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 *
“도대체 어디까지 스토커처럼 들러붙을 셈이세요?”
미궁의 어스름 속에서 적발의 미녀가 앙칼지게 소리를 높였다.
“허허, 이런 쉬펄. 이 아가씨가 도끼병이라도 걸리셨나. 어쩌다 보니 가는 길이 같은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아, 그럼 부디 앞서서 갈 길이나 가주시길.”
“것 참, 이 아가씨 성질머리도 급하시네, 내가 좀 설렁설렁 걷겠다는데 왜 그리 시비요?”
“어머, 그러신가요?”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발밑을 따라 적색 마력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화르륵!
동시에 미궁 일대의 어둠을 밝히는 홍염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일개 마법사, 심지어 기사마저 쉽사리 감당할 수 없는 지옥의 불꽃이었다.
스릉.
“어이쿠, 시펄 깜짝이야.”
그러나 휘몰아치는 불꽃 속에 모험가 ‘페이스리스’의 모습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배후를 잡고, 목덜미를 향해 핏빛 칼날을 들이밀고 있을 따름이다. 방금까지의 농담이나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는 살기를 칼끝에 벼리며.
“아직도 여기가 아직도 뉘 빨강 집 뒤뜰로 보이시나?”
“…….”
“아가씨 성질머리에 잿더미가 돼버린 새끼들이 지옥에서 이를 갈고 있는데, 그 곱상하신 모가지 비싼 줄 아시는 게 좋을 거요.”
“뚫린 입이라고 참으로 잘도 지껄이시네요.”
“그야 지껄이라고 뚫린 입 아니겠소?”
일순 레이디 스칼렛의 입술 사이로, 그녀의 송곳니가 시퍼런 서슬을 내뿜었다. 나아가 그녀의 육체를 따라서 흐르고 있는 혈류(血流) 속의 액상 조직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사의 오러도 아니고, 마법사의 마력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피의 힘이.
“기사의 수치 따위가, 참으로 염치를 모르시네요.”
그러나 그녀의 증오가 이글거리는 것은 찰나였다. 이내, 평소의 여유를 가장하며 레이디 스칼렛이 쏘아붙였다.
“허허, 기사 노릇 때려치운 사람에게 기사도를 말해봐야 씨알이나 먹히겠나?”
적색 마녀, 레이디 스칼렛. 적어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고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다. 그리고 살검(殺劍) 마스터 바로는 바로 그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통제 불능의 적색 마녀를 감시하기에, 그야말로 이 이상의 적임자가 없으리라.
* * *
그 시각, 미궁도시 중심에 있는 작센 자작의 영주성.
마스터 바로를 《페이스리스》로 위장시켜 레이디 스칼렛을 마크시키고, 동시에 미궁과 마왕령 일대에서 벌어지는 보고를 경청하는 데일이 있었다.
“적색 마탑의 퓨리파이어들이, 시토 개척수도희를 위협하고 있는 구울 무리를 처치했다는 보고입니다.”
“개척 농부들의 겨울 작물 수확량이 예상 이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장미십자 기사와 밤까마귀 기사들로 교대 순찰조를 꾸려, 개척 지대의 순찰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흑색공이 쌓아 올린 작센 가의 힘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개방 정책. 아티팩트 러시의 광풍, 그 속에서 마왕령의 어둠이 걷히고 조금씩 그 너머의 영역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땅을 개척하는 것은 하루 이틀로 될 게 아니다. 13살의 데일이 이곳 마왕령의 지배자가 되고, 그 후 열다섯 생일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데일이 마왕령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미지의 땅이, 아직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마왕과 마족들의 고향이자 북부 마왕령 너머에 있는 어둠의 대지. 제국의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베일 속의 영역.
제국의 북부가 곧 대륙의 북부는 아니다. 그리고 대륙의 북부라 일컬어지는 땅이 얼마나 넓고, 그 땅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바다 너머에 있는 ‘아나톨리아 동대륙’의 존재조차 알려진 마당에 말이다.
마왕 발로르와 고위 마족 ‘그림자술사’들마저 고향을 등지고 대이동을 감행할 정도의 땅이다. 대체 그 대지에 무엇이 잠들어 있기에, 마왕을 자처하는 존재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새 터전을 찾아 도망친 것일까.
지금 당장 그 해답을 손에 넣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 해답을 손에 넣지 못하는 이상,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데일의 의무 역시 끝나지 않을 것이다.
* * *
후웅!
휘둘러지는 일검을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막아내고, 그 즉시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이검을 내리찍었다.
검을 맞받아치는 와중에도, 끝없이 데일의 체내가 마력을 뿜어내 아바타의 힘을 증폭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극히 비효율적이고 의미가 없는 행위에 가깝다. 아무리 마법사가 육체를 강화하기 위해 애를 써도, 오러의 효율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그러나 자기 존재를 하나의 기계 장치로 가정하고 있는 데일에게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적색 마력으로 서클에 열기관을 융합시켜, 도합 세 개의 ‘발전소’를 동력을 뿜어내는 암혈의 갑주.
순수하게 마력을 생성하는 마나 서클, 또 하나의 흑색 원천으로 심장에 뿌리내린 『검은 산양의 서』, 끝으로 적색 마력으로 체내에 융합하고 있는 열기관까지. 세 개의 동력기가 하나로 융합되며 뿜어내고 있는 마력의 폭풍.
‘사상의 세계에서 이 능력의 전부를 발휘할 경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검과 마법의 궁극이라 일컬어지는 두 가지를 데일이 상상하는 100%까지 융합시킬 경우, 그가 갖게 될 힘.
그것을 위해 지금 당장으로서는 아바타와 적색 마력의 활용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그날, 두 사람의 수행에 입회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작센 자작의 곁을 보좌하고 있는 두 여기사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레이디 섀도우, 그리고 레이디 블랙.
“……!”
나아가 두 아바타 사용자들의 격돌을 지켜보며, 레이디 블랙 ‘샬롯’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기사의 궁극이라 일컬어지는 아바타.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그것에 대해서는 샬롯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지켜야 할 주군이 휘감고 있는 암혈의 갑주, 저것은 대체 무엇일까.
지금의 샬롯으로서는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강자들의 격돌 그 자체였다. 그것도 마법이 아니라, 철저하게 검을 통해 벌어지는 싸움.
‘내가 지켜줘야 할 주군이…….’
신검의 딸로서 그녀가 가진 재능을 사준 것은 데일이었다. 훗날 그녀의 검이 자기 이상으로 강해질 거란 말을 해준 것도 데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켜야 할 주군 데일의 존재는 하루가 멀다고 멀어지고 있었다. 점점 샬롯으로서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경지로.
하물며 함께 주군의 곁을 수호하고 있는 오렐리아조차 그녀의 아바타를 갖고 있다. 더 나아가 데일이 모종의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그림자 속에서 주군을 지켜주는 것은 그녀 ‘레이디 섀도우’의 몫이었다.
샬롯이 아니라.
무심코 생각했다. 이제 이곳 작센 공작성에서 그녀 샬롯이 존재할 이유 같은 게 있을까. 그녀의 발밑이 조금씩 좁아지는 것을 느끼며, 샬롯이 입술을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카앙!
휘둘러지는 헬무트 경의 일검을 맞받아치고, 그림자 군주가 비로소 그의 칼자루를 바닥에 꽂아 넣었다.
“샬롯.”
그대로 샬롯을 향해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차례야.”
“내 차례……?”
뜻밖의 말에 샬롯이 숨을 삼켰다.
“검을 들어.”
“아, 으응.”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검을 뽑고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가 휘감겼다.
작센의 흑검을 구사하고 있는 오러 나이트. 그 경지는 이미 그녀 나이에 이룰 수 있는 레벨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곁에 있는 오렐리아나 데일 앞에서는, 결국 우물 속 개구리다. 평소의 수행 상대를 자처하는 여기사 오렐리아와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더더욱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신검의 딸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서, 샬롯의 몸에 흐르고 있는 핏줄이 갖는 가치는 결국 ‘우생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바로 그때,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고, 샬롯의 흑검이 뒤늦게 데일의 마검을 맞받아쳤다.
카앙!
일검 끝에, 샬롯의 검이 덧없이 허공을 돌며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아.”
미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검.
“내 아바타를 보고 놀라서 그래?”
“그, 그냥 조금 동요했을 따름이야.”
데일이 되물었고, 샬롯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를 지켜야 할 검들 앞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으니까.”
“……알고 있어.”
내 검이 지켜줘야 할 정도로 너는 나약하지 않잖아.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샬롯이 씁쓸히 웃었다. 웃고 나서 검을 고쳐 잡았다. 이미 그녀의 검이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존재를 향해서.
마음을 다잡고 칼끝에 의식을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그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 * *
이 세계는 넓다. 그리고 저 멀리서 벌어진 ‘장미 전쟁’의 후속 보도가 작센의 마왕령까지 닿는 것은 하루아침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성검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그즈음의 일이었다.
제1차 장미 전쟁에서 ‘검은 공자’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이후 필립에 의해 뒤늦게 구출되었으나……. 이미 성검이 부러지고 치명적 상처를 버티지 못해, 제2차 장미 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 그의 영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의도적으로 데일이 요크 가로 하여금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시켜, 사망 소식이 퍼지는 타이밍을 엇박자로 늦춘 것이다.
성검과 미하일 랭커스터의 죽음 이후, 제국에 요동치게 될 후폭풍을 고려함으로써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도록.
초대 백색 마탑주의 성유물이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기 무섭게 백색 마탑이 발칵 뒤집혔고, 그 당사자가 ‘검은 공자’란 사실이 알려지자 교회 전체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샬롯 오르하르트가 성검의 소식을 들은 것 역시 그즈음의 일이었다.
* * *
그날 새벽, 데일의 침실을 향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순 데일이 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데일.”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데일이 상상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세피아가 아니라, 그의 여기사 샬롯의 목소리였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세피아의 존재가 갖는 공백이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들어와.”
내심 실망을 삼키며 데일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흑색 잠옷 차림의 샬롯이 그곳에 있었다. 데일 역시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샬롯을 맞았다.
“마실 거라도 줄까?”
“고마워.”
샬롯이 머뭇거리며 미소 지었다. 어색함으로 가득 차 있는 미소였다.
“달리 할 이야기라도 있어?”
“…….”
데일이 물었고, 샬롯이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샬롯이 입을 열었다.
“성검이 죽었다고 들었어.”
“……듣자하니 전쟁이 끝나고, 자기 영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지.”
데일이 짐짓 시치미를 뗐다.
“네가 직접 그 남자랑 맞서 싸운 거야?”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부상이 심했다고 해도, 설마 그가 정말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그렇구나.”
또다시 거짓말이다. 데일이 샬롯을 향해 속삭이는 말들.
바로 그때였다. 무심코 데일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침대 옆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검(劍)이 보였다.
일찍이 그녀의 아버지를 쓰러뜨린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