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 * *
7서클의 흑마법사, 나아가 흑색 마탑의 98계층에 있는 강자 중 하나.
그 세월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노괴가 그곳에 있었고, 5서클의 힘을 손에 넣은 데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다.
『검은 산양의 서』와 융합해 암혈의 육체로 거듭나 있는 데일이, 심장을 휘감고 있는 칠흑의 서클을 가속했다.
동시에 노사가 펼치고 있는 수묵화 속의 세계에 일필(一筆)이 덧씌워졌다.
데일의 앞에 있는 흑마법사, 노사의 손에 들려 있는 붓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회화의 세계이자 도화지 속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 도화지를 내려다보며 움직이는 천상의 붓이었다.
그리고 데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덧칠해 없애고자 휘둘러지는 절대자의 붓처럼 느껴졌다.
나아가 그 붓이, 명백하게 데일의 앞에 있는 ‘노사’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 도화지 속의 덧없는 존재로 거듭나 있고…… 그 존재를 덧씌우기 위해 노사가 붓을 휘갈기듯이.
그렇기에 데일이 재빨리 그의 발밑을 중심으로 사상의 세계를 펼쳤다.
고위 마법사의 결투에 있어, 마법사의 사상을 투영하고 있는 영토를 세워 올리기 위해.
“……!”
데일의 발밑을 따라 일대의 풍경이 뒤틀렸다. 그리고 여느 때의 겨울밤과 칠흑의 성채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데일의 세계가 아니었다.
노사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먹물을 이용해 농담을 나타내고 있는 ‘수묵화 속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데일의 세계 그 자체를 덧씌우듯 칠흑의 먹물이 흩뿌려졌다.
데일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풍경이, 먹물 속으로 잠겨 사라지듯 어둠 속에 수몰되었다.
“이 세계는 하나의 화폭(畫幅)와 같지요.”
하늘에서 자신을 덧씌우기 위해 휘둘러지는 먹필을 피해, 데일이 그림 속의 존재가 되어 도망치듯 땅을 박찼다.
그리고 노사의 수묵화 위에 새겨지는 것은 그저 마구잡이로 덧씌워지는 일필이 다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정교하기 그지없는 세필이, 동시에 지상을 향해 휘갈겨졌다.
세필이 춤추듯 움직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물의 그림이었다. 마치 동양화 속의 괴물처럼 그 형상을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이다.
비로소 붓이 멈추었고, 그림이 움직였다.
회화(繪畫)의 괴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화지는 하나이나, 도화지 위에 제 그림을 새겨넣고자 하는 화가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답니다.”
노사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림자 군주가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를 덧칠하기 위해 하늘에서 일필이 휘둘러졌고, 회화의 괴물들 역시 일제히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덧씌우기 위해 휘몰아치는 먹물 앞에서, 그림자 군주가 팔을 뻗었다.
암혈의 갑주가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칠흑의 촉수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촤아악!
머리 위에서 휘둘러지는 먹필을 향해, 칠흑의 촉수 하나가 휘감겨 강하게 고정되었다.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붓을 촉수로 휘감아, 데일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직!
쇄도하는 회화의 괴물들을 향해, 데일이 ‘절대자의 붓’을 휘갈겨 먹물로 뒤덮었다.
그림 속의 존재가, 그림 그리는 붓을 빼앗아 그의 의지로 도화지를 덧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저의 붓입니까?”
데일의 물음에 노사가 껄껄 웃었다.
“자, 어서 그려보세요.”
웃고 나서 노사가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세상이란 이름의 도화지 위에, 공자님이 그려 넣고자 하는 그림을 말입니다.”
“…….”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그렇게 쉽게 보여드릴 수는 없지요.”
이윽고 암혈의 육체에서 다시금 칠흑의 촉수들이 솟아올라, 절대자의 붓과 수묵화의 세계 전체를 집어삼켰다.
비로소 노사의 사상을 이해하며, 마법사로서 적의 세계를 압도하고 장악하기 위해서.
7서클 마법사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를 집어삼킬 정도의 압도적 힘.
“오오, 역시……!”
노사가 경이롭다는 듯 숨을 삼켰다.
휘몰아치는 촉수가 폭발하며 흑색의 피가 흩뿌려졌고, 그것이 바로 데일이 노사의 세계에 덧씌우는 잉크였다.
흑색의 피가 울컥울컥 흩뿌려져 노사의 수묵화 위를 덧칠했고, 회화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어둠 속에서 칠흑의 성채가 솟아올랐고, 겨울밤의 풍경이 그 주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공자님이 이 세계에 덧씌우게 될 그림이 기대되네요.”
어느덧 데일이 펼치고 있는 겨울밤의 풍경 속에서, 노사가 빙긋 웃었다.
“…….”
노사가 보여준 사상의 세계는 확실히 지금까지의 마법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기이함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념과 사상 자체가 결코 쓰러뜨리지 못할 불가해(不可解)의 개념은 아니리라.
데일이 지금 이상으로 슈브의 힘을 끌어낼 경우,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100%의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사가 보여준 세계는 결코 전투 목적이나 상대의 소멸을 위해 펼친 형태가 아니다. 악의가 없었으니까. 순수하게 데일을 시험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회화의 세계가 철저한 악의를 갖고 무기의 형태로 활용될 경우, 그것은 또 100% 별개의 이야기가 되겠지.
‘높게 쳐도 7대 3 정도의 승률이겠지.’
냉정하게 상황을 헤아리고, 동시에 노사의 가르침을 새기며 데일이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이 흑색 마탑에 덧씌우게 될 그림이 어서 보고 싶어지네요.”
노사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어느덧 두 사람의 세계가 소멸하며 마력으로 화했고, 그곳에 있는 것은 흑색 마탑의 98계층이었다.
“자, 어서 가보세요.”
노사의 말에 데일이 재차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 * *
“참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계시네요.”
99계층.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가 그곳에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녀의 모노클을 빛내며.
“하루아침에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헤아리고 결정하는 것은 제 역할이 아닙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나 에리스가 그 이상 말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 어서 가보세요. 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리스가 말했고, 데일로서도 망설일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 * *
흑색 마탑의 정점. 가장 높은 곳의 옥좌에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직도 남자아이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결코 그 위압감이 줄어드는 일 없이.
“아버지.”
어둠과 죽음의 군주, 흑색공.
“잘 해주었다.”
비로소 차갑게 굳어 있는 표정이 풀리고, 데일을 향해 미소 지었다.
“처음 네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솔직히 말해서 허황하기 그지없는 몽상이라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조직의 개혁에 대해, 장로들 전체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구나.”
“노사께서 도움을 주셨지요.”
“네가 그를 설득했기에 가능했겠지.”
흑색공이 말했다.
“나는 너의 뜻을 존중하고 동의할 것이다.”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 앞에서, 데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네가 바라는 이상이 무사히 이루어질지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구나.”
“저 하나의 힘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작센 공작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파트너이자 어엿한 대리자로서.
“그러나 아버지와 장로들의 힘, 나아가 지금 우리 작센 공작령이 가진 역량이 결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들에게 공평하게 흑색의 지혜를 공유하고,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여 흑색 마탑의 정신을 되살린다.
보기에 따라서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이상으로 가득 차 있는 말처럼 들리리라.
그럼에도 데일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데일이 구상하고 있는 조직의 개혁이 성공할 거란 확신이 아니었다.
지금 이대로 갈 경우, 흑색 마탑이 결코 적색 마탑과 맞서 승리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었다.
“저나 아버지, 나아가 작센 가의 힘으로 당장 흑색 마탑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그러나 훗날에 이르러, 적색 마탑에 맞서기에는 힘도 규모도 무엇 하나 상대조차 되지 않겠지요. 우리 흑색 마탑이 과거처럼 진리의 괴물이 되지 않는 이상에야 말입니다.”
“이미 그 시절의 어둠을 거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저 역시 아버지의 뜻을 무엇보다 깊이 존중합니다.”
데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기에 바꾸려는 겁니다.”
“…….”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고서도 적색의 정신에 맞서기 위해서, 흑색의 지혜는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하지요.”
“쉽지 않을 것이다.”
흑색공이 덤덤히 대답했다.
“그러나 시도해볼 가치는 있는 일이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남자아이의 몸을 가진 흑색공을 보며, 데일이 재차 되물었다.
“아직도 육체를 되돌리지 못하셨습니까?”
그 물음에 흑색공이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째서……?”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흑색공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짤막하게 정적이 내려앉았고, 정적 끝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엘레나가 말하길, 조금 더 지금 모습으로 있어 달라는구나.”
“…….”
좀처럼 볼 수 없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래의 남자아이처럼 흑색공이 얼굴을 붉혔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작센의 ‘검은 공자’가, 5서클의 마법사로서 흑색 마탑의 장로에 임명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공식적으로 흑색의 후계자이자 장로가 되어 마탑 내의 직위를 손에 넣은 데일이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파격에 가까운 개혁의 바람이 흑색 마탑과 네크로폴리스를 휩쓸었다.
첫째는 마법을 쓸 수 없는 이들이 흑색 마탑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설령 그 출생이 아무리 비천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흑색 마탑의 부속 기구, 대학의 형태로서 마법을 쓸 수 없는 이들이라도 활약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고등 학부가 설립되었고…… 그러나 아직 그 결실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제법 시일이 필요하리라.
나아가 흑색 마탑 내에서 힘을 추구하는 흑마법사들이 별개로 떨어져, 작센 공작 직속의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흑색공 역시 전투에서의 활약을 전제로 하는 대륙 최강의 마법사 중 하나다.
철저하게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마법을 가르치고, 나아가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을 전제로 밤까마귀 기사들과 함께 공작 가의 검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졌다.
나아가 블랙아머 컴퍼니와 밤까마귀 기사, 그림자 법정의 고위 살수와 흑마법사들이 유기적으로 합해진 작센 가의 군세(軍勢)는, 하루가 멀다고 그 몸집을 비대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작센 자작 데일이 펼치고 있는 마왕령에서의 사업 역시 순조롭게 돌아갔고, 북부의 벽지는 어느덧 제국 내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황금의 대지로 거듭나 있었다.
데일의 옛 스승, 지혜로운 엘프 마법사의 소식이 들린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