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 *
데일이 에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바람이 휘몰아쳤다.
살을 에는 것처럼 시린 냉기를 머금고 있는 바람이었고, 어느덧 데일이 땅을 디디고 있는 곳은 흑색 마탑이나 에리스의 세계조차 아니었다.
냉기와 어둠의 동토.
데일이 이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통제를 벗어나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데일이 지금 어느 존재의 육체 속에 깃들어, 그의 시각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데일의 앞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낯이 익은 남자였다. 사내의 모습에 일순 위화감을 느꼈고, 머지않아 남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작센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이 그곳에 있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아가 산양의 뿔을 가진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그의 곁에 있었다.
『검은 산양의 서』를 가진 그림자 군주로서, 그의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차마 똑바로 응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빛이, 그곳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너무나도 뜨겁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존재가.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데일이 경악 속에서 숨을 삼켰다.
그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증오스러운 적이.
황금의 군주이자 태양의 검……. 아서 대제(Arthur Pendragon Magnus).
나아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 역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자였다.
불과 피의 군주, 유리스 후작. 그리고 적색의 마녀 레이디 스칼렛.
동시에 ‘이계의 용사’로서 쓰러뜨린 헤아릴 수 없는 강자와 군주들마저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지금의 제국을 지배하는 강자들이,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고대의 풍경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다.
일찍이 흑과 백이 하나의 마탑이었고, 그 외의 마탑이 존재하지 않을 고대의 시절.
그 시절의 흑(黑)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의 흑색 마탑이 아니었고, 그 시절의 백(白)이 의미하는 것 역시 지금의 백색 마탑이 아니리라.
그림자와 황금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과 그의 흑색파가 패배하고 몰락한 흑백 대전, 그림자와 황금의 전쟁임을. 애초에 오색의 마탑 모두가 결국 하나의 마탑에서 비롯되어 있는 방계임을.
그리고 황금에 맞서는 그림자의 수장으로서, 당대의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슈브의 촉수가 그의 육체를 휘감았고, 데일이 그러했듯 암혈의 갑주가 프레데릭의 육체 위에 덧씌워졌다.
마도서의 아바타.
불사공이 갖춘 암혈의 갑주는 일찍이 데일의 아바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힘과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인간 따위가……!”
그 모습을 보며, 황금의 군주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의 형상을 가진 육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피부가 물고기의 그것처럼 비늘이 씌워지고, 날개뼈를 찢고 동물의 날개가 튀어나왔다.
두 발로 서야 할 그의 육체가 굽어지며 금수의 그것처럼 뒤틀렸다.
육체가 끝없이 크고 거대해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황금의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역광으로 등지고 있는 꼭두서니 빛을 집어삼키고, 그 자신이 또 하나의 태양을 자처하며 일대에 광휘의 빛을 흩뿌렸다.
우두머리 용(Pendragon)의 이름을 가진 금색의 용이, 두 날개를 펼치고 포효했다.
“광휘의 신께서 너희 어둠의 자식들을 집어삼키리라!”
그 앞에서, 그림자 군주가 암혈의 갑주로 ‘흑색 피의 검’을 생성하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수백 배의 크기를 가진 용 앞에서, 검을 쥐고 있는 흑기사.
그야말로 옛 신화 속에서나 펼쳐질 것 같은 광경이 데일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 불사공 프레데릭이 땅을 박차고 황금의 용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프레데릭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촉수 다발을 생성하며, 다시금 그 육체를 덧씌우기 시작했다.
촉수가 휘감기고 또 휘감기며, 황금의 용에 맞먹을 정도의 《그림자 거신(巨神)》이 그곳에 있었다.
황금의 용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감히 형용할 수 없는 광기와 장엄함을 갖고서.
‘저것이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라고?’
데일이 암혈의 갑주를 덧씌울 때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 규모.
왕들의 정점에 서는 두 명의 왕, 그림자와 황금의 군주가 그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며 격돌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의 격돌이 이루어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감각의 홍수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이었다.
그야말로 폭력에 가깝게 머릿속으로 때려 박고 있는 지식들.
바로 그때, 불사공의 곁을 지키는 소녀 ‘슈브’가 고개를 돌렸다.
─ 어서 와, 오빠.
데일을 바라보며, 그대로 미소 짓는다.
─ 이게 바로 오빠가 갖게 될 진짜 힘이야. 어때, 멋지지?
불사공 프레데릭, 황금의 용에 맞서 그가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가 《그림자 거신》으로 거듭나 있다.
어느 의미에서는 거대 로봇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초대형 아바타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향해 황금의 용이 입을 벌렸다. 태양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열기가 쏟아졌다.
동시에 암혈의 갑주를 따라 촉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크기에서 펼치는 그게 아니라, 능히 하늘마저 닿을 듯 거대해져 있는 갑주에서 솟은 초대형 촉수들이었다.
바로 그 촉수들이, 황금의 용이 뿜고 있는 열기에 맞서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또 휘감았다.
동시에 용의 입에서 소멸의 빛이 휘몰아쳤다.
하나하나가 수백 미터에 육박하는 칠흑의 촉수들이 잿더미처럼 스러졌고, 동시에 칠흑의 피가 홍수처럼 흩뿌려져 일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황금의 용이 어느덧 그림자 군주를 향해 비행하며, 그의 아가리로 암혈의 갑주를 물어뜯었다.
거신 상태의 그림자 군주가 포효했고, 광기가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하늘과 대지를 요동치게 하는 우주적 존재들의 격돌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점까지, 불사공 프레데릭은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 * *
촤아악!
불사공 프레데릭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칠흑의 촉수들이 뜯겨나갔다. 마치 체내의 기생충을 억지로 제거하는 수술실 같은 풍경이었다.
불사공의 육체와 동화하고 있는 『검은 산양의 서』가 뜯겨나가고, 고통 속에서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를 지켜보고 있는 황금의 군주, 나아가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핏빛공’의 모습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그가 느끼고 있는 패배의 고통과 뼈저린 절망의 감정이, 그대로 데일의 뇌에 덧씌워졌다.
‘사람의 육체로서는 용을 이길 수 없다.’
‘인간을 초월하지 않고서는 저 존재를 이길 수 없다.’
‘더, 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저것에 닿을 수 없다.’
사람의 나약함에 뼈저리게 절망하며.
‘──나는 인간을 포기하겠다.’
패배의 고통 속에서 『검은 산양의 서』를 잃어버린 불사공 프레데릭이 중얼거렸다.
세상이 어둠 속으로 휘감겼다.
* * *
고개를 들자, 슈브가 그곳에 있었다. 치맛자락 밑으로 촉수들을 꿈틀거리며.
─ 옛날의 아빠를 좋아했어.
발버둥 치는 프레데릭을 내려다보며, 슈브가 웃었다.
─ 나는 말이야, 오빠. 인간이 좋아.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발버둥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때의 아빠 역시, 정말로 사랑스러웠지.
“우리들의 파멸을 지켜보는 게 그렇게 즐겁나?”
그렇기에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불사공 프레데릭이 느끼는 절망과 고통을 떠올리며,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의지를 다잡으며.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슈브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사공 프레데릭은 그의 전부를 바쳐 황금의 군주와 맞서고 패배했지. 인간이 용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 아니야, 틀렸어.
슈브가 고개를 저었다. 짐짓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리며.
“틀렸다고?”
데일이 되물었고, 슈브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용을 죽이는 것은 오직 인간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황금의 군주, 용들의 우두머리.
“그럼 어째서 불사공 프레데릭은 패배했지?”
─ 인간이기를 포기했으니까.
“불사공이 인간을 포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패배의 결과였다.”
─ 아니야.
슈브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순서가 거꾸로 됐어. 그날의 전투를 다시 잘 떠올려봐.
흑백 대전,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들이 맞설 당시의 그 압도적 풍경을 떠올렸다.
황금의 용에 맞서…… 그림자 군주가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어둠의 거신(巨神)으로 거듭나 있는 모습을.
“설마.”
데일이 나직이 중얼거렸고, 슈브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불사공 프레데릭은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인간을 초월했다.
─ 용과 맞설 때, 아빠는 자기가 신(神)이 됐다고 믿었지. 그래서 져버린 거야.
그래서 패배했다.
“……그럼 도대체 인간이란 것은 뭐지?”
그 물음을 듣고 나서, 데일이 되물었다.
─ 용기를 아는 생물.
슈브가 대답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대답이었다.
─ 용기는 인간밖에 가질 수 없는 감정이야. 그 이유를 알아?
데일이 잠시 침묵했고, 침묵 끝에 대답했다.
“용기를 알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알아야 하니까.”
강자가 약자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용(龍)이나 뱀파이어는 결코 인간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그러나 용과 뱀파이어에 맞서는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두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이길 용기가 필요하다.
─ 맞아,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한 생물이니까.
그 말에 슈브가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 그래도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아빠는 용기를 내지 못했어. 그래서 사람을 포기하고 신(神)이 되기를 택했지.
“신조차 용을 이길 수는 없었나?”
─ 용을 죽이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슈브가 웃었다.
─ 용기는 겁쟁이의 전유물이야. 그리고 나는 겁쟁이들이 좋아. 그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
데일이 덤덤히 침묵을 지켰다.
제국을 지배하는 이형의 존재들. 그리고 그들의 정점에 황금의 군주가 군림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용기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그 존재들로서는 결코 용을 이길 수 없으니까.
동시에, 그 용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그 ‘이형의 존재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데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나.”
비로소 에리스가 말하는 의미, 나아가 그들이 말하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3서클을 기점으로 그 이상의 경지를 얻는 것은 결코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다. 오직 하나였다.
깨달음.
에리스와 슈브가 데일에게 준 것은 바로 그 깨달음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어디까지 이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이다.
바로 지금, 데일의 앞에는 5서클의 경지로 나아가는 입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타 작센 가주들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검은 산양의 서』가 없었으니까.
따라서 지금의 데일이 작센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의미였다.
작센의 시조이자 초대 그림자 군주…… 불사공 프레데릭의 유지를 잇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 그림자 군주의 왕위(王位)를 계승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