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 *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의 대광장.
일찍이 작센 자작의 영주성에서 교회의 주교좌 대성당으로 거듭나고 있는 그 앞에, 적지 않은 숫자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시스티나 여신교는 당장 과도한 세금 정책을 철회하라!”
“여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교회는 물러나라!”
“당장 마왕령에서 꺼져라!”
마왕령을 넘겨받고 세금을 갈퀴째 쓸어 담고 있는 교회를 향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는 군중들. 미궁을 탐험하고 있는 모험가부터 시작해서, 아티팩트와 마석 사업에 이끌린 길드의 사람들, 나아가 도시 내에서 목숨을 걸고 개척 사업을 일구는 농부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토록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코 ‘그들의 의지’ 하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직을 결속하고 행동 지침을 내릴 수 있는 리더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
공식적으로, 뒤에서 그들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덜레스의 에드워드였다. 귀족계 모험가 파벌의 수장으로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궁도시 내의 실력자.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뒤의 뒤에 숨어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진짜 ‘조종자’는 결코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암약자들,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란 결코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암행(暗行)이란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니까.
주교좌 대성당 앞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듯 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그들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교회의 템플 기사수도회였다.
휘몰아치고 있는 소요 속에서, 데일 역시 그곳에 있었다. 후드를 짙게 눌러쓰고 그의 정체를 가린 채.
불씨를 지피고 나서, 그것이 하루아침에 장작더미를 집어삼킬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데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때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가 피워올린 불씨가 이곳 미궁도시와 교회를 집어삼키기 위해 타오를 때를.
* * *
“데일 공자님.”
주교좌 대성당의 일실, 그곳에 있는 ‘검은 공자’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황금의 핏줄을 잇는 여성이었다. 그녀를 보필하는 시녀나 호위 기사조차 없이 홀로.
우두머리 용(Pendragon)의 일족, 제국의 제5황녀 키아라였다.
“키아라 황녀님.”
어쨌거나 이곳 주교좌 대성당에는 대 마족 동맹의 구심점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천하의 황족이 호위 하나 없이 성을 돌아다니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구실 것 없답니다. 부디 제 앞에서는 격식에 개의치 말아주세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켜 데일이 예를 차리려 하자, 키아라가 그럴 것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심려가 크시겠어요.”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들이겠지요.”
키아라 황녀가 드레스 자락을 이끌며 데일의 앞에 앉았고,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데일도 비로소 착석했다.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검은 공자’의 명성을 들으며, 밤낮으로 그대의 모습을 상상했지요.”
키아라가 데일을 향해 즐겁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남자이기에, 이 나라 전체에 하루가 멀다고 그 이름과 명성이 울려 퍼지는 것일까. 그렇게 그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과장되는 법이지요.”
“어머, 그럴 리가요.”
키아라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제 앞에 있는 ‘검은 공자’께서는,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입에 발린 소리가 거짓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지요.”
키아라의 말에 데일이 짐짓 평정을 가장하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칭찬 뒤로 숨어 있는 칼날을 경계하며.
“제국의 황녀님께서 달리 저를 찾으신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이 이상 쓸데없는 신경전을 거듭해봐야 의미가 없다고 헤아리며.
“그저 ‘검은 공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따름이랍니다. 이렇게 둘이서 말이지요.”
“부디 제 말솜씨가 황녀님을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길 기도해야겠네요.”
데일의 말에 키아라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후후, 이미 공자님의 화술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검증되었답니다.”
키아라가 말했다.
“그날, 의회에서 그림자의 왕을 자처하며 청색 마탑의 충성을 종용하신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에, 데일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어머,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그러나 제5황녀 키아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 지을 따름이다.
“의회에 입회할 자격을 가진 어엿한 ‘소서리스’가,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이 그리도 이상하신가요?”
“……황실의 첩자로서 청색 마탑에 잠입하신 겁니까?”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황녀님께서는 황금의 핏줄을 잇고 있는 황가의 일족이 아닙니까.”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묻는 것은 키아라 황녀였다.
“제가 황실의 피를 잇고 있다고 해서, 이 불과 빛의 제국에 저를 위한 자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그때였다.
그 말과 동시에, 황녀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서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밑을 따라 휘몰아치고 있는 청색의 마력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사상의 세계……!”
동시에 키아라 황녀의 심상을 투영하고 있는 세계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황금의 성채, 황금의 저택, 황금의 대지…… 금으로 이루어져 있는 제국의 심장, 황도의 풍경이.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 있는 황금 모두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성도 저택도,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 위로 빙결(氷結)이 덧씌워지고 서리가 내려앉았다.
말 그대로 세계가 얼어붙어 있었다.
마법사의 세계는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 세계가 곧 마법사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사상이자 마음의 풍경 그 자체니까.
“이걸로 제 진심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이 세계가 ‘모략과 거짓의 세계’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그 물음에 키아라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소서리스 의회에서 저는 그 무엇보다 ‘그림자 군주’의 모습에 걸맞은 공자님을 보았답니다.”
웃고 나서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쩌적, 쩍.
그녀의 등 뒤로 우뚝 솟아 있는 황금의 성채가, 나아가 그 성채를 뒤덮고 있는 얼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얼음이 깨지고 ‘황금의 성채’가 무너져 내렸다.
데일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은 풍경이 그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얼음에 덧씌워진 제국의 심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세계’랍니다. 황실의 피를 잇는 용의 아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소서리스로서 말이지요.”
“…….”
“불과 빛의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 오직 그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것이지요.”
키아라가 말했다. 그 말이 갖는 무게에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이 불과 빛의 제국이 무너지고, 아버지 용에 맞서 ‘용의 아이들’이 자유를 손에 넣기를 바라고 있지요.”
“황금의 군주,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키아라가 말없이 미소 짓는다.
“지금의 그대로서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테지요. 제국이란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군주들’의 존재에 대해서.”
“군주들이라고 하셨습니까?”
“불과 피의 군주, 빛과 천상의 군주…… 심지어 작센 공작령을 다스리고 있는 ‘어둠과 죽음의 군주’조차 예외일 수 없겠지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오색 마탑의 탑주(塔主)들이란 사실을.
“……!”
“아직도 제국이란 나라가 ‘하나의 군주’에 의해 통치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셨나요?”
키아라가 지칭하고 있는 군주는 결코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상 유일무이의 국가를 천명하고 있는 제국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심코 그림자 성녀의 말이 떠올랐다.
황금과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사도의 존재. 나아가 기수가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황금과 그림자 속에서 직접 왕좌에 오르기 위해 야망을 품고 있는 자들.
“──사도들을 말하는 겁니까?”
“사도 중에서도 아주 강대하고 특별한 힘을 가진 자들이지요.”
무심코 불과 빛의 사도, 미하일 랭커스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하일이 데일의 손에 쓰러지지 않고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때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아마 그 역시 ‘불과 빛의 군주’로 거듭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높은 자리를 손에 넣으려 하겠지.
아울러 그 시점에서, 그가 손에 넣게 될 자리는 오직 하나였다.
“가령 황금의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으나, 지금도 ‘황금의 옥좌’를 탐내고 있는 불과 피의 군주처럼 말이지요.”
불과 피의 군주, 유리스 후작.
황금의 기수(旗手)가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그 왕좌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의 소유자들. 지금도 불과 빛의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밑의 암투.
“참으로 콩가루가 따로 없네요.”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일찍이 그가 쓰러뜨린 헤아릴 수 없는 왕들의 존재를 떠올리며.
“우리 청색 마탑은 침묵 속에서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의 의무를 다할 거랍니다.”
키아라가 말했다.
“아울러 공자님께서 우리의 침묵을 두고, 기다림이 길지 않을 거란 사실 역시 염두하고 있지요.”
“…….”
“그저 기억해 주세요. 제가 그림자 군주를 위해 청색의 침묵을 깨트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말과 동시에 세계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다시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주교좌 대성당의 집무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작센 자작의 영주성이 아니라.
그곳에서, 데일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로서는 마다할 것이 없지요.”
그러나 결코 장고(長考)는 아니었다.
“그림자의 기수로서, 기꺼이 그림자 군주를 위해 침묵을 깨트릴 준비가 되셨습니까?”
데일의 물음에, 키아라가 무릎을 굽히며 드레스 양쪽 끝자락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 * *
그 시각, 그림자 법정의 아지트.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림자 성녀의 비명이었다. 그 소리를 듣기 무섭게, 탁자 위에 두 발을 걸치고 있는 마스터 바로가 맥주를 팽개치고 몸을 일으켰다.
“자, 잘못했어요,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아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여느 때의 발작이다. 제 어린 딸에게 악마가 씌었다며 길길이 날뛰는 옛 주군이, 딸의 눈동자를 파버릴 때의 악몽.
“마리아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마스터 바로가 다급히 그림자 성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바로, 바로……!”
그림자 성녀, 마리아가 점자를 더듬듯 마스터 바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서워, 앞이 보이지가 않아, 앞이……!”
그대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흑색 붕대가 흘러내렸다. 그 속으로 아무것도 없이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없는 구멍 너머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마리아 아가씨.”
마스터 바로가 나직이 입술을 악물었다.
“제가 이렇게 아가씨의 곁에 있지 않습니까.”
일찍이 기사의 긍지와 자존심마저 버리고 주군의 등에 칼을 찔러넣은 배신자. 대륙 칠검의 수치. 그러나 그러한 손가락질 앞에서도 마스터 바로가 가진 ‘기사의 긍지’가 부러지는 일은 없었다.
고통 속에서 발작이 멈추었다. 그림자 성녀가 바로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핏빛의 눈물이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모험가들에 의해 여신교의 사제들이 살해당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