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으나, 신뢰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나…… 머리가 아프게 됐다.’
말마따나, 모략과 거짓의 마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 데일이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그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었으니까.
산의 암살자. 사막의 다크 엘프들로 이루어져 속세의 추방자들을 숙청하는 엘프 사회의 비밀 조직.
일찍이 청색 마탑은 그들과 거래해 세피아의 목숨을 지켜주었고, 그 빚을 대가로 그녀의 목숨을 저당잡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부채를 짊어지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 아니었다.
* * *
“마스터 바로.”
“어허, 시펄. 목소리 좀 낮추쇼.”
그림자 대법정에 데일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마스터 바로가 어울리지 않게 소리를 낮추었다.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무섭게,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잠들어 있는 그림자 성녀가 보였다.
“모처럼 아가씨가 잠이 드셨소.”
“…….”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말없이 등을 돌렸다.
* * *
밤의 어둠이 깊었고, 마왕령의 밤바람이 휘몰아쳤다. 아니, 이제는 마왕령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북부 개척지의 바람이었다.
“사막의 다크 엘프들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나?”
“허허, 시펄. 내 명색이 대륙 제일의 암살자 아니겠소. 설마하니 그것도 모를까 봐?”
성의 앞마당에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마스터 바로가 호탕하게 웃었다.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서, 그들 산의 암살자들과 접촉할 생각이다.”
“푸흡! 컥, 씨펄!”
“이런 시펄.”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마스터 바로가 입에 물고 있는 맥주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덩달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끄럽게 움직일 수는 없고, 마침 같이 움직일 게 그림자 법정밖에 없지.”
“하이고, 어째 온갖 좆뺑이란 좆뺑이는 줄줄이 내 몫이네.”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투덜거렸다.
“그래도 댁 덕에 아가씨 팔자가 그나마 나아진 것 같소.”
투덜거리고 나서, 그가 말을 잇는다. 평소답지 않게 진중함을 머금고 있는 목소리였다.
“흑색 마탑의 나리들 덕에 예전처럼 고통이나 발작도 덜하고, 광신도 새끼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시절에 비할 바 아니지.”
“여전히 그녀의 기사를 자청하고 있나?”
데일이 되물었다. 일순 마스터 바로가 숨을 삼켰다.
“주군의 등에 칼을 찔러넣고, 기사의 수치가 되어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며…….”
“허허, 시펄. 낯 뜨거운 소리 하지 좀 마쇼.”
마스터 바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나의 사람으로 있는 이상, 그림자 성녀는 작센의 이름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데일이 말했다.
“대륙 칠검이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개뼈다귀는 아니지.”
마스터 바로가 재차 맥주를 들이켜며 낄낄거렸다.
“하기야, 이 거지 같이 추운 눈밭에서 얼마를 뒹굴었는데 사막이라고 못 구를 게 있나.”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네.”
바로의 말을 듣고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웃고 나서 흘끗 바로의 손에 들려 있는 맥주를 바라봤다.
“뭐, 댁도 맥주 좀 들이키시겠수?”
“아니.”
“허허, 맥주 맛을 모르다니. 인생의 5할이나 손해 보고 사시네.”
“…….”
흘끗 바라보고 나서, 이내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 * *
상처 입은 엘프가 그곳에 있었다.
“아, 참으로 가엾기도 하지.”
“…….”
도시의 뒷골목.
새벽이 깊었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 후드 차림의 여성이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에 후드 밑의 구릿빛 피부가 흘끗 비쳤다.
손에 쥐고 있는 암기가 창백하게 서슬을 빛냈다.
“이것이 우리가 네게 베풀어줄 수 있는 최후의 자비다.”
“…….”
상처 입은 엘프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추악한 황금의 제국에서 오욕(汚辱)에 더럽혀지기 전에, 그림자의 여신이 너를 거두어주실 테니까.”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그림자가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