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 *
북부 마왕령의 지배자, 작센 자작의 영주성.
주기적으로 데일을 찾는 ‘시티 마스터의 밀사’는 그때마다 비밀스러운 암호를 통해 길드 시티의 장부를 이야기했고, 그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밀사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그 말을 입에 꺼낼 때까지는.
“작센의 지혜롭고 총명하신 공자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우리 청색은 그대와의 약속을 이행할 준비를 끝마쳤답니다.”
비밀스럽게 데일과 접촉해야 할 시티 마스터의 밀사가, 마치 청색 마탑에 홀린 사람처럼 그들의 의지를 대행하고 있었다.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탑. 제국이 대륙의 통일 전쟁을 시작하고 끝마칠 때까지 그들은 결코 침묵을 깨트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내가 접촉하고 있는 길드 시티의 밀사를 알아냈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지요. 아무리 필사적으로 비밀을 지키려 해도…… 세상에는 새어나갈 수밖에 없는 소리가 있답니다.”
시티 마스터의 밀사, 동시에 청색 마탑의 꼭두각시가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습니다.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가 열리는 장소를 말씀해 주십시오.”
“아, 이미 의회는 소집되어 있습니다.”
데일의 물음에, 청색 마탑의 꼭두각시가 대답했다. 그 말에 데일이 일순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그리고 데일 공자님께서는 정식으로 의회의 초청을 받은 자로서, 그 자리에 함께 입회할 자격이 있으시지요.”
시티 마스터의 밀사가 말했고, 흡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강풍이 데일을 휘감았다. 딛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 일전했다.
직후, 데일이 땅을 딛고 있는 곳은 작센의 동토(凍土)가 아니었다.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로브 차림의 여성들이 옥좌처럼 우뚝 솟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데일 앞에, 유일하게 비어 있는 하나의 자리가 놓여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시린 냉기의 땅 위에서.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데일 공자님.”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후드 밑으로 ‘요크의 티타니아’가 나직이 미소 짓고 있었다.
소서리스(Sorceress). 이야기 속의 여자 마법사.
티타니아를 제외하고, 나머지 소서리스들은 후드 밑의 그림자로 그녀들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러나 후드 밑으로 요염하기 그지없는 키득거림과 침묵, 경계 등 저마다의 목소리로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부터 몽마와 엘프 등……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이 나라에 의태하고 있는 베일 속의 존재들까지.
‘이들이 바로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탑을 지배하는 실세들.’
공식적으로 ‘청색 마탑’이 존재하는 곳은 대륙 남부 끝자락, 수정의 대지라 불리는 남극(南極)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북부 작센 공작 가와 흑색 마탑의 대칭점이라 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주최하고 있는 의회에 물리적 거리나 위치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환술? 아니다.’
물리적 거리마저 초월해, 흡사 홀로그램의 형태로 참여자들의 의식을 결속하는 고도의 정신 조작 마법. 이것이 가능할 정도의 터무니없는 실력자가 누구일지 헤아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해주었습니다, 작센의 총명하신 공자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일이 앉아 있는 탁자 너머에서 미소 짓는 소서리스가 있었다. 후드 밑으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뒤로하고, 나긋나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어찌하여 의회를 소집했는지, 의회를 대표해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그대가 이 청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자입니까?”
“의장님 앞에서 무례하도다, 작센의 아이여.”
“에르제, 저는 아직 그대의 차례를 허락하지 않았답니다.”
‘의장’이라 불린 소서리스가 말했고 ‘에르제’가 침묵을 지켰다.
“공자님의 물음대로, 제가 바로 청색 마탑의 의지를 대표하는 자랍니다.”
“그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황금의 폭정에 맞서, 그림자의 왕을 기다리고 있는 충성스러운 신하랍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제가 그대들을 소집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입니다.”
데일이 덤덤히 말을 잇는다.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에 맞서 청색은 그림자를 위해 싸우는 기수를 자처하겠다고 했지요. 따라서 저는 ‘그림자의 왕’으로서, 청색 마탑이 저를 위해 수행해 줄 수 있는 충성을 요구하겠습니다.”
“어머나, 자기가 꼭 ‘그림자의 왕’이라도 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달리 의심할 여지가 있습니까?”
“공자님께서도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데일 공자님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공자님이 보여주시는 재능과 자질에 대해서는 깊이 감동하고 있지요.”
청색 마탑주가 말을 잇는다.
“그러나 공자님이 그림자를 대표해 ‘황금의 군주’와 맞서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때가 이르지요. 따라서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 청색 마탑으로서는 침묵을 깨트릴 수는 없답니다.”
“힘을 손에 넣고 나서야 뒤늦게 아첨하고 충성하게 될 기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제가 가장 나약할 때 기꺼이 곁을 지켜줄 자들이니까요.”
데일의 말에 청색 마탑주가 침묵을 지켰다.
“무척 실망스럽네요. 청색 마탑의 충성이란 게 고작 이 정도의 알량하기 짝이 없는 처신이었습니까?”
“참으로 총명하기도 하셔라.”
의장이 즐거운 듯이 웃었다.
“청색 마탑의 ‘침묵’을 공자님이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희 역시 이해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공자님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이미 그림자 군주를 위해 충성을 증명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해야 하는 것들입니까?”
“그렇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요크의 충성에 대해서는 이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요.”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 사실 하나로 족합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나 저의 기다림이 그리 길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기꺼이 명심하도록 하지요. 그럼 슬슬 의회를 소집하신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세피아 님이 청색에 지고 있는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산의 암살자. 사막의 다크 엘프들로 이루어져 속세의 ‘추방자’들을 숙청하는 엘프 사회의 비밀 조직. 소서리스 의회는 그들과 거래해 세피아의 목숨을 지켜주었고, 그 빚을 대가로 그녀의 목숨을 저당잡고 있다. 참으로 유용하기 그지없는 꼭두각시로서.
“어머나. 세피아 양께서는 작센을 떠나, 이제 일말의 접점도 없는 타자가 아니었나요?”
“세피아 님은 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준 스승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설령 그게 그대들의 ‘침묵’ 속에서 벌어진 꼭두각시 놀음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머나, 참으로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네요.”
“사막의 다크 엘프 조직…… 산의 암살자들에 대해, 청색 마탑이 알고 있는 정보와 거래 내용의 일체를 고하십시오.”
즐거운 듯이 미소 짓는 청색 마탑주를 향해, 데일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제부터 세피아 님을 지켜주는 것은 그대들 청색 마탑의 역할이 아니니까요.”
설령 그녀가 이미 데일의 곁을 떠났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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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리스 의회가 소집을 끝마쳤을 때, 데일이 있는 곳은 여느 때의 집무실이었다.
“아, 어, 어어……?”
마찬가지로 시티 마스터의 밀사 역시, 직전까지 무엇이 일어났는지 몰라 당혹스럽게 주위를 둘러볼 따름이다.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물러나셔도 좋습니다.”
그를 향해 작센 자작, 데일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시티 마스터의 밀사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물렸다. 그 직후, 집무실에 홀로 남겨져 있는 데일이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제국 동부 끝자락에 있는 열사(熱砂)의 대지,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의 다크 엘프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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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자작이 다스리고 있는 마왕령의 대미궁, 미궁도시 라비린토스.
그곳을 일대로 ‘마왕의 대지’를 개척하는 사업은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미궁을 공략하는 자, 의뢰를 받아 일대의 마족들을 소탕하는 자, 적재적소에 필요로 하는 이들이 모여 필요로 하는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센 가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령 데일이 그의 용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지라도, 그가 갖추어 놓은 체계 아래 마왕의 대지는 조금씩 그 어둠을 밝혀가고 있었다.
아울러 그즈음. 일찍이 데일이 ‘랭커스터 가’와 약조한 대 마족 동맹을 이행하고자, 새로운 세력이 작센 자작의 땅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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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네요.”
핏빛 머리카락의 미녀가 그곳에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고 있는 적색 제복에 핏빛의 고깔모자를 쓰고서.
“설마하니 이렇게 작센의 공자님을 뵈게 될 줄이야…….”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레이디 스칼렛.
“적색 마탑이 이토록 ‘마족의 땅’을 개척하는 데 열정을 가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시치미를 떼자, 레이디 스칼렛이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어머나, 그럴 리가요. 저희 적색 마탑은 늘 ‘제국의 평화’를 위해 필사적이랍니다.”
나아가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을 뒤로하고, 데일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 마왕령의 지배자이자 작센 자작으로서, 그녀와 적색 마탑이 숨기고 있는 꿍꿍이를 헤아리며.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청색 마탑과 ‘소서리스 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적색 마탑 역시 마왕령의 개척 사업을 도와주겠다는 대의 아래 집결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초대 백색 마탑주의 성유물, 성검이 부서졌다는 것을 깨닫고 ‘백색 마탑’ 역시 침묵을 깨트리겠지.
녹색 마탑을 제외하고 세 개의 마탑이 모여들고 있었다. 동시에 데일은 이 땅의 지배자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작센의 동토, 이 땅이 바로 태고의 어둠을 계승하는 흑색 마탑과 흑색공, 나아가 ‘그림자 군주’의 영지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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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황성의 가장 깊숙한 일실.
“폐하, 옥체 무사하시옵나이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색 마탑주, 핏빛공 유리스 후작의 목소리였다.
“……청색 마탑이 침묵을 깨트리고 ‘그림자 군주’와 접촉을 시도했다는 첩보입니다.”
“그림자라고 했나.”
침묵 속에서, 비로소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과 빛의 제국, 황금의 군주로서 그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자가.
황금의 대제, 아서 펜드래곤 마그누스.
“참으로 송구하오나, 폐하와 황실이 지키고 있는 ‘침묵’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나, 불과 피의 군주여?”
바로 그 제국의 정점에 서는 ‘황금의 대제’가 되물었다. 불과 피의 군주. 지상 유일의 국가를 천명하는 제국의 지배자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말을.
“부디 폐하의 혈육(血肉)…… 황금의 핏줄을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