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 *
“이게 대체 어찌 되어버린 일이오!”
미궁도시의 주교좌 대성당, 대 마족 동맹의 수뇌부가 집결해 있는 일실.
그곳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마스터 템플러와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 보레누스가 소리를 높였다.
“교회의 사제와 부제(副祭) 둘이 광장에서 살해당하고 있는 와중, 도시의 경비를 담당해야 할 블랙아머 컴퍼니는 이 와중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소!”
“그야 지금도 마왕령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요. ──이곳 미궁도시가 아니라.”
데일이 말했다.
“이곳 마왕령의 경비를 책임지는 것은 그대의 소명이란 것을 망각한 것이오?!”
마스터 템플러가 소리를 높였다.
“설마 이대로 우리에게 마왕령을 넘기고,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겠다는 헛수작은 통하지 않을 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 마족 동맹의 대표자 중 하나로서, 이곳 일대를 교회에 바친 것과 별개로 기꺼이 제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데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적어도 미궁도시에 있는 모험가들은 ‘마족’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아울러 이곳 미궁도시 일대를 교회에 바친 이상, 불수불입(Immunity)의 규칙에 따라 영지 내의 직무 집행에 대해서 저는 아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지요. 따라서 제가 수행해야 할 의무는 오직 ‘마족’과 맞서는 것입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고도 그깟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오?”
“도시의 모험가들은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하게 미소 지었다.
“특히 모험가들을 규합하고 있는 덜레스의 에드워드 공자님에 대해서는, 교회 역시 그 이름을 모르지 않겠지요.”
제국 유수의 백작 가, 덜레스 가의 차남. 나아가 그와 함께 행동하는 귀족계 모험가 파벌이 있는 이상, 제아무리 교회라 해도 일방적으로 그들의 목을 매달 수는 없다.
귀족의 피란 것은 성가시다. 그리고 데일은 그 성가심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폭동을 일으키는 일개 모험가 무리를 교회법에 따라 즉결 처형하는 것은 일조차 아니다. 그러나 그 모험가들 사이에 귀족의 피를 가진 자들이 섞여 있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이 바로 데일이 에드워드와 귀족 모험가 파벌을 방패로 내세우는 까닭이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에요.”
그 말을 듣고, 함께 동석하고 있는 황녀 키아라가 입을 열었다.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화, 황녀님!”
“데일 공자님의 말씀에는 일리가 있답니다. 미궁도시의 모험가 중에는, 우리 제국의 소중한 자제들도 그 수가 적지 않지요. 따라서 이 점에 대해서는 교회 역시 어느 정도의 양보가 필요할 것 같네요.”
“하, 하오나!”
키아라에 이어 입을 여는 것은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레이디 스칼렛의 몫이었다.
“아, 참으로 역겹고 탐욕스러운 돼지들의 꿀꿀거림이네요.”
“레이디 스칼렛……!”
“그대들의 돼지처럼 꿀꿀거리는 욕망 앞에서, 우리의 총명하신 공자님께서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를 해드리지 않으셨나요? 우리 모두의 대의를 위해서 말이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데일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지금 미궁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교회의 위신(威信), 나아가 여신 그 자체를 모욕하는 중대 행위요!”
“교회의 위신이라고 하셨나요?”
그 말에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웃었다.
“아, 기억이 나네요. 통일 전쟁 당시, 저와 오라버니께서 교국의 수도를 점령했을 때가.”
적색 마탑의 정점에 서 있는 두 남매, 유리스 후작과 레이디 스칼렛. 그들이 일찍이 여신의 나라를 무너뜨릴 당시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불에 타죽는 마지막까지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그녀의 나라가 잿더미가 되어 타오르고…… 숯검정이 되어서 여신을 저주하는 사제들의 비명, 지금 생각해도 오싹할 정도로 즐거운 극상의 화음이었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열락에 차 있는 목소리로 웃었다.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해 있는 교회에, 아직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 위신이란 게 남아 있기는 하나요?”
마스터 템플러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하, 아주 그냥 콩가루 새끼들이 따로 없네.”
그 모습을 보며 모드레드 황자가 조롱의 소리를 높였다.
“이 빌어 처먹을 나라, 빌어 처먹을 땅, 그리고 빌어 처먹을 새끼들까지.”
“…….”
“여기서 이깟 헛소리를 지껄일 틈에, 당장 부대를 꾸려 마족 놈들을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할 줄 아는 놈이 하나도 없나?”
“저 역시 모드레드 황자님의 뜻에 동의합니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숟가락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랭커스터 측의 장미십자 기사들도 찬성의 뜻을 밝혔다.
“하오나 황자님!”
그 말에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 보레누스가 당혹스레 입을 열었고, 모드레드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뭐, 이 새끼야. 내 말이 꼽냐?”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마족을 쓸어버리자고 모여 있는 새끼들이 마족을 쓸어버리러 가자는데, 이의가 있는 새끼들은…….”
모드레드 황자가 말했다.
“애초에 대 마족 동맹이 아니란 걸로 생각하고, 짐 싸서 나가는 게 맞겠지. 자, 그럼 내 말에 이의 있는 새끼?”
“차, 참으로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은 용(龍)이란 걸까.’
모드레드의 말을 듣고, 데일 역시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쓸데없이 머리를 쓰는 계산이 아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정곡을 짚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종합하는 것은 ‘황실의 핏줄’에 걸맞은 위엄이었다. 그 막무가내 방식과 천박함에 대해서는 둘째 치더라도.
“처음부터 우리의 목적은 이 땅의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었지요.”
그렇기에 데일로서도 마다할 것이 없는 제의였다.
“모드레드 황자님의 뜻에 따라, 보다 확실하게 속전속결의 결착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이곳 마왕령 일대에 흩어져 있는 마족의 잔당을 퇴치하는 것. 그러나 대 마족 동맹의 의의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왕령 너머, 일찍이 마왕과 마족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어둠의 대지…… 바로 그 땅의 위협을 해소하는 것이었으니까.
용사를 비롯한 제국의 강자들조차 감히 발을 디디지 못한 베일 속의 땅.
공식적으로 ‘다크 랜드’의 이름을 가진 그 땅을 두고, 몇몇 호사가들이 과장되게 떠들어대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마계(魔界)였다.
아울러 이곳에 모여 있는 ‘대 마족 동맹’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마계와 작센의 마왕령 사이를 지키기 위한 마법의 결계를 쌓아 올리는 것.
그렇기에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 보레누스는 그 작업을 수행하고자 교회의 ‘성유물’을 가지고 왔으며, 그것이 바로 데일 앞에서 그토록 소리를 높일 수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세상에 모름지기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 * *
모드레드의 제의에 따라 대 마족 동맹의 정규 부대가 집결하기 시작했다. 속전속결의 결착을 치르기 위해서.
동시에 교회 역시 일시적으로 모험가들 앞에서 굴복하듯 그들의 제의 일부를 수용했으며, 모드레드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시의 일들을 뒤로해야 했다.
그리고 교회의 통제로부터 도시가 벗어나 공백 상태가 되는 그 시점을, 데일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일찍이 데일이 장미 전쟁을 수행하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는 사이, 덜레스의 에드워드가 손에 넣은 어느 아티팩트 하나를 떠올렸다.
에드워드는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얻은 아티팩트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리라. 그러나 아니었다.
꼭두각시의 검(Sword of Puppet).
지금부터 데일과 ‘대 마족 동맹’은 마왕령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 그곳에 있는 마족들과 전투를 수행할 것이다. 결코 일개 오크나 구울 수준의 그것이 아니라.
고위 마족, 그림자술사와 맞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데일이 에드워드를 위해 준비해 놓은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공식적으로, 에드워드는 불법으로 아티팩트를 세탁하고 손에 넣었다. 따라서 그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동시에 그 아티팩트는 고위 마족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물품이며, 그 힘에 잠식당해 의식을 잃고 폭주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바로 지금, 미궁도시를 지배하는 교회와 그들의 주력 부대가 ‘대 마족 동맹’의 의무를 수행하고자 자리를 비우고 있는 사이에…….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꼭두각시의 검’이 춤을 출 것이다.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에 남아 있는 데일의 정적(政敵)들, 교회의 행정가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 * *
제7황자 모드레드의 제의에 따라, 마왕령의 어둠 속으로 속전속결의 출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나비효과였다.
어느 세상에서나 일 처리란 모름지기 지지부진하고 느리기 그지없는 법이다. 특히나 상충하는 이해 세력일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하리라.
당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벽돌을 쌓아야 할 데일의 구상이, 생각지도 않게 일사천리로 이어진 것이다.
천천히 마왕령 내의 상황을 파악하고 점진적으로 부대를 움직여야 할 상황에서, 일제히 대규모 군세를 움직여 ‘마계’와 마왕령 사이에 경계를 긋겠다는 작전으로.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데일로서는 내심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속전속결이란 말은 듣기에 좋으나 실제로는 결국 무책임의 이음동의어가 되기 쉬운 법이니까.
그럼에도 데일이 굳이 모드레드의 뜻에 공감하고 동의해준 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희생되는 것은 작센의 군세가 아니다. 대 마족 동맹을 이행하고 있는 ‘잠재적 적’들이니까. 비록 작센 가의 병력도 예외가 아니라고 하나,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와 비교했을 때 감수할 가치가 있는 희생이었다.
성공해도 성공하는 대로 나쁠 것은 없다. 이 틈을 타서 데일의 수족이 덜레스의 에드워드를 꼭두각시로 움직일 것이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데일로서는 무엇 하나 잃을 것이 없는 도박이었다.
* * *
마왕령의 끝자락, 그리고 고대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마계의 입구.
데일과 ‘대 마족 동맹’이 움직이는 대규모 군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곳에 있는 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마왕 발로르와 제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질 당시…… 그들이 쌓아 올린 옛 요새에서.
흑색 로브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펄럭이는 로브 자락이 살아 있는 로브처럼 꿈틀거리며, 후드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대 마족 동맹의 주력 부대가 기동을 시작했다는 보고입니다.”
그 남자를 향해 고블린 척후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족의 공용어였다.
“오크와 트롤, 고블린, 각 부족의 대장들을 소집하고, 마왕령에 흩어져 있는 게릴라 부대 모두에 집결 명령을 내려라. 이곳을 거점 삼아 장기 수성을 준비할 것이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유창하기 그지없는 마족의 목소리였다.
“며,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고블린이 그대로 자리를 뜨고 나서, 남자는 홀로 요새의 성벽 위에 있었다.
휘몰아치는 동토의 대지, 그러나 이 냉기조차 그 너머에 있는 어둠에 비할 것은 아니다.
“마족이라…….”
바로 그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바람이 그쳤다.
그러나 미풍조차 불지 않는 그곳에서도, 남자의 흑색 로브는 여전히 살아 있는 생물처럼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