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 *
흑색 마탑주의 대리자로서 탑의 시험을 감독하는 것과 별개로, 어차피 응해야 할 탑의 시험이었다.
열다섯 살을 맞고 흑적청(黑赤靑)의 마력을 바탕으로,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에 열기관 투영의 능력마저 손에 넣었다. 지금의 데일이 갖는 성장세는 제국 제일의 천재란 말조차 부족한 경지였고, 그럼에도 그날 불사공과 흑색공의 싸움을 보며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더 강해져야 했다.
어찌어찌 규격 외 강자와 동등하게 맞서는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다 치더라도, 그날 그들이 보여준 것은 그러한 강자들마저 아이들 싸움처럼 느껴질 정도의 경이 그 자체였다.
이 제국을 지배하는 군주들의 존재, 나아가 그들이 가진 진짜 힘.
아니, 그날 두 작센이 보여준 것은 결코 그들의 100% 전력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신경전조차 데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공식적으로 대륙의 정점에 서는 것은 오색 마탑의 탑주, 다섯 마법사다. 그러나 그 외에 ‘그림자 마탑’의 불사공 프레데릭처럼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이 몇 명이나 더 존재할까?
당장 불사공 휘하에 들어가 있는 옛 흑색 마탑주이자 작센의 가주…… 《엘드리치》들이 그러하듯.
그 외에 지금도 몇 명의 군주들이 제국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용사로서 쓰러뜨린 무수한 강자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러나 그들조차 결국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데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더 강해지는 것. 탑의 시험은 바로 그 강함을 가장 명쾌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수행의 장이었다.
여러 가지 능력을 소화하며 다루고 있는 데일이었으나, 궁극적으로 그 힘의 토대는 그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마나 서클이다.
열두 살 나이에 4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은 천재 마법사.
그 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전투와 경험을 거듭하며 착실하게 쌓아 올린 수행의 성과를 시험할 때가 왔다.
비로소 그의 앞에 서 있는 벽을 뛰어넘을 때가 온 것이다.
5서클의 벽이었다.
* * *
흑색 마탑의 최상층.
“에리스 님.”
데일이 탑의 시험을 수행하기에 앞서 그를 맞아준 것은 흑색 마탑주의 비서, 대행자 에리스였다.
“아, 데일 공자님.”
에리스가 여느 때처럼 모노클을 빛내며 사무적으로 미소 지었고, 데일은 오직 흑색 마탑주에게 허락되는 최고 계층의 옥좌를 바라보았다.
흑색 마탑주의 옥좌.
“앉아보시겠습니까?”
데일이 그 자리를 보고 있자니, 에리스가 물었다.
“제가 어찌 감히 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공식적으로 데일 공자님께서는 탑주님의 대리자로 계시니까요. 아울러 흑색 마탑주의 후계자로서, 공자님이 자리에 앉을 자격은 차고도 넘치지요.”
“…….”
데일이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 그녀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말마따나, 데일이 시험을 응시하는 것과 별개로 흑색 마탑주가 수행해야 할 업무를 대행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앉아봐서 나쁠 것도 없겠지.’
흑색 마탑주의 자리에 앉아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일찍이 작센 공작성에 있는 옥좌에 앉을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저 그곳에 앉아, 흑색 마탑 일대에 펼쳐지고 있는 곳곳의 모습이 흡사 CCTV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데일 공자님께서는 머지않아 훗날, 정식으로 그 자리에 앉게 되실 겁니다.”
탑주의 옥좌에 앉아 있는 데일을 보고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요.”
데일이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아니요, 그것은 공자님의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그러나 에리스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작센 가의 후계자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이지요.”
“…….”
“아울러 탑주님을 대행해 시험의 감독 업무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땅히 비서로서 수행해야 할 제 역할이니까요.”
에리스가 말을 잇는다.
“공자님께서는 그저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시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에리스 님.”
그녀의 말을 듣고,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흑색공의 비서이자, 동시에 ‘어둠의 공주’라고 하는 다소 부끄러운 별명을 가진 7서클의 흑마법사.
공식적으로 흑색공의 뒤를 이어 흑색 마탑 내에서 서열 2위의 자리를 가진 고위 장로다. 겉으로 보기에 스물 남짓의 이지적이고 차가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으나, 그녀의 경지는 결코 그 정도의 세월로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리라.
“에리스 님이 보기에, 제가 이 시험에서 5서클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데일이 물었다. 어디까지나 배움을 청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흑마법 스승을 대하듯이.
“글쎄요.”
에리스가 모노클을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무적이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럼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가 되물었다.
“그것은 《어둠의 공주(Dark Princess)》로서입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어디까지나 흑색의 대행자는 흑색공의 비서를 뜻하는 직함이었고, 그렇기에 ‘7서클의 흑마법사’로서 그녀가 가진 이름을 입에 담으며.
“…….”
그러나 바로 그때, 차가운 모노클 뒤로 에리스의 표정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이름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말하는 입장에서도 조금 부끄럽게 들리는 이름이기는 했다.
“저는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정말입니까?”
데일이 애써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려 하자, 에리스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솔직히 조금 부끄럽게 들리기는 하는 것도 같네요.”
“…….”
에리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따라 일곱 개의 마나 서클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어둠에 삼켜지십시오.”
칠흑의 마력을 휘몰아치며, 에리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일대의 풍경이 어둠 속으로 수몰되기 시작했다.
‘사상의 세계……!’
7서클의 고위 흑마법사가 펼치는 마음의 풍경.
가시나무 숲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덩굴처럼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는 가시의 세계.
“데일 공자님께서 탑의 시험을 치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5서클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그 가시나무 숲에서 ‘어둠의 공주’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시험에서 강자들과 맞서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될 테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방식으로 지금의 데일 공자님이 ‘5서클’을 이룰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에리스의 말에 데일이 숨을 삼켰다.
“공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4서클의 경지는, 이미 탑의 장로들과 맞붙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다듬어져 있는 서클입니다. 나아가 공자님이 가진 마도서의 힘과 아바타를 고려할 때, 그것은 더욱 그렇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 3서클을 이루었을 때, 데일은 억지로 그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감으로써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그 후 4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은 것은 아버지 흑색공의 마도서, 죽음(Death)의 힘을 빌린 까닭이었다.
데일이 서클을 확장하는 것은 결코 보통 마법사들의 그것과 같지 않다. 에리스는 데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흑색 마탑주님의 곁을 보좌하는 자로서, 그 후계자를 이끌어주는 것 역시 비서의 의무니까요.”
에리스가 그녀의 모노클을 고치며 덤덤하게 말했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가시나무 숲이,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공자님이 흑색 마탑 내에서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탑의 시험’은 응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다음 경지의 서클을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특별한 시험이 필요하겠지요.”
“특별한 시험이라고요?”
에리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마왕령의 땅에서, 불사공 프레데릭을 조우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그럼 옛 작센 가주들의 비밀과 《엘드리치》…… 그 너머의 진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림자 군주시여.”
“……!”
“저는 대대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작센 가주(家主)들을, 아울러 그들이 흑색 마탑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이어지는 에리스의 말에 데일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자기 의지로 죽음을 받아들이신 자들도 있었고, 나아가 죽음을 거부하며 불사공이 계시는 저 너머의 대지로 떠나신 자들도 있습니다.”
“에리스 님께서는 설마…….”
“불사공 프레데릭께서 ‘저 너머의 이방자’들을 따라 마계로 떠날 때, 그의 아들과 소수의 흑색파는 이곳 작센의 영지에 남기를 결의했습니다.”
에리스가 말했다.
“저 역시 그곳에 남기를 결의한 흑색파 중 하나였지요.”
데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체를.
까마득할 정도의 고대부터 살아남아 있는 흑마법사.
“그리고 저는 대를 거듭하며 작센의 가주들이 쌓아 올린 어둠의 지혜를 정리하고 축적해, 다음 대에 그 유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지키는 사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지요.”
고대의 사서(Ancient Librarian).
“설마 에리스 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가르치신 겁니까?”
“마탑주가 되는 것은 결코 일대(一代)에 쌓아 올린 지식이나 지혜로 어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에리스가 말했다.
“적색 마탑을 지배하는 불과 피의 군주처럼,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공자님과 흑색공께서 ‘인간’으로 남아 있는 이상, 그 격차를 메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불과 피의 군주, 나아가 불사공에 맞서 뒤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 그 역시 제국을 지배하는 군주들의 하나가 아니었나.
“설마 아버지 역시──.”
“이제야 겨우 불혹(不惑)을 맞이하신 보통의 사람이지요.”
그러나 에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나이 사십 남짓의 마법사가,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며 고대의 존재들과 맞먹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말했듯이, 그것이 바로 제 역할입니다.”
그 해답의 열쇠가 데일의 앞에 있었다.
“평생을 바쳐도 고작 일대의 지식밖에 쌓아 올릴 수 없는 작센의 가주들에게, 그 대(代)를 초월해서 축적하고 정리한 지식을 전하는 것.”
고대 흑백 마탑 시절, 불사공 프레데릭과 함께 흑색파를 자처한 마법사로서.
작센의 동토에 남아 대대로 작센의 가주들에게 그 유지를 전하는 또 하나의 불사자.
“그것은 또 하나의 작센, 불사공 프레데릭의 뜻입니까?”
그렇기에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그렇게 해서 작센의 가주들을 그의 수하 《엘드리치》로 거듭나게 해, 훗날 황금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림자의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처음부터 작센 공작 가는 그저 불사공의 병력(兵力)을 육성하는 교육소에 불과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엘드리치》가 되어 불사의 삶을 손에 넣고, 마계의 어둠에서 수행하는 작센의 가주를 보셨습니까?”
에리스의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에 공자님의 아버지를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고작해야 불사공을 비롯해 세 명 정도일 겁니다. 아니, 그들조차 100%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지요.”
“……!”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사의 삶 속에서 끝없이 마법을 가다듬을 수 있는 존재들이, 고작 인간에게 패배하다니요.”
그 말에 데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힘입니다.”
에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공자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믿고 있습니다.”
“……!”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자님의 몫이지요.”
에리스가 물었다.
“흑색 마탑의 후계자로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그 어둠을 계승할 각오는 되어 있으십니까?”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