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 *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따로 없었다.
성검의 일에 이를 갈며 사심을 품고 있는 황자 모드레드,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황녀 키아라, 지금도 음흉하기 짝이 없는 흑심을 품고 있는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
그것도 모자라 부서진 성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교회와 백색 마탑까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 적을 둘러싸고 있는 ‘작센 공작령’과 아버지 작센 공작의 존재였다.
제국 제일의 대제후,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갖는 공포는 결코 까닭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황실의 피를 잇고 있는 망나니 황자조차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성검을 친아버지처럼 가까이 여겼다고?’
그리고 흑색공이 모드레드를 향해 경고했을 때, 당혹스럽게 숨을 삼키는 그 모습을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그 의혹이 사실이라고 할 경우,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당장 생각할 것은 황실의 콩가루 사정이 아니었다.
아버지 흑색공의 비호에 전부를 의지할 수는 없다. 데일 역시 이곳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나아가 작센 공작의 대리자로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 * *
작센 자작성에 모여 있는 것은 일찍이 이계의 용사가 ‘마왕 발로르’에 맞설 당시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때처럼 말 그대로 대륙의 저울추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길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작센과 랭커스터의 동맹이 촉발한 대 마족 동맹답게, 가장 앞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몫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까지 미하일의 진짜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죽기 전 아들이 말해준 ‘대 마족 동맹’을 그의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이라 멋대로 넘겨짚으며…….
무너질 대로 무너진 랭커스터 가의 마지막 전력을 끌어모아, 작센의 데일에게 일임해준 것이다.
제2차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를 파멸로 몰아넣고, 미하일의 가슴팍에 칼을 꽂은 바로 그 당사자에게.
참으로 잔혹하기 그지없는 아이러니였고,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동시에 황도에서는 제7황자 모드레드와 제5황녀 키아라, 철십자 기사를 비롯해 레이디 스칼렛과 휘하의 적마법사들이 참여했다.
끝으로 가장 껄끄러운 백색 마탑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일찍이 데일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는 니콜라이 추기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색 마탑의 진짜 실력자들은 결코 교회의 고위 성직을 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교회 조직에 몸을 담는 것은 세속(世俗)의 지위를 얻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나아가 백색 마탑의 진가는 마법사 하나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스티나 교황령이 자랑하는 기사 조직의 참여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처음부터 백마법사와 합을 맞출 것을 전제로 검을 수행하는 교회의 검. 백색 서코트에 핏빛의 십자가를 새겨넣은 광신의 집행자, 템플 기사수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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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자작의 영주성,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와 마왕령 일대의 개척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핵심 거점.
바로 그 성의 일실에 ‘대 마족 동맹’의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제국의 황자와 황녀, 레이디 스칼렛과 그녀를 보좌하는 고위 정화자, 랭커스터 가의 오러 마스터, 끝으로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와 템플 기사수도회의 템플러(Templar)까지.
‘사방이 적색과 백색으로 가득하네.’
흑색의 영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불과 빛의 세력들, 황금의 기수.
비로소 이계의 용사를 비롯한 제국의 강자들이 집결해 있을 당시, 흑색공이 느꼈을 부담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이 대의를 내세우고 있는 이상 작센 가로서는 마땅히 그들을 제지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이 영지를 지배하는 것은 철저하게 데일이며,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흑색공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불과 빛의 세력을 결집한 것은 어디까지나 데일의 결정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방에서 교차하고 있는 그들의 야망을 뒤로하고, 그들의 몸에 꼭두각시의 실을 휘감아 조종하는 것. 그것을 통해 이곳 마왕령의 뿌리 깊은 어둠을 걷어내고 작센의 고립을 타파하게 해줄 열쇠가 될 테니까.
“작센과 랭커스터의 동맹, 나아가 마족의 위협에 맞서 마왕의 대지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은 제국 모두의 바람입니다.”
그렇기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작센 가를 대표해 황실과 랭커스터 가, 나아가 적색 마탑과 백색 마탑, 교회에 깊이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이곳 마왕령은 작센의 영지이며, 이곳을 통치하는 것은 데일의 몫이다. 그렇기에 이 동맹을 주도하는 것 역시 데일의 역할이어야 했다. 하이에나들이 그들의 야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 백색 서코트에 핏빛의 십자가 무늬를 새겨넣은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백색 마탑의 사람과 더불어 합석하고 있는 교회의 검, 템플러다.
그것도 템플 기사수도회의 최고위 기사를 상징하는 마스터 템플러.
“이 땅에 깃들어 있는 어둠을 정화하고 여신의 빛을 흩뿌리는 것은, 그야말로 시스티나 자매신께서 바라마지 않는 사역이지요.”
“아,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참으로 멋진 말이지요.”
그 말에 레이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신께서는 기꺼이 그녀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리 제국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셨지요. 그렇지 않나요?”
일순 마스터 템플러와 백마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찍이 데일이 요크 가의 청색과 대립했듯, 황금의 기수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당장 제국의 통일 전쟁 당시, 제국의 기수를 자처하며 ‘시스티나 교국’을 무너뜨린 것부터가 적색 마탑이 아니었나.
‘하나부터 열까지 당장에라도 부스러질 콩가루들이지.’
적어도 레이디 스칼렛의 조롱이 이토록 믿음직하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작센 가가 그대들의 어둠을 회개하고, 이 땅에 여신의 자비와 자애를 비추겠다고 할 경우.”
마스터 템플러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교회와 백색 마탑은 자매신의 가르침에 따라, 기꺼이 순교를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참으로 다행이네요.”
“그러나 그에 앞서,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마스터 템플러가 기다렸다는 듯이 데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그렇지 싶어 데일이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하(聖下)께서는 정녕 작센의 검은 공자와 흑색공께서, 여신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답니다.”
그의 곁에 있는 백마법사가 거들었다.
“실제로도 검은 공자께서는 초대 백색 마탑주의 성유물…… 성검을 부러뜨리고 자매신을 욕보이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불가항력이었지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저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대가 여신의 검을 쥐고 있다고 해서, 순순히 그 칼에 찔려주기라도 해야 했습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그저, 공자님께서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럼 여신의 나라를 무너뜨린 제국과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께서는, 그 죄를 뉘우쳤습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경의 말이 맞다고 가정할 경우. 제1순위로 머리를 박아야 하는 것은 여기 있는 레이디 스칼렛과 유리스 후작 각하, 그리고 황제 폐하가 아닙니까?”
“감히……!”
데일의 말에 모드레드와 교회 측의 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초대 백탑주의 성유물과 여신의 나라는 여신 그 자체가 아닙니다. 결국 숭배자들이 빚은 우상에 불과하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우상을 부쉈다고 해서 그것이 여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가 그토록 경계하는 우상 숭배의 행위가 아닙니까?”
신학(神學)으로 무장하고 있는 여신의 기수들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법에 따라 데일이 되묻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작센의 어둠과 배교(背敎)의 죄가 지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템플러가 애써 화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그리고 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회개의 증거입니다.”
“무엇을 요구합니까?”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마왕령의 개척 사업은 이미 공자님의 일개 사업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시스티나 자매신의 사역(使役)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여신의 사역자로서, 그 무엇보다 철저하게 이 성스러운 사업을 감시하고 감독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스터 템플러가 대답했다.
“이곳 작센 영주성을 주교좌 대성당으로 개축하고, 이 대지를 자매신의 이름으로 교회에 봉토(封土)하십시오. 그리고 이곳은 작센 가의 죄를 씻는 첫 개척 교구로서 그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마왕령을 교회에 바치란 뜻이다. 이곳 아티팩트 러시의 광풍, 새로운 모험과 기회의 땅에서 비롯되는 천금의 재화를 쓸어 담기 위해서.
그 속내에 데일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염치가 없을 줄이야.
“제가 거절할 경우, 교회로서는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마왕령의 개척 사업이 성스러운 여신의 사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속의 이득을 위한 작센 가의 비즈니스라 받아들이겠지요.”
마스터 템플러가 말을 잇는다.
“성하의 이름으로 ‘마왕령의 개척 사업’은 영육(靈肉)의 죄를 쌓는 행위라 공포할 것이며, 나아가 이곳 마왕령에 있는 개척 수도회 모두에게 철수 명령을 내릴 겁니다.”
“참으로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네요.”
“농담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나서 말했다.
“그럼 가지십시오.”
“……!”
“작센 공작의 대리자, 소(小) 작센 자작의 이름으로 약속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곳 마왕령 전체를 교회에 공짜로 넘겨드릴 것이라 약속합니다.”
“바, 방금 뭐라고…….”
“마왕령을 통째로 교회에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데일이 대답했다. 그 말에는 방금까지 겁박을 일삼은 당사자들조차 당혹감에 숨을 삼켜야 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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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이름으로 마왕령 일대를 교회에 바치고, 자작성을 주교좌 성당으로 개축하겠다는 약속.
“그들의 겁박에 넘어갔느냐?”
데일이 그 사실을 아버지 흑색공에게 보고했고, 흑색공이 차갑게 되물었다. 북부 일대를 다스리는 제국 제일의 대제후 중 하나로서.
“그럴 리가요.”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재물을 탐하지 말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울지니.”
고개를 젓고 나서 시스티나 여신교의 교리를 읊조렸다.
“적어도 지금 당장 우리가 교회를 상대로 맞서는 것은 의미 없는 소모전이 될 겁니다.”
이어지는 데일의 말에, 작센 공작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교회가 탐욕에 맹목이 되어, 스스로 그들의 정당성을 포기할 때에는 그렇지 않겠지요.”
“교회의 정당성이라고 했느냐?”
“독을 다스리는 데에는 독보다 좋은 게 없는 법이니까요.”
데일이 대답했다. 그 말에 작센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여느 때처럼 그의 아들에게는 생각이 있었고, 두 부자로서는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이 다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