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 *
“자매신의 자애와 자비조차 네놈의 더럽혀진 영육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마스터 템플러의 핏빛 날개를 따라, 헤아릴 수 없는 피의 칼날들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없이 내리꽂히고 있는 피의 칼날들 앞에서, 그림자 군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팔을 뻗었고, 팔을 휘감고 있는 ‘검은 피의 갑주’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피의 죽음, 암혈의 갑주에 깃들어 있는 진짜 의미를 자각하며.
그림자 군주, 데일을 향해 휘몰아치는 마스터 템플러의 ‘피’를 향해서.
“……!”
머지않아 그림자 군주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마스터 템플러가 경악에 숨을 삼켰다.
그것은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는 레이디 스칼렛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데일의 육체를 찢어발겨야 할 피의 칼날이, 일찍이 그림자 군주의 갑주처럼 암혈(暗血)로 물들기 시작했다.
흑색의 피로 물들고 나서 그대로 그림자 군주의 갑주 위로 내리꽂혔다.
데일을 찢어발겨야 할 핏빛 칼날이 아니라, 처음부터 갑주 일부였다는 듯 녹아들고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피 칠갑의 마스터 템플러가 재차 그의 혈액을 투사체로 바꾸며 내리꽂았다.
그러나 아무리 공격을 거듭해도 그 혈액의 칼날이 데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때마다 피가 썩고 검게 물들어 ‘그림자 군주의 일부’로 거듭날 따름이다.
“어떻게……!”
“이교도의 피를 뒤집어쓸 때마다, 우리의 영이 더더욱 고결하고 청결해진다고 했나?”
그대로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땅을 박차고 거리를 좁힐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검은 죽음의 갑주’와 함께.
“그럼 내가 네 피를 집어삼킬 때마다…….”
데일이 팔을 뻗었다. 동시에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에서, 슈브의 그것과 같은 칠흑의 촉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네가 이교도들의 피로 쌓아 올린 영육의 고결함과 청결함 모두가, 덧없는 헛짓거리가 되겠네.”
“웃기지 마라, 이 저주받을 배교자 놈이!”
촤아악!
“……!”
흑색 피의 촉수가 마스터 템플러를 향해 쇄도했고, 마스터 템플러가 그의 손에 들린 피의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혈검(血劍)이 휘몰아치는 촉수에 맞부딪치기 무섭게…….
마스터 템플러의 검을 구성하고 있는 혈액의 칼날이, 검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칼끝에서 시작해 칼자루를 향해, 나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과 팔목을 휘감듯이.
“아, 아아아아!”
경악과 함께 그대로 칼자루를 놓고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아아, 아아아아악!”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혈액의 갑주가, 시커멓게 썩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육체를 휘감고 있는 부패 마법처럼. 일찍이 데일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처럼 뒤바뀌고 있었다.
“그 저주받을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몰골을 보아하니, 구제받기는 글렀네.”
“이, 이 망할 배교자 놈이!”
고통 속에서 마스터 템플러가 재차 팔을 뻗었다. 말 그대로 최후의 기력을 쥐어짜듯이.
“여신이여, 부디 저에게 악에 맞설 힘을 내려주소서!”
바로 직후, 스칼렛이 펼친 사상의 세계 속에서 알 수 없는 섬광이 빛을 내뿜었다.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빛의 기둥이 내리꽂혔다. 그것도 그림자 군주가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해서.
천상의 포격이 그림자 군주의 존재를 뒤덮듯 휘감았고, 일순 혈액의 갑주를 잠식하고 있는 ‘검은 피’가 증식을 멈추었다.
“하, 하하!”
닿는 것들 일체를 소금 기둥으로 바꾸어버리는 여신의 진노. 바로 그 진노가 그림자 군주, 저 사악하기 그지없는 작센의 배교자를 벌해준 것이다.
“찬미하라, 자매신의 자애와 자비를 알지 못하는 저주받을 배교자야!”
고통 속에서 혈액의 갑주를 재구성하며 마스터 템플러가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위성 포격처럼 끝없이 내리꽂히고 있는 빛의 기둥 속에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여신의 진노 앞에서 그대로 소금 기둥이 되어야 할 그가, 일말의 상처조차 없이 덤덤하게.
“어, 어, 어떻게……!”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템플러가 숨을 삼켰다.
“갑주가 갑주 노릇을 해야 갑주지.”
데일이 덤덤히 중얼거렸다. 그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림자 군주의 갑주에 깃들어 있는 ‘검은 죽음’의 의미를.
빛의 기둥 속에서, 그림자 군주가 걸음을 옮겼다. 겁에 질린 채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피 칠갑의 천사를 향해서.
“아무래도…….”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며,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여신께서는 어느 쪽이 ‘옳은 주장’을 하고 있는지 결정을 내리신 것 같네요.”
‘검은 공자’가 보여주는 가공할 모습에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입회자들을 향해.
“마스터 템플러, 뤼지냥의 기께서는 기꺼이 그의 ‘순교’를 통해 여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셨으며…….”
다시금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그의 고결한 희생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저항할 의지조차 갖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피 칠갑의 기사를 향해서.
“아, 아아아…….”
바로 그때였다.
“──이 순교자 결투는 무효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7서클의 백마법사, 보레누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 작센의 배교자는 사악한 술수로 뤼지냥 형제의 신앙과 여신의 뜻을 우롱했으며, 그렇기에 그의 영(靈)에는 순교자의 자격이 없음을 포고하노라!”
동시에 그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일곱 개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7서클의 백마법사, 오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다섯 마법사를 제외하고 ‘마법사가 도달할 수 있는 사실상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영역.
동시에 보레누스의 발밑을 따라 순백의 대지가 ‘스칼렛의 세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구름 위의 천상(天上)을 보는 것 같은 풍경이 일대를 휘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후후, 천국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상상력이란 늘 시시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법이지요.”
보레누스에 맞서 데일의 우군(友軍)을 자처하는 것은 무척이나 뜻밖의 존재였다.
그 풍경을 보고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조롱을 내뱉었다.
“새들이 지저귀고, 금빛 태양이 내리쬐고 있고, 여신의 감시 속에서 시시한 찬송이나 읊어대는 영생의 세계라니…… 그곳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요?”
레이디 스칼렛이, 그림자 군주의 곁에서 그녀의 핏빛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지옥에 대해 우리가 갖는 상상이란 참으로 장엄하고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지요.”
천장을 따라서 가득 늘어서 있는 쇠갈고리,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고깃덩어리들을 뒤로하고.
“유감스럽게도 이 이상 교회의 헛소리에 놀아나줄 여력은 없답니다.”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덧붙여 저는, 부대를 물리는 것이 옳다는 데일 공자님의 뜻에 동조하고 있답니다.”
“…….”
“어머, 이제야 절 좀 다시 보게 되셨나요?”
그림자 군주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 되물었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그래, 역시 비로소 여신의 배교자가 그 추악한 속내를 드러냈구나, 이 저주받을 적색의 탕녀야!”
보레누스가 소리쳤고, 동시에 그의 백색 마력이 ‘마스터 템플러’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대로 데일과 스칼렛, 보레누스와 마스터 템플러의 2차전이 시작되려 할 때였다.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말하지 않았나요, 교회의 헛소리에 어울리는 것은 여기까지라고.”
레이디 스칼렛의 존재가 무너져 내리며, 헤아릴 수 없는 박쥐 떼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레이디 스칼렛의 혈류 속 액상 조직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피에 잠들어 있는 기억과 힘을 꺼내며.
적색 마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위대한 일족의 수장, 핏빛공의 여동생. 동시에 제국을 지배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뱀파이어(Vampire).
“아아, 아아아아악!”
바로 그때, 마스터 템플러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혈액의 갑주가 마치 흡착기에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핏빛의 뱀파이어를 향해.
콰직!
혈액의 갑주, 나아가 그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피가 일제히 흡수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경악하며 보레누스가 재차 백색 마력을 생성하려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림자 군주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레이디 스칼렛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노리고. 설령 그가 7서클의 백마법사라 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스릉.
“보레누스 형제님, 부디 멈추십시오.”
어느덧 칠흑의 마검 ‘기아’가 그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전투에서 활약할 것을 전제로 수행하지 않는 마법사. 그중에서도 기사들을 보조하는 데 장점이 있는 백마법사의 경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아, 아아아……!”
레이디 스칼렛이 교성을 내지르며 마스터 템플러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생명 그 자체를 탐하듯이. 피가 빠져나가고, 어느덧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텅 비어버린 사람의 껍데기였다.
다시금 박쥐 떼가 일대를 휘감듯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보레누스가 펼치고 있는 천상의 세계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박쥐 떼.
그 속에서, 레이디 스칼렛이 있었다.
“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맛이네요.”
입가 위로 솟은 송곳니를 과시하듯 드러내며, 입술에 묻어 있는 핏방울을 핥으며.
“청결한 영혼과 육신처럼 맛없는 음식은 드물지요. 꼭 채식주의자가 돼버린 기분이에요.”
마치 돼지나 소의 고기를 품평하듯이.
“그럼 순교자 결투의 막이 내린 것 같네요. 우리의 ‘검은 공자’께서는 뤼지냥 형제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몇 가지 사소한 잡음이 있기는 했으나, 그 정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자, 부디 그 지루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천국’을 좀 치워주시겠어요?”
보레누스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를 향해,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조롱했다. 나아가 이곳에 있는 입회자 중 누구도 감히 그녀의 말에 거스를 수 없었다. 보레누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 * *
그 직후, 순교자 결투를 통해 ‘여신의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대 마족 동맹의 부대 전체가 기수를 돌렸다.
뤼지냥의 기는 여신의 뜻을 가리기 위한 순교자로서 그 희생이 기억되었으며, 보레누스 사제의 이름으로 축복이 내려졌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제1차 십자군 전쟁’의 덧없는 결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의 이름 아래 대 마족 동맹의 전력(戰力)을 보강하기 위한 포고령이 제국 곳곳에 떨어졌다.
7서클의 백마법사 보레누스가 백색 마탑에 열정적으로 대 마족 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 뜻을 받아들여 천상공이 직접 ‘성전(Crusade)’을 포고했다.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는 대의 아래, 침묵하고 있는 제국의 강자들이 하나둘씩 ‘작센의 마왕령’을 향해 결집하기 시작했다.
제2차 십자군 전쟁의 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