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 *
“마왕령 일대에 흩어져 있는 마족들이, 일사불란하게 규합하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대 마족 동맹 주력의 움직임에 앞서, 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척후 부대 ‘겨울 파수꾼’ 하나가 보고를 올렸다.
“우리 측의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감지하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 움직임을 통해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마왕령 일대에 남아 있는 마왕군의 잔당, 고위 마족의 존재를.
일찍이 마계를 떠나, 그들이 살기 위한 터전을 찾아 여정을 시작한 마왕 발로르와 휘하의 무리. 비록 ‘이계의 용사’와 제국에 맞서 대다수가 격파되었다고 하나, 그들 모두가 남김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위 마족이 마왕령의 마족 잔당을 지휘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마족들을 규합하고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그들밖에 없으니까요.”
랭커스터 측의 고위 기사 하나가 되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 여신의 자비를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악마들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스터 템플러가 입을 열었다.
“여신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이상, 당장에라도 놈들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배교자들의 땅에 여신의 빛을 깨닫게 해주어야겠지.”
일찍이 그가 이 땅의 구울 무리를 향해 내리꽂은 ‘빛의 기둥’을 떠올리며.
“달라질 것은 없다. 이대로 군세를 움직여 마족 놈들의 뿌리를 뽑고, 장막을 드리울 것이다.”
마스터 템플러의 말에 7서클의 백마법사 보레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시작되겠네요.”
“여신께서 바라시는 전쟁이다.”
제국군 대 마족 동맹, 저마다 흑심이 교차하는 막사 속에서…… 적어도 마스터 템플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어두운 마음이 아니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고결하고 순수한 백색의 광기였으니까.
* * *
대 마족 동맹의 ‘십자군(Crusades)’은 차츰 마왕령의 어둠 속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왕령의 동토 속으로 나아갈 때마다, 데일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전략적으로 너무 무모했다.
천천히 공을 들여 움직여야 할 작업이 하루아침에 ‘주력 부대를 끌어모아 돌파하자’는 방침으로 바뀌어,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어둠의 대지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제국의 강자들로 이루어진 대부대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성검을 ‘친아버지’처럼 가까이 여기고 있다는 모드레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
거기까지 떠올린 시점에서,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모드레드의 무모하고 과감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무척이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비로소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제국의 제7황자 모드레드가 보여주고 있는 막무가내식 행동거지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략적 결정.
하나부터 열까지, 성검의 아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패배의 천재 ‘필립’을 빼닮아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둘도 없는 붕어빵 형제처럼.
설마 싶었다.
* * *
대 마족 동맹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마왕령 각지에 흩어져 있는 마족들이 규합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이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 움직이는 조직이었다는 듯이.
속속들이 집결하기 시작하는 마족들의 무리는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고, 대 마족 동맹의 주력 부대를 향해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적들의 터전이고, 다시 말해 데일과 그의 부대는 뒤가 없는 고립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 * *
“대오를 갖춰라! 대형을 흩트리지 마라!”
“방패를 들어! 마법사들의 포화 사격이 있을 때까지 놈들의 발을 묶어라!”
목적지를 향해 가까워질수록, 그들을 향해 맞서는 마족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그저 적들의 발을 묶고 철저하게 고립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게릴라였다.
* * *
“부대를 물리지요.”
그 시각, 마왕령의 동토 위에 쌓아 올린 제국군의 진지.
대 마족 동맹의 수뇌부가 모여 있는 그곳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퇴각이라고?!”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모드레드 황자의 제의에 따라, 신속하게 제국군 주력 부대가 집결해 마왕령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까지 이르러 부대의 기수를 되돌리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도 밥도 되지 않는 결정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공자’의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세력들은 어느 의미에서 잠재적 적이다. 설령 패배해도 잃을 것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말 그대로의 ‘몰살’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정치적 책임 같은 것은 둘째 치고, 몰살의 범주 내에 데일 자신조차 예외일 수 없을 테니까.
마왕령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고립되어 대패할 경우, 이것은 데일조차 목숨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규격 외의 강자들이 집결해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일찍이 고위 마족, 그림자술사의 집요함과 악랄함을 그 무엇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으니까.
“그렇습니다. 아직 병력의 손실을 보지 않은 상황이니, 지금이라도 당장 부대 전체를 물려야 합니다.”
“드디어 네놈의 사악한 속셈을 드러내는구나, 작센의 배교자야!”
그 말에 비로소 마스터 템플러가 소리를 높였다.
“마왕령을 개척하란 황제 폐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저주받을 땅이 마족 놈들의 땅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구나!”
“이 이상 부대를 전진시켰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누구도 살아나서 돌아가지 못하겠지요.”
“네놈……!”
스릉.
바로 그때였다. 어느덧 마스터 템플러의 검이 뽑아져, 그대로 데일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데일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여신의 사역을 수행하는 우리가 등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 그러십니까? 적어도 제 부하들은 등을 돌려야겠는데요.”
“지금 뭐라고 했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동시에 모드레드 황자 역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작센의 대표자이자 대 마족 동맹의 수장으로서, 저는 이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감히 제국의 황자로서, 이 몸의 명령에 거스르겠다는 것이냐?”
‘필립 밑에 있는 기사들 심정이 이해가 가네.’
데일이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 이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황명을 거역하려 드는 것이냐……!”
그러나 데일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개죽음마저 감수할 거란 뜻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씀이 옳습니다.”
데일의 말을 듣고, 마스터 템플러가 그대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작센 가의 장남이자 ‘검은 공자’는 마족과 내통하며 내부에서 대 마족 동맹을 와해시키려 했고, 아울러 황자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역모(逆謀)를 범하려 했습니다.”
“웃기는 헛소리가 따로 없네요.”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고, 수뇌부가 모여 있는 막사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릴 따름입니다.”
“여신께서 우리를 돌보고 있는 이상, 이 전투의 승리를 의심하려 들지 말아라!”
“그러십니까.”
그 말에 데일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허리춤의 칼자루 위로 손을 올렸다.
“마침 잘됐네요.”
올리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그럼 여신께서는 우리 중 어느 쪽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 이 자리에서 승부를 내도록 하죠.”
“지금 뭐라고 했느냐?”
“순교자 결투(Trial by Combat)를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순교자를 자청하며 결투를 치르고, 여신께서는 그중에서 ‘옳은 주장’을 펼치는 쪽에게 승리를 내려주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교자 결투의 알기 쉬운 규칙이었다.
쉽게 말해서 승리하는 쪽이 옳다고 하는 구시대적 교회법의 산물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을 정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방법이리라.
“그것은 목숨을 걸고 치러지는 결투를 말하는 것이냐?”
마스터 템플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에서는 네놈을 위해 대신 싸워줄 작센의 대전사(Champion)가 없다는 것을 잊었느냐.”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공기 속에서, 데일이 미소 지었다.
“제가 직접 싸울 테니까요.”
“하, 하하하하하!”
그 말에 마스터 템플러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작센의 애송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칠죄종의 대죄’를 범하고 있구나!”
“어느 쪽이 대죄를 범하고 있을지는, 결투가 끝나고 나서 가려지겠지요.”
데일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이 결투의 입회자들을 향해 다시금 서약을 올리지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막사 내에 있는 대 마족 동맹의 수뇌부를 향했다. 모드레드 황자, 레이디 스칼렛, 그리고 작센과 랭커스터의 고위 기사들을 향해.
“제가 승리할 경우, 여신께서는 이 싸움을 돌보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부대를 물리도록 하지요.”
그러나 마스터 템플러가 승리할 경우에는 그 역(逆)이 될 것이다.
“설령 제가 이 자리에서 패배하고 죽어도, 제 죽음은 어디까지나 여신의 뜻을 전하기 위한 순교(殉敎)로서…… 작센 가는 이 결투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묻지 않으리라 약속합니다.”
“좋다.”
“그럼 이제는 그대의 차례입니다.”
바로 그때, 데일이 입을 열었다.
“뤼지냥의 기, 마스터 템플러. 그대가 이 결투에서 패배하고 죽어도, 그 행위는 여신의 뜻을 전하기 위한 순교로서 작센 가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지 않으리라 약속하십시오.”
“네놈이 감히……!”
마치 자신의 패배 같은 것은 염두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듯, 데일이 말했다. 그 행위에 마스터 템플러의 표정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서로의 목숨을 걸고 ‘여신의 뜻’을 가려내기 위한 순교자들의 결투.
“참으로 흥미롭네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적색 마탑의 레이디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어떠십니까, 모드레드 황자님. 두 사람의 결투가 썩 흥미로워 보이지 않으시나요?”
“흥.”
스칼렛의 말에, 모드레드가 남의 일처럼 콧방귀를 뀌었다.
“좋다, 여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하나의 모가지를 자르는 것처럼 확실한 것도 없겠지.”
웃고 나서 모드레드가 말했다.
“제가 승리할 경우, 의심할 여지없이 부대를 물린다는 점에 동의하십니까?”
“약속해주마.”
동맹 수뇌부가 두 사람의 결투에 입회자를 자처했고, 그들의 보증을 통해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순백의 서코트에 핏빛 십자가를 그려넣은 마스터 템플러가 그곳에 있었다.
그대로 데일이 손가락을 튕겨,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를 덧씌우려 할 때였다.
“아니, 기다려라.”
일순 결투를 제지하는 모드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순교자 결투’를 감행하는 와중에 사상의 세계를 펼칠 생각이냐?”
그럴 줄 알았다는 비릿한 조소와 함께.
“저는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마법사가 싸우기 위해 그의 세계를 펼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 그러나 이 결투는 어디까지나 우리 입회자들의 입회 하에 치러지는 성스러운 결착이다.”
모드레드가 대답했다. 비로소 그 의미를 헤아린 백마법사 보레누스가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황자님! 그 결투의 과정을 일체 지켜보지 않는 이상, 작센의 ‘검은 공자’가 무슨 꿍꿍이를 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 결투는 철저하고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함이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 있는 모두를 공자님의 ‘세계’ 속에 들여보내거나, 혹은 사상의 세계를 펼치지 않고 싸우란 뜻이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그 말을 받았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적색과 백색.
그 속에서,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웃고 나서, 데일이 나직이 속삭였다.
“슈브.”
“……!”
어느덧 칠흑의 촉수가 데일의 몸을 휘감고, 암혈의 피를 흩뿌렸다.
모두의 앞에서 그의 재능을 증명하고, 나아가 규격 외의 강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여기까지였고, 어차피 결국에는 드러낼 수밖에 없는 힘이다.
“어, 어, 어떻게……!”
마스터 템플러를 비롯한 백마법사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그것은 모드레드 황자나 적색 마탑의 레이디 스칼렛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암혈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