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36화 (136/301)

136화

* * *

그 시각, 요크 후작령 내에 있는 ‘그림자 법정’의 지하 아지트.

전쟁이 막을 내렸고, 두 차례 장미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은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의 적을 앞에 두고.

성검의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가 그곳에 구속되어 있었다. 아니, 이제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축생이.

“꾸이익, 꾸에에에엑!”

그 남자를 휘감고 있는 것은 돼지의 껍데기였다. 사상의 갑주로서 일체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 그대로 그의 심상 그 자체를 투영하고 있는 껍데기. 이미 오러 하트가 부서졌고, 남아 있는 것은 중심을 잃고 공회전을 거듭하는 오러의 찌꺼기에 불과했으니까.

“모두 물러나라.”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마스터 바로를 필두로 그림자 법정의 모두가 바람처럼 그 모습을 감추었다.

법정에 남겨져 있는 것은 오직 데일과 전(前) 성검사였다.

“이야기를 좀 해볼까.”

데일이 입을 열었다. 소드 벨트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뒤로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꾸, 꾸이익, 작센의 애송이 놈이……!”

돼지머리의 남자가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어색하게나마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비겁하다고?”

데일이 되물었다. 허리춤에 있는 하나의 검을 뽑아 들며.

마왕령의 아티팩트…… 칠흑의 마검 ‘기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백색 칼날이었다.

그날, 데일이 미하일 랭커스터를 쓰러뜨리고 손에 넣은 용사의 옛 애검.

“피스메이커!”

그 애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서, 데일이 돼지머리의 남자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이 검에 깃들어 있는 힘에 대해서 알고 있나?”

동시에 성검사를 향해 피스메이커의 칼끝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성검 뒤랑달이 그러했듯이, 칼끝을 따라서 빛나고 있는 입자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돼지의 왕》을 감싸기 시작했다.

“상처를 치유하고, 살의(殺意)를 막아내고, 부서진 것을 수복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성검의 쌍둥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콰직!

바로 그때, 성검사를 포박하고 있는 쇠사슬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돼지의 껍데기에 불과해야 할 사상의 갑주가, 비로소 그 힘을 되찾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육체를 따라 짐승의 투기(鬪氣)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하, 하하……!”

기사로서의 ‘힘줄’이 잘려버린 성검사에게, 이전의 힘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설령 백색 마탑주의 치유 마법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100%의 전력을 되찾을 수 없다는 뜻이지, 기사로서 아예 검을 쥘 수 없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작센의 애송이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그렇기에 데일은 피스메이커의 힘을 통해 그의 육체를 수복시켰다. 그 느닷없는 행위를 《돼지의 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을 쥐어라.”

그 후 데일이 이름 없는 철검 하나를 넘겨줬을 때, 백작으로서는 무엇 하나 망설이지 않았다. 그저 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 넘겨짚으며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제 발로 죽음을 자초하다니……!”

방금까지의 추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 아니라, 짐승의 투기를 내뿜고 있는 멧돼지가 있었다.

동시에 겨울밤의 세계가 일대를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돼지의 왕》에게 망설일 것은 없었다. 땅을 박차고 질주하며 최후의 기력을 폭발시킬 따름이다.

찰나에 거리가 좁혀졌다. 투신의 검이 휘둘러졌다. 카앙! 휘둘러지는 일검을 데일의 피스메이커가 맞받아쳤다. 동시에 이계의 흉물이 데일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직후, 데일의 몸을 향해 칠흑의 촉수들이 휘감기고 터져나갔다. 흑색의 피가 흩뿌려졌고, 그 암혈(暗血)을 뒤집어쓰며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피의 갑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육체.

검은 공자(Black Prince)가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마법사가 아, 아바타를!”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백작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림자 군주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평화의 중재자를 고쳐 잡고서.

카앙!

방금까지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백을 담고 그림자 군주의 검이 휘둘러졌다.

동시에 흑색의 갑주 위로, 헤아릴 수 없는 칠흑의 꼬챙이들이 액체금속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

푸욱!

그림자 망토가 그러하듯, 자유자재로 형태를 조종하며 공수일체의 기예를 펼치는 암혈의 갑주. 백작이 다급히 거리를 벌렸으나, 갑주에서 솟은 흑색 피의 꼬챙이가 돼지의 육체를 파고들고 있었다.

“꾸에에에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있을 리가 없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피할 수 없는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 겨울밤을 기억하고 있나?”

수백 개의 흑색 꼬챙이를 꽂아 넣고 있는 암혈의 갑주. 그 갑주 속에서, 무척 낯설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일의 희미하게 애티가 어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뭐, 뭐라고?”

다시금 암혈의 갑주를 따라 무엇이 솟아났다. 꼬챙이가 아니라, 육체를 포박하기 위한 촉수였다. 촉수가 백작의 팔다리를 묶고 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옥죄이기 시작했다.

다시금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것을 정녕 갑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것은 그 자체로 이미 또 하나의 검이었다.

“이게 대체…….”

백작이 고통 속에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국 제일의 천재, 작센의 데일을 칭송하는 말에 대해서는 이미 질릴 정도로 들어왔다. 나아가 ‘검은 공자’의 실체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괴물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데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괴물의 영역마저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도무지 저 존재를 형용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제국의 자랑스러운 전쟁 영웅을 죽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아, 그러셔?”

푸욱!

바로 그때였다. 성검사의 등 뒤에서,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싸늘한 쇠붙이의 감촉이다. 가슴을 찢고 튀어나와 있는 피스메이커의 칼날 끄트머리가 보였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영웅이, 뒤통수에 칼이 꽂혀 뒤졌다는 걸 그새 잊어버리셨나?”

마치 그날의 겨울밤처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비로소 머릿속의 퍼즐 조각이 들어맞았다.

처음부터 ‘검은 공자’가 가진 것은 재능 따위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멧돼지의 얼굴이, 겨울밤의 밑바닥처럼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그림자 군주’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너희 제국은 나를 통해 대가 없는 평화를 손에 넣었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찾아왔지.”

성검사가 등 뒤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린다.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는 머저리 필립에 의해 계승될 것이고, 그 머저리를 조종하는 것은 요크가 아니라 우리 작센 가의 몫이 될 것이다. 네가 자랑하는 백작 가의 미래가 맞이할 파국이 대충 상상이 되나?”

암혈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이계의 용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성검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바람소리를 내뱉고 있을 따름이었다.

“함께해서 좆같았고,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이계의 용사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 * *

“허미, 백색 마탑이 게거품 물고 지랄할 모습이 벌써 그려지네.”

성검의 시체를 앞두고, 마스터 바로가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렴 어때.”

* * *

“세피아 님.”

요크 후작성, 세피아가 머물고 있는 일실을 향해 데일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들어오거라.”

머지않아 세피아가 대답했고, 데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작센 공작령으로 돌아갈 채비가 되었어요.”

그날의 일을 뒤로하고, 두 차례 장미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었다. 이제 ‘검은 공자’는 작센 자작으로서 마왕령에 돌아가 그의 의무를 수행할 때였다.

여느 때처럼 그의 곁을 지켜주는 엘프 세피아와 함께.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그곳에 있는 세피아의 대답을 듣고 나서, 데일 역시 그 의미를 직감할 수 있었다.

“……공작 가를 떠나시는 겁니까?”

데일이 물었고, 세피아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세피아 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세피아의 결의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 어째서 제 곁을 떠나시는 거죠?”

데일이 되물었다. 세피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일 역시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세피아는 이 이상 데일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니까.

“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데일의 말에 세피아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침묵 끝에 데일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세피아가 힘겹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약속하마.”

그 말에 비로소 데일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미소 지으며 데일이 말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포옹하고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망을 뒤로하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세피아 선생님.”

“나 역시 너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세피아가 미소 지었다. 어느덧 그녀는 홀로 떠나게 될 여정의 채비를 마친 뒤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데일이 말했다. 세피아가 말없이 미소 짓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멀어지는 세피아를 뒤로하고, 그러나 데일이 등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머지않아 세피아가 떠나고 나서, 데일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가슴속에서 사무치는 시린 냉기와 고독을 뒤로하고, 그저 홀로 덤덤하게.

* * *

그로부터 얼마 후.

두 차례 장미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고, 그러나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2차 장미 전쟁’의 활약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며…… 데일이 그의 영지로 돌아왔다.

그가 손에 넣은 전리품을 아버지 흑색공과 나누며, 세피아의 공백을 애써 뒤로하고.

마왕령을 지배하는 ‘작센 자작’으로서, 북부 개척 사업 역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록 미하일 랭커스터가 데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작센과 랭커스터 사이의 대(對) 마족 동맹 역시 이행되었다. 적어도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보기에, 아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어디까지나 요크의 요녀들이었으니까.

동시에 적색 마탑 역시 대 마족 동맹의 대의에 숟가락을 올리며, 북부의 영지로 향했다.

그즈음, 요크의 티타니아가 약속했듯이 ‘소서리스 의회’를 열기 위해 청색 마탑의 사자가 북부 마왕령을 찾아왔다. 설령 세피아가 이 이상 작센 공작 가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데일에게 망설임의 여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공식적으로’ 성검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아들 필립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러나 필립에 의해 구출되었을 즈음, 백작의 부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고, 결과적으로 ‘검은 공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셈이 되었다.

초대 백색 마탑주의 성유물, 성검 뒤랑달이 부서지는 것과 함께.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백색 마탑이 아니었다.

어느덧 요동치기 시작하는 대륙의 정세는, 착실하게 그 심지가 타오르며 폭발을 일보 직전에 앞두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