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 *
제국의 정점에 서는 다섯 마법사의 일좌, 흑색 마탑주.
그러나 그에 맞서는 것은 그 이상의 어둠과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그림자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였다.
불사공 프레데릭.
그가 데일을 일컬어 ‘찬탈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크게 틀린 말도 아니리라.
그의 말마따나 딸을 제물로 바쳐 『검은 산양의 서』를 집필한 것은 불사공 자신이었고, 그것을 통해 어둠의 모신(母神)이 비로소 이 세계에 강림했다.
기실, 데일이 그림자 군주의 호칭을 얻은 것도 결국 작센의 피로 『검은 산양의 서』를 손에 넣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불사공의 입장에서 데일의 행위를 ‘찬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또 하나의 작센이자,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로서.
‘지금의 그대로서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테지요. 제국이란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군주들의 존재에 대해서.’
무심코 제국의 제5황녀이자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키아라의 말이 떠올랐다.
공식적으로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이 대륙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황제와 하나의 국가다.
그러나 제국이 그럴싸하게 내세운 대의 속에 침묵하는 ‘군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불과 피의 군주, 빛과 천상의 군주. 나아가 이곳 작센 공작령을 다스리고 있는 ‘어둠과 죽음의 군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속에서, 저마다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이름 없는 왕들. 개중에는 그들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었고, 나아가 스스로 그 옥좌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감춘 자들도 있었다.
그것이 이 세계의 실체였고, 이곳에서도 다를 것은 없었다.
두 개의 제국, 황금과 그림자의 두 군주가 대립하는 사실 자체가…… 궁극적으로 그들 사이에 ‘하나의 왕좌’가 놓여 있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흑금(黑金)의 왕좌》.
그렇기에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왕들의 싸움이었다.
어둠과 죽음의 군주 ‘흑색공’이, 마땅히 충성해야 할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를 향해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비록 그 행위는 결코 흑색공 자신의 야망이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치품천사의 그것처럼 여섯 장의 날개가 펼쳐졌고, 그러나 그 날개는 까마귀의 깃털처럼 검고 불길했다.
푸드덕!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흑색공의 등 뒤에서 날아올랐다.
동시에 불사공의 발밑에서 촉수들이 솟아올라, 흑색공을 향해 쇄도했다.
촤아악!
데일의 검과 암혈의 갑주를 일방적으로 봉쇄하고 압도할 당시의, 몇십 배에 가까운 촉수 다발이었다.
그야말로 주위를 집어삼키는 것 같은 그 압도 속에서,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네버모어(Nevermore).”
발밑으로 중심으로 칠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불사공의 촉수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어느덧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까마귀 떼가 불사공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새」처럼.
저물녘 어스름 위를 가득 메우는 갈까마귀의 무리였다.
“죽음을 몰고 오는 새들이구나.”
자신을 향해 쇄도하고 있는 까마귀 무리를 보며, 불사공 프레데릭이 웃었다.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까마귀 떼가, 일제히 그의 육체에 달라붙어 살점을 쪼아먹기 시작했다.
살점을 찢어먹고 내장을 파헤치고, 아무것도 없는 그의 동공에 부리를 쪼아 깍깍거리며 포식하고 있다.
그 후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고,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뼈밖에 없는 남자아이의 시체였다.
동시에 시체가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가, 뱀처럼 미끄러지며 흑색공을 향해 질주했다.
질주하는 그림자가 흑색공의 발밑부터 머리끝을 집어삼켰고, 그의 육체를 집어삼키며 뱀이 허물을 벗듯 ‘그림자’를 벗어냈다.
그림자가 허물을 벗었고, 그곳에 있는 것은 흑색공이 아니라 불사공 프레데릭이었다.
일개 남자아이가 아니라, 흑색공과 같은 젊음을 가진 어엿한 사내가 되어서.
동시에 뼈밖에 남지 않은 남자아이의 시체를 향해, 다시금 까마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은 방금까지 파먹은 프레데릭의 살과 피와 뼈였다.
그리고 겨울의 먹이를 저장하듯 남자아이의 시체 위에 그것을 뱉어냈고, 살과 피와 뼈가 꿈틀거리며 융합하기 시작했다.
남자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불사공 프레데릭이 아니었다.
데일의 아버지, 작센 공작을 무척이나 닮아 있는 어린 남자아이였다.
동시에 작센 공작의 나이를 빼앗은 불사공 프레데릭의 육체가, 마치 시계를 수천 배속으로 빨리 감는 것처럼 급속히 늙어가기 시작했다. 육체에 주름이 잡히고 생기가 빠져나가며 미라의 그것처럼 쪼그라들었다.
마찬가지로 불사공의 육체를 빼앗은, 아버지 작센 공작의 ‘나이’ 역시 거꾸로 어려지기 시작했다. 열두 살에서 다섯 살, 다섯 살에서 생후의 몇 개월로 세야 할 젖먹이의 육체로.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듯이.
서로의 세월을 마구잡이로 가속하거나 되돌리는 풍경이 교차했다.
흑색공은 어느덧 엉금엉금 걸음마를 기어야 할 유아에서…… 나아가 제힘으로 몸을 뒤집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젖먹이로 거듭나,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사공의 육체 역시, 시대를 뛰어넘어 보존되는 이집트의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채였다.
“태아의 미성숙한 뇌는 사고를 하기에 그리 적합한 육체가 아니지.”
이집트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불사공 프레데릭이 비로소 미소 지었다.
불사의 세월에 걸맞은 육체를 갖고, 말 그대로 아기가 되어 울음을 터뜨리는 데일의 아버지를 보며.
“작센의 가주(家主)를 자처하는 흑색 마탑의 정점이, 고작 이 정도였나?”
“아버지……!”
데일이 당혹 속에서 숨을 삼켰다. 동시에 미라로 거듭나 있는 불사공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어린 아기 하나를 잡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란 듯이.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하늘에서 쇄도하듯 까마귀 하나가 ‘아기 상태의 흑색공’을 두 발로 낚아챘다.
불사공의 그림자를 피해 까마귀가 비행하는 와중에도, 아기 상태의 흑색공은 그 이하의 존재로 어려지고 있었다.
유아에서 젖먹이로, 젖먹이에서 태아(胎兒)로.
나아가 생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이하의 존재로 퇴화하고 있는 흑색공을, 까마귀가 그대로 집어삼켰다.
집어삼켰고, 동시에 까마귀가 알을 낳았다.
알이 깨지고 거기에 있는 것은 방금과 같은 아기 상태의 흑색공이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어려지지 않고, 시계를 수백 배로 감듯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불사공과 같은 어린 남자아이의 육체를 되찾고, 흑색공이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노화를 거듭하는 불사공 역시, 처음 흑색공의 육체를 빼앗을 당시의 젊음을 되찾은 뒤였다.
서로의 육체를 빼앗고, 삶과 죽음의 시곗바늘을 자유자재로 되돌리는 자들.
죽음 너머의 진실을 탐구하는 작센 가의 싸움.
거기에 소위 보통의 ‘규격 외 강자’들이 펼치는 싸움처럼 격렬하거나 압도적 파괴력을 가진 격돌은 없다.
그들이 그럴 마음을 먹을 경우 대륙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군세(軍勢)를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대륙 제일의 사령술사로서, 나아가 그림자술사로서.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삶과 죽음의 진리가 무기가 되어 사상을 부딪칠 따름이다.
어디까지나 죽음 너머의 진리를 추구하는 작센의 방식으로.
“역시,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작센의 피마저 속일 수는 없었나.”
바로 그 작센의 시조 불사공이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방금까지의 광기나 동요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흑색공의 육체를 빼앗고 자신의 존재를 덧씌워, 그에 걸맞은 위엄을 가진 사내가 되어서.
그에 비해 소년으로 거듭나 있는 흑색공의 존재는 흡사 데일의 동생처럼 보여, 여느 때의 위압감마저 사라진 채였다.
그대로 사내, 불사공 프레데릭이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 역시 작센의 피를 잇는 그대의 후손이지요.”
어린 남자아이의 육체를 가진 흑색공이, 데일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사춘기 이전의 애티 어린 목소리였다.
“동시에 나의 피와 사상을 빼앗은 찬탈자이지.”
“데일을 택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의지입니다.”
흑색공이 말했다. 그녀, 『검은 산양의 서』를 입에 담으며.
불사공의 표정에서 다시금 평정이 흐트러진다.
“저 어린 찬탈자는 우리 옛 어둠의 어머니와 나의 딸아이를 빼앗았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비로소 침묵하고 있는 데일이 입을 열었다.
“어둠의 모신과 어린 슈브가 백색 마탑의 지옥에 갇혀 있을 때, 그녀에게 손길을 뻗어준 것은 저였습니다.”
“…….”
“당신이 북부의 어둠 속에서 영겁의 정체를 택했을 때, 저는 기꺼이 작센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백색 마탑의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아이야, 네가 감히 ‘우리’의 결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지껄이는 것이냐.”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교체하는 것이 이 세계의 이치이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그림자의 왕위(王位)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옛 그림자의 왕이시여.”
다시금 불사공의 표정에 살기가 깃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육체가 아니라, 작센 공작의 육체를 가진 그 사내의 모습에는 그 무엇과 비교할 바 없는 위압감이 깃들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비로소 침묵을 깨트리고, 데일의 곁에 있는 ‘슈브’가 불사공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아, 아아……! 리제!”
불사공의 표정에, 아버지 작센 공작이 그의 딸 ‘리제’를 대할 때와 같은 상냥함이 깃들었다.
그러나 불사공 프레데릭은 그 손으로 자신의 딸 리제를 제물로 바쳐, 마도서 『검은 산양의 서』를 집필했다. 이제야 그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데일이 느끼는 감정은 그저 역겨움이었다.
─ 어째서 물러나 주지 않는 거야?
슈브의 말했고, 불사공이 다시금 숨을 삼켰다.
─ 나는 오빠가 좋아. 오빠의 세계와 고독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 그러니까 앞으로도 오빠의 곁에 있고 싶어. 오빠가 보여주는 인간을 더 많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
슈브, 아니…… 일찍이 불사공이 그녀에게 바친 제물이자 그의 딸, 리제의 자아를 갖고서.
─ 나는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리제가 말했다.
─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니까.
“아, 아아…….”
리제의 말에, 불사공 프레데릭이 힘없이 웃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그러나 점점 커지며 이내 흐느끼듯 광기에 차서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금 싸움이 시작되려는 것일까. 데일이 숨을 삼키며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일대를 뒤덮고 있는 어둠의 풍경이 스러졌다. 마찬가지로 흑색공이 펼치고 있는 저물녘의 어스름도 모습을 감추었다.
마왕령의 끝자락, 교회와 작센의 두 부대가 격돌하고 있는 풍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데일이 그대로 숨을 삼켰고, 그러나 불사공 프레데릭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데일의 아버지, 작센 공작이 그곳에 있었다.
“아, 아버지.”
열다섯 살 데일의 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열두 살 남자아이의 육체를 갖고서.
“그 육체는…….”
“걱정하지 마라, 되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데일의 키보다도 작아진 아버지 작센 공작이 말했다.
“그저 조금 시일이 걸릴 것 같구나.”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사태에, 씁쓸하게 웃음을 삼키며.
참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