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58화 (158/301)

158화

* * *

직전까지 치열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교회 측 부대의 기사와 마법사, 병사와 귀족이 가리지 않고 일제히 동작을 멈춘 까닭이다. 그들 위로 내리꽂히는 칼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남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직전까지 일대를 휘감고 있는 천상의 빛을 저물게 하고,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의 세계를 거느리고서.

그 정체를 이성적으로 확신할 증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데일의 몸에 흐르고 있는 작센의 피가, 나아가 그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슈브의 촉수가 미친 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데일의 앞에 있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 흑색공이 말하는 또 하나의 작센이자 ‘마계(Dark Land)’의 진짜 지배자란 사실을.

“……부대 전체에 명령을 내려라.”

그렇기에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요네스 경과 블랙아머 컴퍼니를 향해서.

“지금 당장 부대 전체를 뒤쪽으로 물리라고.”

“아, 알겠습니다, 대장!”

동시에 그에 마주하는 교회의 전투열이, 데일 측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작센의 프레데릭이시여.”

명령에 따라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양측 부대 전체를 뒤로하고, 그림자 군주가 말을 이었다.

마치 양쪽 부대의 대표자가 나서 마주하는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작센의 데일, 감히 일족의 시조 ‘불사공’을 이곳에서 뵙겠습니다.”

“호오.”

그의 앞에 있는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를 향해서.

“참으로 놀랍구나, 아이야.”

“마계에 있는 또 하나의 작센…… 《엘드리치》들이 비로소 침묵을 깨트린 것입니까?”

“아, 머지않아 곧 그럴 날이 찾아오겠지.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불사공 프레데릭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저 내가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것을 되찾기 위해 왔을 따름이니까.”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데일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 여느 때처럼 흑색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

“슈브…….”

“아아, 사랑스러운 나의 딸아.”

데일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불사공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의 그의 딸을 바쳐 창조했다고 일컬어지는 『검은 산양의 서』.

“부디 나와 함께 돌아가자꾸나.”

불사공이 말했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그저 그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는 슈브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것은 데일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고, 동시에 그것은 불사공조차 예외가 아니리라.

─ 어째서 내가 돌아가야 해?

바로 그때, 슈브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고, 불사공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 있지, 오빠. 나는 인간이 좋아.

그대로 슈브가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 장작더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추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어. 그러니까…….

두 팔을 뻗어 사랑스러운 듯이 데일의 목덜미를 휘감으며.

─ 인간을 버린 작센의 아이 따위에게, 이 이상의 흥미 따위는 생기지 않는구나.

어느덧 그곳에 있는 것은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성숙함과 기품을 갖춘 흑색 드레스 차림의 숙녀가, 커다랗게 솟은 흑색 산양의 뿔을 과시하며 그곳에 있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치맛자락 밑으로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꿈틀거린다.

“그것이 정녕 당신의 의지입니까, 검은 풍요의 어머니시여.”

직전까지 딸아이를 부르는 것 같은 상냥함이 사라지고, 불사공 프레데릭이 되물었다.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흡사 어린 남자아이가, 마치 어머니의 애정 어린 대답을 갈구하듯이.

대답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흑색 붕대로 가린 그의 눈동자를 대신해 그림자가 눈을 떴고, 불사공 프레데릭의 눈에 비치는 것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나 숙녀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촉수들의 군체로 이루어져 있는 이계의 흉물.

그러나 데일에게 비치고 있는 것은 여느 때의 슈브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

불사공 프레데릭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그의 눈동자를 휘감은 흑색 붕대를 풀었다.

일찍이 그림자 성녀가 그러했듯, 그 너머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텅 비어버린 검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슈브의 결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게서 『검은 산양의 서』를 되찾으시려는 겁니까?”

“감히 그 이름을 함부로 담지 말아라.”

불사공 프레데릭이 차갑게 대답했고, 동시에 그의 발밑을 따라 칠흑의 어둠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존재는 처음부터 나의 딸이자 어머니였고, 그 아이와 그녀께서는 기꺼이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

그에 맞서 데일이 펼치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암혈의 갑주가 액체 금속처럼 그 형태를 뒤틀었다.

동시에 불사공 프레데릭의 ‘검은 눈동자’가 데일을 주시했다.

칠흑의 동공.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마땅히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을 내놓아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기 주제를 알지 못하는 가짜 따위가, 참으로 가소롭구나.”

불사공 프레데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그가 거느린 어둠의 세계가, 갈가리 찢어지기 시작했다.

어둠을 찢고 벌어져 있는 이계의 틈새에서 ‘외눈박이 신들’의 눈동자가 비로소 지상을 굽어보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들이 천상의 틈새를 찢고, 그 밑의 작고 초라한 존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돋보기로 커다란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개미 떼를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천상의 주시자.

광기의 미사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존재들을 마주하는 것으로 정신이 무너지고, 아이처럼 울고 불며 발광하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유아 퇴행을 일으키며, 태아처럼 몸을 구부리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사람이 개미를 사랑하지 않듯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었다.

그리고 그 신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달려 있었다.

데일 역시, 바로 그 천상의 틈새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저 그것을 마주하는 것으로 정신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무니없는 압박감.

그 속에서, 데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파멸 앞에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추함과 어리석음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고 했지.”

그의 곁에 있는 소녀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응!

슈브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불사공의 손에 의해 펼쳐지는 광기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럼 나랑 약속 하나 하자.”

그녀를 향해 데일이 조용히 결의를 굳혔다.

“나와 내 사람들을 지켜줘.”

─ 무엇을 대가로?

어느덧 숙녀의 모습으로 성장해 있는 슈브가 되물었다. 옛 어둠과 검은 풍요의 어머니로서.

“최후의 최후까지,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발버둥을 멈추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그저 자기 자신을 그녀의 유흥거리로 자처함으로써.

“마지막까지 나는 절대로 인간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데일이 말했다.

“Iä Shub-Niggurath(이아 슈브 니구라스).”

─ 아아, 참으로 사랑스럽구나! 인간이란 어쩜 이리도 늠름하고 어리석으며, 사랑스러운 존재일까!

어둠의 모신(母神)이 황홀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슈브의 팔이 상냥하게 데일의 뺨을 휘감았고, 그대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지상을 굽어보고 있는 천상의 주시자…… 외눈박이 신들의 촉수가, 일제히 데일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개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짓눌러 죽이는 것과 같은 행위이리라. 서클이나 오러 따위는 그 우주적 공포 앞에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테니까.

바로 그때였다.

─ 물러나라, 천상의 옛 것들아.

슈브가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흑색의 부채를 과시하듯 팔랑이며.

─ 이곳은 그대들에게 허락될 무대가 아니니.

동시에 슈브의 치맛자락 속에서 촉수들이 일제히 솟아나기 시작했다.

흑색 촉수들이 휘몰아치듯 솟아오르며, 천상의 주시자들을 향해 일제히 내리꽂혔다.

어둠의 모신으로서,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감히 비교를 불허하는 압도적 위압감이 휘몰아쳤다.

주시자들이 흩뿌리고 있는 광기와 공포마저 무위로 되돌릴 정도의 힘.

슈브의 촉수가 외눈박이 신들의 망막 속으로 파고들었고, 눈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동공이 미친 듯이 좌우로 회전하며 날뛰었고, 머지않아 눈동자가 하나둘씩 도망치듯 이계의 틈새 너머로 사라졌다.

데일이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아무래도…….”

그 모습을 보며 불사공 프레데릭이 싸늘하게 웃는다. 그림자 속에서 부릅뜨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눈동자들을 움직이며.

불사공이 손을 휘저었고, 어둠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어둠의 소용돌이 앞에서, 데일을 휘감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덧없이 바스라졌다.

암혈의 갑주가 산산이 조각나며 깨지고, 그 밑에 있는 데일의 육체가 드러났다.

“어머니의 뜻은 이해하겠으나, 그대의 여흥을 감당하기에 ‘인간의 그릇’은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듯하네요.”

불사공이 조롱했고, 동시에 데일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슈브가 그의 능력을 펼쳤고, 슈브가 힘을 사용하는 데 소모되는 것은 오롯이 데일의 흑색 마력이었다.

7서클의 백마법사와 호각지세를 벌일 정도의 데일이, 고갈되고 있는 서클을 쥐어짜며 고통스럽게 호흡을 내쉬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데일로서는, 방금 불사공이 보여준 손짓 하나조차 막아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릎 꿇고 있는 데일을 조소하며, 그 앞에 있는 이계의 흉물을 향해 불사공이 말했다.

사람이길 저버리고 죽음마저 속이는 존재 《엘드리치》로서.

─ …….

“아직이야, 슈브.”

슈브가 침묵을 지켰고, 바로 그때였다.

“이제는 나의 약속을 이행할 차례니까.”

데일이 몸을 일으켰다.

“너에게, 파멸 앞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의 추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겠다고 했지.”

말라비틀어진 걸레에서 몇 방울의 물을 짜내듯이, 필사적으로 심장의 서클과 열기관을 기동하며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그럴듯하게 지껄여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찬탈자야.”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로서, 불사공 프레데릭이 조소했다.

“나의 피를 훔치고, 나의 사상을 훔치고, 나의 벼슬을 훔쳐 너의 가죽을 감싸도…… 너는 결국 나의 모방이자 열화품에 지나지 않는 가짜다.”

그의 그림자를 따라 끔벅거리고 있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발작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좌우,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이 자리에서 증명해 드리지요, 어머니. 그리고 나의 딸아.”

동시에 불사공의 텅 비어 있는 ‘검은 눈동자’가 데일을 응시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덧없고 하찮으며, 깨지기 쉬운 그릇에 불과한지를.”

다시금 불사공의 발밑을 따라 칠흑의 어둠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피스메이커를 지지대 삼아 데일이 몸을 일으켰고, 슈브의 촉수가 데일의 육체를 휘감았다.

부서진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암혈의 갑주이자 ‘검은 죽음’이 다시금 그의 육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존재를 자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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