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35화 (135/301)

135화

* * *

“커헉……!”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후의 일격. 칠흑의 칼날이 용사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귀검 세필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무게를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어이쿠, 이런 시펄.”

마스터 바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그림자 군주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어째, 서……!”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림자 군주가 되물었다.

“파이트 클럽에서 미하일 공자님이 그랬듯이, 최후의 최후에 제 칼날이 멈추리라 생각했습니까?“

“아, 아아…….”

“그날, 미하일 공자님이 저를 죽이지 않은 진짜 이유를 알려드리지요.”

이 세상의 어둠 그 자체를 응축시켜 놓은 칠흑의 아바타 속에서.

“미하일 공자님에게는 처음부터 ‘죽을 각오’가 없었습니다.”

“……!”

“그렇기에 동등한 피의 무게를 가진 저를 죽일 수 없었지요. 공작 가의 혈육을 죽이는 것은 곧 미하일 공자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그날, 미하일 공자님이 절대로 저를 죽이지 못할 거란 확신을 가진 이유입니다.”

미하일이 데일을 죽이지 못한 것은 ‘공작 가의 사람’으로서 흐르고 있는 피의 무게에 짓눌린 까닭이었다. 역설적으로 데일을 죽여 그 피의 무게를 부정하는 것은, 곧 미하일의 피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이 세계에서 피의 무게는 동등하지 않고, 그 불공평함 속에서 감히 ‘공작 가의 혈육’을 죽일 자 따위는 없다고 믿었겠지요.”

“비, 빌어먹을 애새끼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세상을 우습게보고 있는 것은 그대 쪽이었다고.”

고통 속에서 용사의 가죽을 두르고 있는 미하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며, 예외란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공작 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지요.”

잡병들의 목숨이 벌레처럼 죽어 나가는 전쟁터 속에서도, 귀족과 그의 자제들은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아 몸값을 주고받는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다. 하물며 일개 기사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피의 무게가 다르니까.

미하일 랭커스터는 결국 그 불공평함의 수혜자로서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는 ‘공자님’이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아래서 용사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바닥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용사의 최후가 그곳에 있었다.

“감히 랭커스터의 피에 손을 대고도 네, 네놈이 무사히…….”

용사, 미하일 랭커스터가 힘없이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이상 그의 말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과거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자 군주에게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칠흑의 칼날이 휘둘러졌고, 그것이 끝이었다.

데일이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미하일과 장미십자 기사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겨울밤의 세계에 군림하는 신이자 그림자 군주로서.

그의 곁을 지키는 레이디 섀도우,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 살검 마스터 바로가 그곳에 있었다.

랭커스터 측 최후의 하나, 귀검 세필리아를 향해서.

“허허, 보아하니 아줌마 처지가 영 좋지 않게 돼버리셨소.”

“입 닥쳐라, 빌어먹을 제비 새끼야.”

철십자 기사들의 부수장이자 제국의 전쟁 영웅 중 하나. 세필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당장에라도 기사로서 전력을 다하기 위해 청색의 오러가 그녀의 몸을 따라 휘감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림자 군주,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를 휘감고 있는 칠흑의 아바타를 해제하며.

“……!”

“그저 약속을 하나 해주십시오.”

“약속이라고 했나, 망할 애송아.”

세필리아가 귀기를 거두지 않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의 ‘검은 공자’와 그림자 법정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미하일 공자님을 쓰러뜨린 것은 어디까지나 ‘요크의 티타니아’이며, 세필리아 경께서는 바로 그 행위의 목격자가 되신 겁니다.”

“내가 순순히 네놈 말에 따라줄 것처럼 보이나?”

“허허, 이 아줌마 성깔하고는 참.”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사람이 말이여, 어? 대가리 박을 때는 모름지기 싸게싸게 박아야 하는 법이여.”

“기꺼이 네놈 대가리를 잘라서 땅에 처박아줄 용의는 있다.”

“바로, 부탁이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라.”

데일이 어이가 없어서 쏘아붙였고, 그대로 세필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하일 공자님의 말마따나, 이 세계에서 목숨의 무게는 동등하지 않지요.”

그리고 귀검 세필리아의 등 뒤에 있는 것은 ‘일개 공작’ 따위가 아니다. 제국 제일의 기사 조직, 바로 그 조직의 부수장을 맡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지금 시점에서 귀검을 죽이는 것은 당장 황실을 적으로 돌리는 최악의 악수가 되리라.

‘무엇보다 이 전력으로 죽일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칠검이라고 해서 다 같은 칠검이 아니다. 두 사람의 사이와 별개로, 그것이 바로 귀검 세필리아의 진짜 힘이었으니까.

“설령 내가 당장 네 제의를 받아들이고, 후에 진실을 고발할 때는 어쩔 셈이지?”

“저는 기사로서의 세필리아 경을 믿고 있습니다. 제국이 자랑하는 긍지 높은 기사 조직의 부수장으로서 말이지요.”

적어도 ‘이계의 용사’가 기억하고 있는 세필리아 경의 기사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녀가 진실을 고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때는 그때 나름의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으니까.

“그저 철십자 기사의 이름에 맹세해 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게 다입니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하일 랭커스터는 티타니아와 요크의 군세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이것이 내가 목격한 진실이다.”

침묵 끝에 세필리아 경이 입을 열었다.

“그걸로 됐습니다.”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겨울밤의 세계가 사라지고, 어느덧 그곳은 요크와 랭커스터의 군세가 격돌하고 있는 전쟁터 속이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상황은 이미 데일의 계책에 의해 고립 상태를 맞이한 랭커스터 측의 압도적 수세였다. 그저 요크의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랭커스터를 몰살하고 있는 살육의 장에 지나지 않았다.

랭커스터가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제2차 장미 전쟁’의 막이 내려졌다.

* * *

저물녘 어스름이 내려앉았고,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까마귀 떼가 포식을 맞이하고 있었다.

승리를 손에 넣은 요크의 수뇌 역시 가까이 있는 요새의 일실에 집결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그러나 데일의 입을 통해 ‘미하일 랭커스터가 맞이한 진실’을 들었을 때는, 제아무리 천하의 미스트리스 티타니아라 할지라도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말씀대로입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미하일 랭커스터 공자님께서는 티타니아 님과 요크의 군세에 맞서 맹렬히 저항하다 전사했으며, 귀검 세필리아께서 그 행위의 목격자가 되셨습니다.”

“지금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데일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감히 흑색의 후계자를 꼭두각시처럼 가지고 놀고도,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처음에는 미하일의 손에 의해 일방적으로 놀아났고, 그다음 데일을 꼭두각시처럼 부린 것은 요크의 티타니아였다. 그렇기에 훗날 위협의 여지가 될 싹 ‘미하일 랭커스터’를 잘라내고 그 책임을 뒤집어쓰는 것은 오롯이 요크의 몫이 되리라.

“……!”

“그러나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랭커스터의 후계’를 잇게 될 자는 오직 하나, 장남 리처드 공자님이 되실 테니까요.”

데일이 말을 잇는다.

“아울러 저희 작센 가는 기꺼이 ‘요크의 도움’에 응답할 용의가 있답니다.”

미하일이 믿고 있는 것은 결코 아무 까닭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요크 가가 입게 될 정치적 타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교활하시네요.”

그러나 동시에 얻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대외적으로 장남 리처드는 ‘요크의 꼭두각시’이며,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궁지에 몰린 랭커스터 가도 함부로 요크를 어쩌지 못할 테니까. 적어도 티타니아는 그 사실을 헤아릴 정도의 지혜를 갖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내 미소와 함께 평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제가 데일 공자님의 그릇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모양이네요.”

“칭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데일이 남의 일처럼 웃었다.

“그리고 당초의 거래대로,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는 약속을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요크를 위해 승리를 손에 넣고, 그 대가로 소서리스 의회를 소집하겠다는 두 사람 사이의 약속.

“우리는 약속을 이행할 것입니다.”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앞서, 소서리스 의회를 소집하고자 하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것은 그때 가서 알게 될 겁니다.”

데일이 쉽사리 카드를 내보여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티타니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때가 되었을 때, 작센 공작 가에 우리의 사람이 갈 겁니다. 공자님이 알 수 있는 형태로 말이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일말의 주저도 없이 등을 돌렸다.

“모처럼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가 열리는데, 조금 더 머물지 않으시겠어요?”

“유감스럽게도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약속대로 승리를 손에 넣고, 오직 데일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 전쟁에서 손에 넣은 전리품. 미하일의 죽음, 요크 가의 정치적 종속, 나아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부자까지.

지금의 데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손에 넣은 것을 헤아리고, 조용히 다가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청색 마탑이 비로소 그들의 침묵을 깨트릴 때를.

* * *

제1차 장미 전쟁은 데일의 활약을 통해 일방적으로 랭커스터 측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데일이 떠나고 나서 벌어진 제2차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 가의 손실이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랭커스터의 승리는 ‘검은 공자’의 공이었으며, 그가 사라지고 나서 돌이킬 수 없는 대패를 경험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검은 공자’의 이름이었다. 그가 전쟁터에서 가지는 무게와 가치, 제1차 장미 전쟁에서 제국의 전쟁 영웅 성검마저 사로잡은 터무니없는 활약에 대해서.

* * *

천검 랭커스터가 그곳에 있었다.

그 무엇보다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운 아들, 미하일 랭커스터의 시체 앞에서.

동시에 요크 가에서는 랭커스터의 죽음을 두고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유감과 더불어, 랭커스터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볼모로 내밀었다.

당장에라도 요크의 계집들을 도륙하고 싶은 천검의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장남 리처드의 존재였다.

이대로 요크의 꼭두각시가 되어 몰락 일로를 걷게 될 랭커스터 가의 미래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미하일 랭커스터’의 진짜 모습을 깨닫지 못한 아버지로서, 나아가 데일이 짠 무대 위의 장기 말로서……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입술을 악물었다.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레이디 스칼렛이 그에게 찾아온 것은 바로 그즈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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