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 *
“어떻게 아바타를……!”
그림자의 적, 적색과 백색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데일이 비로소 그의 갑주를 드러냈다.
암혈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아바타를 펼치는 것이 곧 데일이 ‘그림자 군주’란 사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데일이 펼치는 사상의 세계가 곧 용사의 정체와 직결되지 않듯이.
그럼에도 그 행위가 갖는 의미 자체는 결코 폄하될 수 없었다. 보통의 마법사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레귤러의 경지.
사상의 세계를 가지는 마법사가, 동시에 사상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
“마도서의 아바타…….”
그 모습을 보며 레이디 스칼렛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고위 마법사로서 데일이 가진 능력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으니까.
“역시,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제국 제일의 천재란 이름이 울겠지요.”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흥미를 감추지 않고 있다.
“벌써 ‘검은 공자’의 명성과 재능을 듣고 질투심을 감추지 못할 레이가 가엾어지네요.”
레이 유리스, 적색 마탑의 후계자로서 맞서게 될 훗날의 적.
“악…….”
그리고 이 상황에 경악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7서클의 백마법사, 보레누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악, 악의 화신이다!”
보레누스가 광기 어린 목소리로 데일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자매신의 자애와 자비를 저버린 배교자의 갑주(甲冑)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이다! 당장에라도……!”
동시에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로서, 그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일곱 개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 역겨운 악의 뿌리를 뽑고 여신의 빛으로 정화하기 위해서.
바로 그때였다.
화르륵!
보레누스의 백색 마력이 휘몰아치기에 몇 발자국 앞서, 화염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대 마족 동맹 수뇌부가 모여 있는 막사의 풍경이 뒤틀렸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사상의 세계.
“아, 백색 마탑의 시녀께서 참으로 잘도 지껄이시네요.”
바로 그 세계의 여신(女神)을 자처하며, 레이디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이자 그 이상의 ‘비밀’을 가진 제국의 강자로서.
“지금 우리는 ‘여신의 뜻’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순교자 결투를 치르는 와중이 아니었나요?”
“저 모습을 보고도 감히 순교자란 말이 나오는 것이오, 레이디 스칼렛!”
7서클의 백마법사 보레누스가 질 수 없다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아무래도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적색의 마녀, 레이디 스칼렛! 아무리 그대가 제국의 대행자라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오!”
바로 그때였다.
툭.
스칼렛의 세계 속에서, 무엇이 데일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몇 방울의 액체였다.
후두둑.
그리고 그 액체가 이내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살가죽을 벗기고 육골(肉骨)이 드러나 있는 고깃덩어리들이, 천장의 쇠갈고리 위에 매달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이라고 생각했다. 도축장. 아니었다.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쇠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끝없이 피를 흘리며, 그녀의 세계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불과 피의 세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나요?”
레이디 스칼렛의 세계, 그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혈육의 꽃이 일대를 휘감았다.
“감히 백색 마탑의 수퇘지 따위가, 참으로 잘도 지껄이네요.”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존재들에게 있어 사람이란 어느 의미에서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과도 다르지 않으리라. 사람이 짐승을 잡아 고기를 탐하듯이…….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가 속으로 송곳니 하나가 시퍼렇게 서슬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겁박에 7서클의 백마법사 보레누스가 숨을 삼켰다. 설령 서클의 개수가 같다고 해도 그것이 곧 마법사로서의 동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 그럼 모두가 입회하고 있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순교자 결투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미소 지었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보레누스 형제님.”
바로 그때였다.
마스터 템플러가 그의 백색 서코트를 흩날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자매신의 자애와 자비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으며, 저는 우리의 여신께서 사악한 ‘검은 공자’에게 그녀의 진노를 내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뤼, 뤼지냥의 기……!”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마스터 템플러가 성호를 내리그으며, 그의 체내에 휘몰아치고 있는 오러를 폭발시켰다.
레이디 스칼렛이 세워 올린 콜로세움 속에서, 두 아바타 능력자들이 서로를 마주하며 대치를 시작했다.
빛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고 나서 마스터 템플러의 아바타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죽여라.”
핏빛의 갑주였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피로 덧칠해져 있는 피 칠갑의 기사. 처음에는 갑주 위로 덧씌워진 피라고 생각했다.
“여신께서 그녀의 사람들을 가려낼 것이니.”
아니었다. 혈액의 덩어리 그 자체가, 액체처럼 꿈틀거리며 갑주의 형태로 응고되고 있었다.
촤아악!
동시에 마스터 템플러의 등 뒤로 두 장의 핏빛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혈액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사가 그의 검을 고쳐 잡고 있었다.
마스터 템플러, 템플 기사수도회의 사상.
“나의 성스러운 갑주와 날개가, 추악하고 더러운 이교도의 피로 더럽혀질 때마다…….”
그들의 순백 위로 덧씌워진 이교도의 피.
“여신을 향하는 나의 영육(靈肉)은 더더욱 순결하고 깨끗하며, 고결해질지니.”
마스터 템플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실로 중요시해야 할 것은 영의 청결이요, 육신의 청결함이 아닐지니. 배교자들의 피로 나의 갑주와 육신이 더럽혀지고 추악해질수록, 더더욱 나의 영이 깨끗해짐을 기뻐함이 옳으리라.”
피로 쌓아 올린 기사, 나아가 그 사상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피였다.
도무지 백색 마탑과 교회의 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잔혹함의 아바타. 동시에, 그것이 바로 그들 템플 기사수도회가 갖는 사상의 실체였다.
그들의 손에 묻게 될 피와 추악함마저 여신을 향하는 신앙의 일부라 믿어 의심치 않는 광신자들.
“후후, 참으로 아름답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모습이네요.”
그 모습에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조소를 흘렸다.
피의 갑주.
그리고 암혈(Black Blood)의 갑주.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직 피로써 굴러가는 법이라고 했지요. 아아,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네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레이디 스칼렛이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들의 순교자 결투를 지켜보고 있는 동맹의 입회자 몇몇이,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시작했다.
피의 기사가 땅을 박찼다. 마찬가지로 흑색의 피를 육체에 휘감고 있는 그림자 군주를 향해서.
카앙!
데일이 칠흑의 마검 ‘기아’를 꺼내 그의 일격을 맞받아쳤고, 동시에 암혈의 갑주가 액체 금속처럼 꿈틀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솟아 있는 꼬챙이가 그대로 마스터 템플러를 향해 내리꽂혔다.
동시에 마스터 템플러를 휘감고 있는 혈액의 갑주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데일의 거울처럼.
‘호오.’
카앙!
혈액으로 이루어져 있는 칼날이 교차했고, 그대로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마스터 템플러의 등 뒤로 솟은 피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촤아악!
펼쳐진 피의 날개를 따라, 흡사 액체 금속처럼 경화되어 있는 꼬챙이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화살 세례를 내리꽂는 것 같은 피의 칼날들이었다.
휘몰아치는 피의 칼날에 맞서 데일이 땅을 박찼다.
“피, 피다! 이교도들의 피가 내 육체를 더럽힐 때마다, 나의 영은 더더욱 고결하고 청결해질지어니!”
이교도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쌓아 올린 마스터 템플러의 사상. 신의 이름 아래 헤아릴 수 없는 피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광신자의 신념.
“피를 흘리게 해라, 모두 죽여라! 여신께서 그녀의 사람들을 가려낼 것이다!”
지금,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피를 흩뿌리며 광신에 차서 부르짖는 마스터 템플러를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그렇담 지금, 데일을 휘감고 있는 이 암혈의 갑주는 무엇일까?
어째서 『검은 산양의 서』는 그녀의 촉수로 데일의 육체를 휘감고, 이와 같은 형태의 아바타를 제공해 주었을까. 어째서 이 아바타를 일컬어 ‘그림자 군주의 갑주’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 흑색의 피가 의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지?
데일이 되물었다.
그것은 절대로 가볍지 않은 물음이었다.
설령 그것이 마도서의 힘을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데일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아바타가 ‘데일의 사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흑색의 피로 이루어진 갑주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피란 무엇이지?”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되물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저마다 ‘피’에 대해 그들의 신념을 갖고 있다. 지금, 데일이 무장하고 있는 이 갑주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기름이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대답했다.
“그리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물어볼 경우, 여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상징이라 대답하겠지요.”
그녀의 말을 듣고 데일이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다물고 나서,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도 웃기느냐, 작센의 배교자야.”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마스터 템플러가 말했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혈액의 갑주를 뒤로하고.
비로소 데일이 휘감고 있는 흑색 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까닭에.
피는 적혈구가 산소와 결합함으로써 ‘핏빛’을 머금게 되는 것이다.
산소,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대기 중의 물질.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하고, 바로 그 산소가 혈액 내의 적혈구와 결합함으로써 ‘핏빛’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산소가 체내의 혈액에 제대로 공급되지 못할 경우, 비로소 피가 검게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흑색의 피가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피의 죽음. 생명의 부재.
검은 죽음(Black Death).
그것이 바로 이 암혈의 갑주에 깃들어 있는 세상과 생명의 종착점이었다.
─ 이제야 깨달았구나?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데일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산양 뿔의 소녀가 있었다.
“역시,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 작센의 배교자야!”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템플러가 노호를 감추지 못했다.
“추악하다! 추악하고 또 추악해서 참을 수가 없구나! 네놈의 영에 묻어 있는 더러운 오물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핏빛의 혈액이 폭주하듯 휘몰아쳤고, 마스터 템플러가 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미친 새끼.”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남의 일처럼 조소했다.
육체를 휘감고 있는 ‘검은 죽음의 갑주’를 자각하며, 그림자 군주가 나직이 팔을 뻗었다.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 흑사의 어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