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 *
검은 공자가 지배하는 마왕령을 향해,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찾아온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공작령 내의 일로 바쁘실 와중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헬무트 경.”
“데일 공자님…… 아니, 작센 자작님의 부름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데일이 직접 헬무트 경을 그의 영지로 호출한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말을 타고 향하는 방향은 마왕령 내에서 사람의 기척을 찾아볼 수 없는 미개척 지대였다. 마족의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는, 어디서 괴물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 지역.
“헬무트 경을 호출한 것은 제가 따로 비밀스럽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심상치 않은 데일의 표정에 헬무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약속 하나를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헬무트, 설령 목숨을 맞바꾸더라도 맹약을 이행하리라 다짐하지요!”
헬무트 경이 여느 때처럼 호탕하게 웃었고, 그 모습에 데일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지금부터 헬무트 경이 보게 될 것들에 대해서, 절대 입 밖으로 발설하지 말 것.”
미소 짓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설마 개척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 함부로 공개하지 못할 정도의 위협이 발각되기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헬무트 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슬슬 이쯤으로 하지요.”
흘끗 주위를 둘러보며 데일이 말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북부의 전투마를 가까이 있는 겨울나무에 묶어두고, 두 사람이 백색의 대지 위를 가로질렀다.
“그래서 이 헬무트에게, 무엇을 부탁하실 생각입니까?”
“제 수행 상대가 되어주세요.”
데일이 말했다. 수행 상대라. 뜻밖의 말에 헬무트 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행이라니, 그 정도야 자작령 내에서도 능히…….”
“슈브.”
그러나 헬무트 경이 미처 말을 끝맺을 틈조차 없었다.
어느덧 ‘이계의 흉물’이 데일의 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칠흑의 촉수가 데일을 휘감고 그대로 터져 나갔다. 어느덧 흑색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암혈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
그 모습을 보기 무섭게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오러를 가공해 덧씌우지 않았어도, 지금 데일이 휘감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상의 갑주 그 자체였다.
천하의 헬무트 블랙베어 경조차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표정이 얼어붙었다. 암혈의 갑주 너머로 침묵하고 있는 ‘검은 공자’를 바라보며.
“제가 아바타를 전개하고 있는 지금 상태에서, 부디 제 검을 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상의 세계와 갑주, 두 가지 모두를 보유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데일이 마법사로서 사상의 세계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놀랄 것도 없는 비밀이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서, 기사의 궁극이라 일컬어지는 아바타를 덧씌우고 있다. 그것이 갖는 의미의 중대함을 이해하지 못할 헬무트가 아니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오러가 아니라 마도서의 힘을 통해 발휘하고 있는 힘이지요.”
『검은 산양의 서』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아직 데일조차 100%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슈브가 데일에게 준 힘의 형태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아가 아바타를 활용하는 것도 결국 데일이 가진 검(劍)의 경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경악스럽기 그지없으나……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데일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헬무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모르지 않았다. 마도서는 그 자체로 마법사의 검이고, 그중 감히 상상조차 할 없는 ‘특별함’을 가진 몇 자루의 검들에 대해서.
당장에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이 보유하고 있는 『심장의 저울』이 그러하듯이.
“역시 데일 공자님께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작센 공작 각하의 아드님이십니다.”
“아버지 역시 비슷한 힘을 갖고 있나요?”
흑색공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오히려 작센의 검이라 부를 수 있는 헬무트 경이야말로 데일 이상으로 그 남자가 전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잘 알고 있겠지.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헬무트 경이 웃었다. 전쟁터에 강림하는 죽음의 천사. 수천 명의 병사를 ‘삶과 죽음의 저울’에 올려놓고, 그들의 목숨을 결정짓는 무자비함. 누가 감히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말대로다. 지금 데일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조차, 보통의 기사나 마법사에게는 그들의 상식과 평생을 부정하는 행위였으니까. 그럼에도 그 터무니없는 모습을, 흑색공의 아들이란 사실 하나로 납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잡담은 이 정도로 하지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일이 비로소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꺼냈다.
그림자 군주가 칠흑의 마검, 기아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헬무트 경, 아바타를 전개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바타라고 하셨습니까, 공자님!”
그 말을 듣고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함을 참을 수 없는 광소(狂笑)였다.
그리고 그 웃음이, 흑색 괴수의 포효로 바뀌는 것은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 * *
그 시각,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의 모험가 길드.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는 적발의 미녀가 그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모험가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핏빛 로브로도 숨길 수 없는 육체를 과시하며, 마찬가지로 핏빛의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여성이었다.
“부디, 저를 위해 친절하게 도움을 주실 멋진 모험가님을 찾고 있답니다.”
노골적으로 색기를 감추지 않는 목소리.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험가들이 파리 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적발의 미녀, 레이디 스칼렛이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았다.
“후후, 참으로 친절하기도 하셔라.”
입술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송곳니의 서슬을 빛내며.
* * *
코앞에서 중형 전차가 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쿠웅, 쿵!
끝없이 휘둘러지는 헬무트 경의 대검 ‘광기’를 받아치며, 그림자 군주가 입술을 악물었다.
“겨우 이 정도입니까, 데일 공자님!”
그럼에도 칠흑의 괴수는 좀처럼 멈추는 일이 없었다. 이대로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데일의 육체가 두 동강이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이 미터의 대검이 끝없이 휘둘러지고 또 휘둘러졌다.
그때마다 데일이 그의 검을 비껴내고, 동시에 암혈의 갑주를 액체 금속처럼 조종하며 공세를 맞받아치기 바쁘다.
일찍이 성검과 맞설 때, 데일이 승리를 손에 넣은 것은 결국 기아스의 힘 덕이었다. 아울러 칠검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미하일 랭커스터 역시, 결코 칠검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맞부딪치고 있는 칠흑의 괴수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강하다. 말 그대로 격이 달랐다. 감히 100%의 전력을 다하는 성검조차, 이 괴수를 쓰러뜨릴 수는 없으리라.
북부 최강의 기사라는 것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의 그가 이성을 5할 정도 놓고 있는 광전사라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 힘의 가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설령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손에 넣고, 과거의 기억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데일조차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 폭력.
동시에 그림자 군주의 발밑에서 흑청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마력이 마법으로 거듭나 헬무트 경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어둠의 영역을 펼치고 《섀도우 러커》를 생성해도, 흑색 총신에서 끝없는 그림자 총알을 퍼부어도…… 나아가 얼음의 벽과 빙결의 유탄(榴彈)을 투척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도무지 칠흑의 괴수를 휘감고 있는 갑각을 뚫을 수가 없었다.
‘아직, 아직이다.’
이 이상으로 슈브가 주고 있는 힘을 끌어내야 했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암혈의 갑주에 깃들어 있는 진짜 능력을.
심장을 휘감고 있는 네 개의 서클이 가속하며 사상의 갑주에 그 마력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 색은 결코 흑청의 그것이 아니었다. 적색 마력이었다.
네 개의 서클이 일제히 생성하고 있는 일색(一色), 핏빛의 사상.
데일이 휘감고 있는 흑색의 갑주를 따라, 마그마처럼 일렁이는 핏빛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
칠흑의 괴수로 거듭나 있는 헬무트 경이 재차 숨을 삼켰다.
“약속했지요.”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헬무트 경이 보게 될 것들은, 모두 비밀입니다.”
어느덧 마그마처럼 이글거리고 있는 핏빛 마력이, 데일의 흑색 갑주를 휘감고 있었다.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를 휘감고 있는 불꽃, 그 불꽃을 향해 데일이 하나의 사상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걸 보는 것은 헬무트 경이 처음이겠지요.”
이그나이터(Igniter).
마법사의 서클이란 것은 결국 마나를 에너지로 마력을 생성하는 일종의 동력기(Engine)와 같다. 그리고 가령 전생의 세계에서, 대다수 자동차의 동력기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점화 장치’의 역할이 필수 불가결하다.
흡입 · 압축 · 폭발 · 배기의 4행정 사이클.
적색 마력이 꼭 적을 불사르기 위해 사용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전생의 세계에서, 열에너지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고 있는 데일이기에.
마법사를 하나의 기계 장치라고 가정할 경우, 그 기계를 기동하기 위해서 마나 에너지 대신 열에너지(불꽃)를 소비해 동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바로 그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마그마처럼 이글거리고 있는 적색 마력을 데일의 서클에 덧씌웠다.
결코 무리하게 육체와 마법사의 수명을 갉아먹으며 서클을 가속하는 오버클럭이 아니었다.
이계의 메커니즘, 기계 공학을 바탕으로 일말의 리스크조차 없이 투영하고 있는 심상.
열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어, 동력을 발생시키는 열기관(熱機關). 4서클의 RPM을 가속하는 것은 바로 그 이계의 심상이었다.
지금, 열에너지를 이용해 데일의 4개 서클이 십수 배 가까이 가속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력으로 불꽃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불꽃으로 마력을 생성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역발상을 통해서.
‘하이고, 살다 살다 이게 도움이 될 줄 몰랐네.’
SSS급 괴수 사냥꾼으로 거듭나기 이전, 무료하기 그지없는 나날 속에서 막역하게 ‘취업’ 하나를 보고 대학을 골랐었다. 적어도 공대 가서 후회할 일은 없다는 형과 부모의 말에 휩쓸린 덕이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까마득한 과거. 무심코 과거 속에서 그 시절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당장 생각할 것들은 아니었다.
그가 작센의 ‘검은 공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이상, 그 시절의 세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마, 마나가……!”
그 모습을 보고, 칠흑의 괴수가 재차 경악 속에서 숨을 삼켰다.
앞뒤 사정을 알지 못하는 헬무트가 보기에, 아무 까닭도 없이 데일의 마력이 수십 배 가까이 증폭하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마나의 덩어리’가 그림자 군주의 존재를 뒤덮고 있었다.
암혈의 육체를 따라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적색 마력이 심장의 서클을 폭주하고, 청색 마력이 냉각기의 임무를 수행하며…… 암혈의 갑주가 마그마처럼 타오르며 그 힘을 증폭하고 있었다.
자기 존재를 하나의 기계 장치로 받아들이며, 고도로 복잡화되어 있는 이계의 지식을 투영함으로써.
질주하는 중형 전차에 맞서, 데일이 비로소 최신식의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 * *
그즈음, 황실이 비로소 침묵을 깨트렸다.
북부 작센 공작령, 그 너머에서 ‘마왕령’을 개척하고 있는 작센 자작의 업적을 치하하며…… 작센과 랭커스터 사이에 맺어진 대(對) 마족 동맹의 대의를 높게 사, 황실의 핏줄이 몸소 행차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제7황자 모드레드, 그리고 제5황녀 키아라.
펜드래곤의 핏줄을 잇고 있는 두 혈통이, 비로소 성대하기 이를 데 없는 행차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