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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59화 (159/301)

159화

* * *

일대의 풍경이 어둠 속으로 수몰되었고,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두 명의 그림자 군주’였다.

그림자 군주의 발밑에서 촉수들이 솟아나 일제히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그림자 군주’가 암혈의 갑주를 액체 금속처럼 재구축하며 칼날을 생성했고, 흑색 피의 검이 그림자 군주의 촉수들을 일제히 잘라냈다.

곧장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군주의 발밑에서 재차 촉수들이 솟아났고, 그때마다 ‘그림자 군주’가 암혈의 갑주를 재구축해 촉수들을 잘라냈다. 그러나 미처 피할 수 없는 촉수 하나가 그대로 팔에 휘감겼다.

우직!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 맥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린 팔을 따라 흑색의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그러나 ‘그림자 군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재빨리 그림자를 움직여 의수를 재구축하고 검은 피의 갑주를 덧씌웠다.

부서진 사상의 갑주를 수복하는 동시에 거리가 좁혀졌다. 아니, 좁혀졌어야 했다.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 불사공 프레데릭의 육체가 실체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참으로 덧없는 발버둥이구나, 아이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직전까지 데일의 앞에 있는 불사공이, 어느덧 등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웃고 있었다.

다시금 그의 주위에서 촉수들이 솟아 데일을 향해 내리꽂혔다.

일일이 쳐내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많다. 암혈의 갑주를 칼날의 형태로 뒤틀어도 그 전부를 잘라낼 수는 없다.

콰직! 콰직!

몇몇 촉수가 데일의 육체를 휘감아 나뭇가지처럼 부러뜨렸고, 그때마다 암혈의 피가 흩뿌려졌다. 그러나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데일이 무릎을 꿇는 일은 없었다.

육체가 부서지는 즉시 그림자의 의체(義體)를 채워 넣고, 그 위에 사상의 갑주를 수복해 덧씌우며 몸을 일으켰다.

부서질 대로 부서진 기계 장치의 이음새와 태엽 따위를, 흡사 누덕누덕 기운 외투처럼 끝없이 고쳐 쓰며.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두 군주의 싸움.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일방적 농락이었고, 데일이 보여주는 것은 추하기 이를 데 없는 발악 그 자체였다.

도망칠 수 없는 파멸 앞에서 무의미하게 펼쳐지는 발버둥.

“참으로 추하고 어리석다.”

그 모습을 보며 불사공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저 조금 힘을 가하는 것으로 무참히 깨져버릴 유리그릇 따위를, 어째서 어머니께서는…….”

바로 그때였다. 불사공이 무엇을 깨달았다는 듯 말을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이.

“어머니와 딸아이의 놀잇감을 자처하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네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딱하구나.”

불사공이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 모습을 기꺼이 즐거워하신다고 하니, 저 역시 마땅히 그 유희에 부응해야겠지요.”

그가 보기에, 데일의 존재는 당장에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유리그릇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째서 어둠의 모신과 그의 사랑스러운 딸이 기꺼이 그 유리그릇의 곁에 남기를 택했나. 바로 이것을 위함이었다.

“내가 기꺼이 너의 파멸을 지켜봐 줄 터이니.”

도망칠 수 없는 절망 앞에서, 포기를 모르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추악함과 어리석음.

이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촤아악!

다시금 데일의 팔다리에 《엘드리치》의 촉수가 휘감겼고, 그대로 사지가 뜯겨나갔다.

비로소 침묵 끝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흑색의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팔다리가 뜯겨나가는 즉시 그 자리를 그림자의 팔다리가 대체했고, 재차 암혈의 갑주가 데일의 의체에 덧씌워졌다.

그러나 물샐 틈 하나 없는 칠흑의 중갑(重甲)이어야 할 갑옷은, 어느덧 경갑이란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얄팍하고 초라해져 있었다.

끝없이 부서지고 수복하는 과정에 과정을 거듭하며, 착실하게 마모되고 있는 사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 꿇지 않고 있다.

그것이 더더욱 웃기고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오직 인간이기에 그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즐거움.

진정으로 옛 어둠의 어머니와 딸아이가 바라는 바를, 불사공 프레데릭은 비로소 이해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 격차 앞에서, 다 썩어가는 희망의 동아줄을 붙들고 늘어지는 저 추함.

그 우스꽝스러운 파멸이야말로, 어둠의 모신과 딸아이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즐거움이란 사실을.

그렇기에 쉽게 죽일 수 없다. 힘을 조절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그러나 결코 그릇을 깨트리지 않게.

촤아악!

“자, 아이야. 다시 일어나거라. 즐거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

끝없이 마모에 마모를 거듭해, 고갈되기 일보 직전의 사상(思想)을 쥐어짜고 있는 데일을 향해서.

마치 벌레의 팔다리와 마디마디를 하나씩 자르며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그렇다. 저 존재는 벌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딸이 바라는 것은 저 벌레가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처절함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벌레를 학대하는 어린 남자아이처럼 프레데릭이 웃었다.

손짓할 가치조차 없는 상대였다.

작센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

그림자 마탑의 정점, 나아가 《엘드리치》로서의 힘을 드러내는 것은 둘째 치고, 처음부터 그것은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조차 아니었으니까.

가학(加虐)의 집행이 시작되었다.

콰직!

다시금 촉수가 데일의 몸을 휘감고, 갑주째로 사지와 몸통을 부러뜨렸다. 뼈마디 하나하나를 잘게 부서뜨리듯. 갑주째로 체내의 갈비뼈와 장기들이 뒤틀리며 망가졌고, 데일의 입에서 암혈의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법사나 기사는 보통 사람처럼 쉽게 죽지 않는다. 하물며 데일처럼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존재일 경우, 그 집착과 의지는 더더욱 집요하리라.

쿠웅!

부서지는 육체를 필사적으로 수복하고 되돌리며…… 데일이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비로소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어떠십니까, 어머니.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

불사공 프레데릭이 다시금 되물었다.

콰직, 콰직!

그의 촉수로 데일의 몸을 휘감고 체내의 뼈마디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조각내며.

“이제 좀 마음에 드십니까?”

골절, 나아가 촉수가 육체를 압박하며 혈류를 방해하고, 생체 조직 곳곳을 괴사(壞死)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의 육체가 기동을 정지하는 일은 없었다.

부서진 육체를 끝없이 기우고 기우며, 누더기가 되어 있는 육체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딸아, 아직이니?”

프레데릭이 되물었다. 다시금 꿈틀거리는 벌레를 향해 고통을 가하며.

그러나 그의 되물음 속에서, 대답이 들려오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프레데릭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엎어진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 데일을 보며.

“어머니? ……리제?”

불사공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마치 놀이는 이쯤 하자는 듯이.

“아직도 더 놀고 싶니? 리제.”

그러나 그것은 결코 데일의 여동생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이 『검은 산양의 서』를 집필하기 위해 제물로 바친 딸의 이름.

그 이름을 듣고 데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바람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추하고 어리석은 발버둥을 멈추지 않으며.

“무엇이 그리 웃기지?”

프레데릭이 차갑게 되물었다.

“아직, 도……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엎드린 채, 데일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착각이라고?”

콰직!

다시금 불사공의 촉수가 데일의 육체를 짓밟았다.

“이것을 갖고 노는 것은 이쯤 하자꾸나.”

놀이가 끝나고 나서 마땅히 ‘그녀들’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 세계에는 아직도, 네가 갖고 놀 놀잇감들이 넘쳐나고 있지 않니.”

발밑을 따라 솟은 촉수들이 다발의 형태로 겹쳐지며, 그 끄트머리가 송곳처럼 시퍼런 서슬을 내뿜었다.

이 유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최후의 일격.

그 일격을 앞두고, 데일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이제 다 놀았지, 슈브?”

─ 무지무지 즐거웠어!

“……!”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이 듣기에 그것은 소녀의 천진하기 그지없는 끄덕거림이었다.

그러나 프레데릭에게 들리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딸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째서……?”

비로소, 프레데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 리제?”

겁에 질린 남자아이처럼, 프레데릭이 중얼거렸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데일을 향해서.

“놀이는 여기까지다.”

불사공의 촉수가 데일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푸욱!

끄트머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운 촉수가, 데일의 심장을 뚫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치사의 일격.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저항하는 데일의 육체가, 비로소 기동을 정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피해갈 수 없는 죽음.

그랬어야 했고, 바로 그때였다.

푸드덕!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까악! 까악!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까마귀들의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지럽게 내려앉는 흑색 깃털 속에서,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촉수가 심장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와 있는 아들의 곁에.

──죽음을 맞았어야 할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 * *

‘흑색공(Lord Black)’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불사공’이란 이름을 가진 작센의 시조 앞에서, 그 일족의 유지를 계승하는 후계자가.

“어째서…….”

그 모습을 보고 프레데릭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마치 그의 앞에서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처럼.

“어째서입니까?”

바로 그때, 흑색공 역시 입을 열었다.

“제 아들에게, 어찌하여 이런 가혹한 짓을 하셨습니까?”

적어도 데일의 기억 속에서, 그 어느 때와 비교할 바 없는 차가운 증오를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위대하신 작센의 시조이시여.”

“…….”

침묵 끝에 불사공 프레데릭이 고개를 들었다. 텅 비어 있는 그의 흑색 동공(瞳孔)이, 초점 없이 아버지와 아들을 향했다.

“보이지가…… 않는구나.”

프레데릭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리 옛 어둠의 어머니도,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이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그의 앞에 있는 후손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째서 보이지가 않지?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어둡지?”

그의 발밑에 놓여 있는 흑색 붕대를 뒤로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까?”

그 물음에 데일이 대답했다.

직전까지 그 육체가 갈가리 찢기고 부서져서, 심장마저 촉수에 뚫려 죽었어야 할 데일이.

“무엇을 말이지?”

“그녀가 보이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말입니다.”

데일에게 마땅히 찾아와야 할 죽음에서 벗어나, 일말의 상처조차 없이 멀쩡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백색 마탑주의 치유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와 백마법사’가 추구하는 사상은 달라도, 그 형태는 동일하다. 일찍이 흑과 백의 두 마탑이 하나였듯이.

삶과 죽음의 제어.

생명의 부재가 죽음이듯, 죽음의 부재는 생명이다.

그렇기에 흑색공이 ‘시기적절하게’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고, 아들에게 마땅히 찾아와야 할 죽음을 지워버렸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내가 네놈들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죽음의 개념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이자, 흑색 마탑의 정점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공교롭기 그지없는 타이밍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데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슈브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슈브의 침묵을 너무 복잡하게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그녀는 불사공께서 생각하시는, 그렇게 복잡하고 까탈스러운 이유로 모습을 감추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불사공 프레데릭이 애써 고개를 돌리고자 하는 진실을.

“──그저 제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은 겁니다.”

『검은 산양의 서』가, 자신의 의지로 저자가 아니라 ‘데일’의 곁에 있기를 택했다는 것을.

그 대답을 듣고 불사공 프레데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웃음이었고, 그러나 이내 몸을 젖히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에 차 있는 웃음이었다.

“감히, 감히, 거짓 작센의 찬탈자 따위가……!”

동시에 일대의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세계의 가장 늙은 괴물, 불사공에 맞서는 것은 더 이상 데일의 몫이 아니었다.

“물러나거라, 데일.”

또 하나의 작센에 맞서는 ‘작센 공작’이 아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등 뒤를 따라 여섯 장의 흑색 날개를 활짝 펼치며.

불사의 괴물에 맞서, 죽음의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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