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 *
성검을 죽이는 것은 훗날 샬롯 오르하르트의 몫이 될 예정이었다. 그것이 어릴 적 데일과 그녀가 맺은 약속이었고,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테이블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용사의 검을 뒤로하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전쟁터에서 내 앞에 나타나 있는 이상, 나로서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죽기 전에 죽여야 했으니까.”
“너를 나무랄 생각은 없어.”
그러나 샬롯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저 내 검이 그 남자에게 닿는 것보다, 네가 더 빨랐을 따름이니까.”
“…….”
“저기, 하나 물어봐도 돼?”
샬롯이 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 성검사는 고통스럽게 죽었을까?”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겠지. 성검이 부서지고, 백작 가의 몰락을 지켜보며…… 몸과 마음의 지옥 속에서 천천히 죽어갔을 테니까.”
“그렇구나.”
데일의 대답에 샬롯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국 제일의 천재에게는 당해낼 수 없네. 그날, 우리가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말이야.”
샬롯이 말을 잇는다.
“결국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에게 도움을 받는 것밖에 할 수 없었네.”
지금에 와서는 두 사람에게조차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의 과거. 그러나 그날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작센의 이름으로 너에게 지켜지고, 작센의 이름으로 우리 오르하르트 가의 적을 쓰러뜨리고…… 너를 위해서 더더욱 강해지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그 강함조차 너에게서 받은 것들이잖아.”
샬롯이 자조하듯 웃었다. 무엇 하나 그녀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래도…… 고마워.”
데일이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너 없이는 무엇 하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함을 드러내며. 다시금 정적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정적 속에서, 샬롯이 나직이 데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미 내 삶의 평생을 너와 작센 가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했어.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을 거야. 그게 내가 너에게 지고 있는 빚이니까.”
샬롯이 말했다.
“그래도…….”
그리고 거기까지 말이 이어지는 시점에서, 데일 역시 그 망설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동요는 결코 하루 이틀 사이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작센 가를 떠나고 싶구나.”
“…….”
“그것을 위해, 나의 기사로서 주군의 허락을 받으러 왔지?”
데일이 물었다. 샬롯이 말없이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로 작별이겠네.”
“이대로 잡지 않고 보내주는 거야? 이유도 묻지 않고?”
“너를 믿으니까.”
“……그래.”
그녀가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감정. 그것은 결코 일방적으로 용무를 마쳤으니 볼 일이 없어졌다는 식의 이기적 행동이 아니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 나아가 내심 자기를 잡아주길 바라고 있는 마음, 말 그대로 사춘기 소녀의 그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때와 달리 너무나 멀어져 있는 두 사람의 거리감에.
“그래, 그렇구나.”
데일의 대답을 보고 샬롯 역시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 샬롯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훗날 네가 다시 나를 부를 때, 나는 주저 없이 너와 작센 가를 위해 달려올 거야.”
“그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기다릴게.”
기약조차 없는 약속. 그 말을 끝으로 샬롯이 몸을 일으켰다. 사르륵, 그녀가 걸치고 있는 레이스 자락이 나부꼈다.
“네가 다시 나를 필요로 해줄 때까지.”
그대로 등을 돌린다.
무심코 데일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세피아의 모습이 겹쳤다.
그저 마지막까지 멀어지는 샬롯의 등을 보고도, 데일은 팔을 뻗을 수 없었다.
잡을 수 있다. 그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족하리라. 그러나 잡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날의 겨울밤 속에서, 신검 바델 경을 쓰러뜨린 검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덧 끝을 알 수 없는 시린 냉기와 어둠이, 겨울밤의 세계를 가득 채울 따름이었다.
* * *
이튿날, 샬롯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한 작센의 흑갑(黑鉀)과 검을 남겨놓고, 조용히 성을 떠나 사라진 것이다.
당혹스럽게 그녀를 찾는 사람들 앞에서, 데일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 * *
시스티나 교황령, 성좌도시 퓌셀.
성 막달레나 광장 앞, 사도궁에 여신교의 정점에 서 있는 최고위 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교회와 백색 마탑의 정점에 서 있는 천상공(Lord Heaven)과 열두 명의 추기경, 나아가 성직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법사’로서 백색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신의 시녀들까지.
그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초대 백색 마탑주의 성유물이 부서지고, 나아가 그 파렴치한 행위의 당사자가 바로 그 흑색 마탑의 후계자이자 ‘검은 공자’라는 것.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신성모독이자, 교회 전체를 모독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도발입니다!”
“게다가 그 저주받을 그림자 교회가 흑색과 손을 잡고 있으니, 지옥의 밑바닥조차 부족할 정도의 극악(極惡)이 따로 없지요!”
추기경 하나가 입을 열었고, 그에 맞서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그,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이상, 여신께서 종복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할지…….”
그 사이에서 니콜라이 추기경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렸다.
“니콜라이 추기경께서는 감히 흑색 놈들의 신성모독을 옹호하려는 것이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어디까지나 이 불가피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보다 합리적으로…….”
“그대가 흑색의 후계자와 함께, 수상쩍기 그지없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숙하시오.”
바로 그때였다. 침묵을 깨트리고, 비로소 천상공이 입을 열었다. 일제히 정적이 내려앉았다.
“니콜라이 추기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서, 성하(聖下)……!”
일찍이 전대 교황이 제국과 결탁한 추기경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어 백색 마탑과 교회 세력의 정점에 앉은 남자.
“성유물이 부서진 것은 우리 교회로서 감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나, 이미 황실에서는 흑색 후계자가 주도하고 있는 ‘대 마족 동맹’의 대의를 높이 사고 있지. 실제로 모드레드 황자님과 키아라 황녀께서 친히 황실의 의지를 대표해 북부 마왕령으로 향하고 있지 않소.”
“…….”
마지막까지 제국에 맞서 저항을 천명한 전대 백색 마탑주가 죽고, 교회의 옥좌에 앉기를 자처한 제국의 개.
“우리 교회가 섣불리 대 마족 동맹을 깨트릴 경우, 황제 폐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이미 교회는 마왕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 여신의 사명이며, 지금도 그 땅에서 여신의 사역자를 자처하고 있는 수도사들이 있다. 나아가 황실마저 그 대의에 가담하고 있는 이상, 상황을 손바닥 뒤집듯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렸다. 동시에 교회의 성유물이 부서지고 밑바닥까지 추락한 위신을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달리 어떻게 해야…….”
추기경 하나가 되물었고, 천상공이 대답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달리 생각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마왕령의 개척 사업은 오직 시스티나 자매신의 뜻이며, 그렇기에 그 성스러운 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교회의 몫이 되어야 함이 옳지. 다시 말해서…….”
천상공이 말을 잇는다.
“작센 자작이 수행하고 있는 마왕령 개척 사업의 일체를, 우리 교회의 이름으로 넘겨받아 대행할 것이오.”
모름지기, 신의 이름을 빌려 남의 것을 털어먹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는 법이었으므로.
* * *
세피아와 샬롯의 공백을 느낄 틈조차 없이, 데일의 영지를 향해 꿈틀거리는 욕망들이 하나둘씩 집결하기 시작했다.
천상공의 의지를 대행하는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와 주교급 추기경들 다수.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제국 전체를 술렁이게 하는 또 하나의 손님들이 있었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황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침묵을 지키는 이 나라의 정점…… 황금의 핏줄이 몸소 데일의 땅을 향해 행차한 것이다.
그렇기에 데일의 영지를 중심으로 요동치기 시작하는 정세 속에서, 비로소 데일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공이었다.
* * *
냉기와 삭풍이 휘몰아치는 동토에서, 비로소 마차의 수레바퀴가 정지했다. 아울러 마차를 따르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호위대 역시 일제히 그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차가 늘어뜨린 벨벳 장식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황금의 용이 새겨져 있었다.
쌍두룡, 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유일의 국기.
“삼가 모드레드 황자님, 그리고 키아라 황녀님을 뵙습니다.”
그 앞에서 작센의 두 부자와 마왕령 내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침묵 속에서, 두 개의 발이 마왕령의 동토를 밟고 내려섰다.
“검을 들어라!”
“황자, 황녀님을 향해 경례!”
철십자 기사들이 일제히 그들의 검을 치켜들었고, 기사들의 사열 속에서 황금의 제복을 휘감고 있는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황실의 존재들, 황금의 피를 계승하고 있는 두 남녀.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흑색공.”
“키아라 황녀님.”
황실의 공주, 그 이름 외에 도무지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 없는 여성이 있었다.
나아가 황금의 제복에 검을 차고 있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드레드 황자님.”
“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흑색공을 뒤로하고, 제7황자 모드레드가 그의 옆을 향했다.
“그래, 네가 바로 제국 제일의 천재라고 떠들썩한 ‘검은 공자’렸다?”
“맞습니다, 황자님.”
“하하, 제국 제일의 천재가 고작 이깟 애송이라니. 나라 꼴이 참 우습게 돼버렸어.”
“…….”
모드레드가 조롱하듯 내뱉었고, 그러나 누구도 감히 그의 말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 그 망할 이계의 용사 덕이지.”
오히려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의 앞에서 ‘제국의 영웅’을 깎아내렸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대륙의 강자란 강자들은 죄다 씨를 말려버렸으니, 이깟 애송이 따위가 제국 제일의 천재니 뭐니 떠받들어지는 거 아니겠어?”
황자의 고결함이나 품격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모드레드.”
바로 그때였다.
“부디 말씨를 신중하게 고르려무나.”
“……송구했습니다, 누님.”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제5황녀 키아라가 입을 열었고, 그녀의 말에 모드레드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부디 동생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아이가 아직 세상 경험이 미숙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무례를 범해버렸네요.”
“당치도 않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저으며 예를 표했다.
“어머, 그럴 리가요. 제국 제일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데일 공자님의 위명(偉名)에, 저는 누구보다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답니다.”
예의를 표하는 데일 앞에서, 키아라 황녀가 생긋 미소 지었다.
“나아가, 그대가 이 제국에 가지고 올 미래에 대해서도 말이지요.”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