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54화 (154/301)

154화

* * *

네 개의 성채가 있었다.

일찍이 작센 공작령과 마왕령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가 소수의 요충지와 도하 지점으로 방어되듯이, 마계에서 마왕령으로 넘어오기 위해 대규모 군세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 고위 마족이 마왕령 내의 마족들을 통솔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 네 성채 중 하나 내지는 요새마다 하나 이상의 고위 마족이 주둔하고 있겠지요.”

그렇기에 데일은 마왕령과 마계 사이의 ‘대규모 이동’이 가능한 네 곳의 전략적 요충지, 나아가 그 위에 세워 올린 성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찍이 용사로서 마왕을 토벌하고 제국군이 축성한 옛 요새였고, 제국군이 물러나고 버려진 지금에 와서는 필시 마왕령 내 마족들의 거점이 되어 있을 테니까.

이 요새와 요새가 감시하고 있는 길목을 제외하고, 적어도 ‘마계’에서 마왕령으로 넘어올 수 있는 도로는 없다.

동토 속에서 자칫 발을 잘못 디디는 것으로, 크레바스(Crevasse)에 빠져 부대 전체가 몰살당하는 일이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것이 당시의 지옥이었으니까.

“일리가 있는 생각이네요.”

제2차 십자군 전쟁의 수뇌가 모여 있는 그곳에서, 데일의 말에 키아라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마왕을 토벌할 당시, 마족 대이동 급의 대규모 병력이 일제히 기동할 수 있는 요충지를 파악하고 제국군이 설립한 요새들이지요.”

“우리 자랑스러운 제국과 용사께서 마왕과 일당을 토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승리를 상징하는 성채가 마족들의 손에 떨어져 있다니. 참으로 통곡할 노릇입니다.”

황녀의 말에, 마스터 템플러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요새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마왕령을 개척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작센의 의무였지요.”

“그래서 지금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향해 노골적으로 적의를 감추지 않는 그 모습에, 데일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당시 아버지의 대에, 작센의 병력 하나로 네 곳의 성채 모두를 수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 공포의 위명을 자랑으로 삼는 천하의 작센이, 필요할 때는 겁쟁이를 주저하지 않는구나!”

또 하나의 마스터 템플러가 조롱을 감추지 않았다.

“대규모 병력 이동 외에도 요새를 우회하는 소수의 마족 게릴라가 끝없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아도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공작령에 더해 마왕령 전체를 감시하는 것은 저희 작센 하나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었지요.”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개방 정책을 펼치고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기 전까지, 고립주의를 자처하는 작센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영지.

“부디 너무 핏대를 세우지 마시길 바랍니다.”

덤덤하게 설명을 마치고 나서, 데일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뤼지냥 형제님께서 맞이한 ‘순교’에 대해 그대들도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네놈……!”

“부디 그쯤 하시지요.”

바로 그때, 노기를 감추지 못하는 마스터 템플러들을 향해 키아라 황녀가 입을 열었다.

“화, 황녀님!”

“말했다시피,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성전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부디 사사로운 감정이나 책임 전가는 접어두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쳐주시지 않겠어요?”

“…….”

“어쨌거나 속전속결의 결착을 바랄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알기 쉽습니다.”

황녀의 말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정적 속에서 다시금 데일이 입을 열었다.

“네 개의 요새를 순차적으로 손에 넣고, 백색 마탑이 자랑하는 성유물 ‘빛의 장벽’을 구축하는 것이지요.”

“작센의 배교자 놈들 따위가, 감히 여신의 성유물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제발 부디 그 입 좀 닥쳐주실래요? 일곱 살 먹은 아이처럼 말끝마다 꼬투리 잡지 마시고.”

다시금 마스터 템플러가 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레이디 스칼렛이 끼어들었다.

“레이디 스칼렛, 그대가 우리 뤼지냥 형제에게 자행한 저주받을 악행을 여신께서 잊어버리실 것 같소?”

마스터 템플러가 질 수 없다는 듯 되받아쳤고, 레이디 스칼렛이 차갑게 조소했다.

“산 채로 쇠갈고리에 매달려, 정육점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기시지요.”

노골적으로 과시하듯 그녀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바로 그때였다.

“거듭 말씀드렸듯이, 그쯤 하라고 했습니다.”

칠흑의 촉수가 데일을 휘감았고, 어느덧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힘을 과시하며, 그림자 군주가 일대를 어둠의 홍수 속으로 수몰시켰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냉기와 어둠이 일대를 장악했고 침묵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십자군 수뇌의 대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어, 어떻게 아바타를……!”

마법사여야 할 데일이 보여주는 초상의 능력에,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대다수 영주와 기사들.

마찬가지로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동시에 전투태세로 맞서려는 교회와 일부 호전적 대표자들.

동시에 데일이 그의 아바타를 해제하며, 덤덤히 말을 잇는다.

“마왕령 내에 무슨 위협이 잠들어 있을지 모르는 이상, 우리는 하나의 주력 부대로 뭉쳐 차례대로 성채 공략을 감행할 겁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그 상황에서 작전의 상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력을 집중해 순서대로 제1부터 제4 성채까지 함락시킬 것이며, 그 후 네 개의 요새를 잇는 ‘빛의 장벽’을 설치할 겁니다. 그 후 마계와 마왕령 사이의 길목을 가로막고 나서, 마왕령 내에 있는 잔당 토벌로 비로소 이 영지는 ‘제국의 땅’이 되겠지요.”

“전력을 집중하겠다고?”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린 것은 제7황자 모드레드였다.

“이 정도의 대부대를 모아놓고, 마왕도 없는 이 빌어먹을 땅에서 굼벵이처럼 꾸역꾸역 움직일 셈이냐?”

“말했듯이, 우리는 아직 고위 마족의 위험에 대해 가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병력의 숫자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제국 제일의 천재님.”

모드레드가 말을 잇는다.

“우리는 네 개의 부대로 병력을 나누어, 일제히 마왕령의 4개 성채를 공략할 거다. 내 말에 이의 있는 새끼?”

결코 데일의 주도대로 작전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듯이.

“황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천하의 ‘검은 공자’는 군사 병법의 천재라더니, 결국에는 작센의 이름을 빌린 겁쟁이에 불과했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모드레드가 말하기 무섭게, 작센과 적대적 사이에 놓여 있는 영주들이 일제히 조롱을 터뜨렸다. 그 조롱 속에서 데일은 덤덤히 침묵을 지켰다.

‘이런 답도 없는 콩가루 새끼들.’

당장에라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그 말을 참고, 데일이 대답했다.

“그럼 뭐, 부디 그렇게 하시지요.”

그야말로 남의 일처럼.

* * *

전쟁이 시작되었고, 크게 네 개의 부대가 각각의 요새를 향해 출정을 시작했다.

각각 제7황자 모드레드, 적색 마탑, 교회, 그리고 작센 가(家)가 기수를 담당하는 네 개의 부대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최고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제1요새의 공략은 모드레드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데일의 몫으로 공략하게 될 요새는 그중에서 비교적 가장 허술하다고 여겨지는 제4요새였다.

* * *

그 시각, 모드레드를 비롯한 제국 유수의 제후들이 진격하고 있는 제1요새.

요새의 망루에 서 있는 것은 흑색 로브 차림의 남자였다. 로브 밑으로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고위 마족.

마계의 마법사, 일찍이 그림자 마탑에서 ‘또 하나의 작센’이 가진 사상을 계승하는 그림자술사.

그리고 마왕 발로르를 비롯한 대규모 마족들이 그들 《엘드리치》의 잔혹함과 악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을 때, 그 남자 역시 마왕을 따라 함께 했다.

‘그림자의 악마’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들의 광기로부터 벗어나 필사적으로 새 터전을 찾아 살아남기 위해서.

이곳 마왕령은 그들에게 있어 생존의 터전이었다. 다시는 그 지옥 같은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시에 제국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그들 종족이 살아가기 위한 대지.

바로 그때였다.

남자의 발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에서, 흑색의 촉수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대로 발밑에서 솟은 촉수가 고위 마족, 그림자술사의 육체를 휘감듯 옥죄었다.

“……!”

당혹 속에서 재빨리 그가 그림자를 움직이려 했으나, 그에 앞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 아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남자가 촉수의 포박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린 남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흑색 붕대로 눈동자를 칭칭 감고 있는 남자아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고위 마족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 어떻게……!”

“나의 제국에서 도망치는 겁쟁이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나.”

어린 남자아이가 말을 잇는다.

“마침 이곳에, 꼭 되찾아야 할 나의 ‘딸아이’가 제 발로 찾아오고 있더구나.”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고 남자가 경악 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림자 군주’시여……!”

그림자 군주. 그 말에 남자아이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이미 용서받기에는 너무나도 때가 늦어버렸구나, 아이야.”

동시에 일대의 그림자가 ‘눈’을 떴다. 그림자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들이 동공을 좌우로 움직이며 사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에게 기회를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말씀하십시오, 부, 부디 그림자 군주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내 앞으로 ‘거짓 작센의 핏줄’을 데려오거라.”

그림자 군주가 말했다.

“감히 나의 딸아이를 빼앗고, 가짜 주제에 ‘그림자 군주’를 사칭하고 있는 겁도 없는 찬탈자를.”

그 말에 후드 차림의 남자가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듯 고개를 조아렸다. 나아가 그를 휘감고 있는 촉수가 그림자 속으로 되돌아가기 무섭게, 남자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흑색 붕대로 눈을 가린 어린 남자아이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황금의 핏줄, 결코 잊을 수 없는 숙적의 혈통을 향해 싸늘한 증오심을 벼리며.

* * *

네 개의 부대로 나뉘어 있는 십자군의 진격은 생각 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니, 너무나도 순조로워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얼어붙을 듯 시린 냉기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마족 게릴라들이 데일의 부대 앞을 가로막는 일 따위는 없었다. 타 부대와 주기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전령(傳令)들의 소식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데일이 그들이 노리고 있는 제4요새에 다다랐을 때였다.

요새는 텅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

애초에 마족의 잔당이 4개 요새 모두를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꽝이 당첨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곳이리라.

그로부터 얼마 후, 제1 요새를 공략하고 있는 부대의 전령이 다급히 데일의 부대를 향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전령의 상태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이처럼 울어 재끼기 시작했다. 데일이 전령을 진정시키며 까닭을 물었고, 전령이 대답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신(神)……!”

전령이 중얼거렸다.

“시, 신이 있었습니다! 신이! 전지하고 전능하시며, 위대하신 천상의 주시자가! 히히히!”

“신이라고? 시스티나 자매신을 말하는 것이냐?”

“자, 자매신? 하, 하하!”

전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매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 아아, 있지요. 신! 신께서는 정말로 존재했습니다!”

그야말로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그러나 그 신(神)께서는 결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령의 이목구비에서 흑색의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일찍이 슈브의 촉수가 흩뿌린 것과 같은 암혈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데일과 그의 부대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게 될 복병의 존재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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