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34화 (134/301)

134화

* * *

불과 빛의 사도, 미하일 랭커스터의 몸을 따라 빛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피를 대신해 흘러내리는 마그마가 용암석처럼 응고되고, 나아가 그의 육체 전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저것은…….’

사상의 갑주는 곧 사용자의 신념 그 자체를 투영하고 있는 심상의 갑옷이다. 그리고 그 형태는 결코 꼭 하나의 형태를 가지리란 법이 없다. 당장에 ‘레이디 섀도우’ 오렐리아의 아바타가 수없이 바뀌고 바뀌어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듯이.

“평화입니다.”

휘몰아치는 빛무리 속에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 평화였습니다. 일찍이 이계의 용사가 그러했듯이 말이지요.”

또다시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고서.

“이계의 용사가 이 세계에 가져온 것은 평화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뱉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국의 일개 부외자에 지나지 않는 ‘작센 가’의 험담에 불과하겠지요.”

미하일 랭커스터가 조소했다. 그러나 그 말에 당장에라도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사람은 데일이었다.

‘내가 바로 그 용사다, 이 빌어먹을 애새끼야.’

목구멍까지 치솟고 있는 그 말을 집어삼키며, 데일이 평정을 가장했다.

휘몰아치는 빛의 폭풍 속에서, 어느덧 미하일 랭커스터의 ‘아바타’가 뒤틀리고 있었다. 불과 빛의 사도, 태양의 기사로서 그가 품고 있는 사상이…… 제2의 형태를 향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계의 용사는, 이 대륙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평화의 초석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의 힘을 통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 형태를 보고 나서,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어릴 적, 제국의 영웅으로 활약하는 용사의 모습을 저는 절대로 잊을 수 없었습니다.”

“……!”

“이계의 용사는, 그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저의 우상이었지요.”

미하일 랭커스터의 아바타가 갖는 제2의 형태, 그가 쌓아 올린 사상의 갑주는 결코 알기 쉬운 갑옷의 형태가 아니었다.

“저는 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계의 용사 한성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고쳐 쥐고서.

제국의 사냥개, 평화의 괴물이 비로소 그의 모습을 드러냈다.

데일의 과거, 전생의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바라는 사상의 종착점.

그저 용사의 모습을 보고 나서, 데일의 가슴속을 메우는 것은 오직 하나의 확신이었다.

‘절대로 살려둘 수 없다.’

제국의 사냥개로서 일평생을 희생했다. 그렇기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저 남자, 미하일 랭커스터가 상상하는 평화와 그가 바라는 우상이 얼마나 그릇되고 뒤틀려 있는 존재일지.

이계의 용사가 그의 애검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계의 용사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용사의 가죽을 두르고 있는 광신자에 불과했으니까.

불과 빛의 사도이자, 이계의 용사가 땅을 박찼다. 상상을 초월하는 신속이었다. 이전까지 보여주고 있는 아바타의 형태와 비교를 불허하는 압도적 속도와 파괴력.

그러나 결코 용사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카앙!

휘둘러지는 피스메이커의 일검을, 데일의 마검 ‘기아’가 맞받아쳤다. 맞받아치는 동시에 용사가 데일의 품속을 향해 파고들었다.

‘…….’

카앙!

그러나 미하일, 용사의 노림수를 데일이 받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타앗!

이어지는 용사의 일격, 미하일 랭커스터가 쌓아 올린 사상의 결정체가…… 너무나도 덧없이 데일의 검에 막히고 있었다.

‘어째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힘. 절대로 패배할 리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 있는 용사의 아바타가, 너무나도 없어 데일의 검 앞에서 가로막히고 있었다.

검을 추구하지도 않는 일개 마법사의 검 앞에서!

그때와 같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발악해도 닿을 수 없는 파이트 클럽에서의 결투와 같았다.

‘대체 어째서……!’

미하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가 투영하고 있는 신념, 이계의 용사가 바로 그의 앞에 있는 ‘데일’의 진짜 모습이란 사실을.

하물며 미하일 랭커스터가 발휘하는 것은 결코 용사로서 100%의 전력조차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모습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열화품.

아마 그로서는 상상조차 못 하리라. 차라리 ‘태양의 기사’로서 전투에 임했을 때의 힘이야말로, 지금의 데일이 두려워하는 그의 진짜 힘이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랭커스터는 자기(自己)를 버리고 타자의 사상으로 자신을 뒤덮었다. 그 의미를 오롯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모조품을 자처하며.

“정말로 그것이 당신의 신념입니까?”

미하일 랭커스터의 검을 맞받아치며 데일이 되물었다. 칠흑의 마검 ‘기아’가, 너무나도 여유롭게 그의 일검을 튕겨내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것일까. 미하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의 패배 이후, 공허로 가득 차 있는 그의 검을 버리고 미하일 랭커스터는 결의를 내렸다. 천하의 ‘검은 공자’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을 찾아서.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비로소 그가 쓰고 있는 ‘고결함’의 마스크를 내팽개치며, 미하일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의 삶은 승자의 삶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삶의 성공이 정해져 있는 승리자의 가도. 그저 그 길을 걷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겨우 이 정도입니까?”

휘둘러지는 미하일의 일검을 받아치며,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바로 그 표정이다. 그날, 파이트 클럽에서 미하일을 압도할 때의 표정.

그림자 의수를 따라 데일이 칠흑의 검 ‘기아’를 고쳐 잡았다. 나아가 미하일이 용사의 검을 되새기며 휘둘러지는 일검 하나하나를, 그야말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받아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참으로 추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미하일 랭커스터를 향해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앞에 있는 과거의 ‘자기’를 일컬고 있는 조롱이었다. 비록 미하일이 그 의미를 이해할 리 없었으나.

아무리 발악하고 발버둥을 쳐도, 미하일의 칼끝이 데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미하일이 내릴 수 있는 최악의 악수(惡手)란 사실을 깨달을 날은 오지 않으리라.

미하일이 바란 동경의 대상이자 사상의 종착점, 그것이 겨우 일개 용사의 모조이자 열화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작센의 장남 따위가 감히 용사의 이상(理想)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

“용사의 이상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상이라,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데일의 머릿속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동시에 ‘제국의 사냥개’로서 복종해야 하는 굴욕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에라도 이성을 마비시킬 것 같은 증오 속에서,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데일이 말했다.

“그럼 그 용사의 이상이 가지고 온 결말을 들려드리지요.”

그렇기에 데일로서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 이때를 기다렸어.

데일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칠흑의 촉수가 속삭였다. 무엇을? 데일이 미처 되물을 틈조차 없었다.

─ 믿어줘, 나는 절대로 오빠가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을 거야.

촤아아악!

용사의 검에 맞서, 어느새 데일의 곁에 있는 촉수의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였다. 그리고 그 소녀의 치맛자락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계의 용사, 미하일 랭커스터가 아니라, 그녀의 곁에 있는 ‘검은 공자’를 향해서.

“……!”

데일이 미처 당혹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촉수가 데일의 머리를, 팔과 다리를, 나아가 그의 육체 전부를 집어삼켰다. 그것은 결코 데일의 의지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데일의 마도서 『검은 산양의 서』가 보여주고 있는 제멋대로의 횡포.

일방적으로 슈브의 촉수에 휘감겨서, 호흡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데일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동시에 데일을 휘감고 있는 촉수 하나가, 달콤하게 그의 귓가를 향해 파고들었다.

─ 나는 그저 오빠가 조금 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직시할 수 있길 바라.

슈브가 속삭였다.

─ 설령 그게 아무리 끔찍하고 뒤틀린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촤아악!

그와 동시에, 데일을 휘감고 있는 촉수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촉수 속에 있는 칠흑처럼 검고 어두운 흑색의 피가 흩뿌려졌고, 그 속에 있는 데일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처럼, 그림자 망토 속에 공작 가의 의복을 입고 있는 ‘검은 공자’가 아니었다.

“……!”

이계의 용사에 맞서고 있는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밤까마귀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흑색의 갑주가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개 갑주가 아니었다. 마치 데일의 육체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매끄럽게 기동하며, 흡사 ‘그림자 의수’처럼 육체 일부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하고 있었다.

흑색의 갑주 위로, 그림자 망토가 실루엣처럼 그 육체를 휘감고 있었다. 나아가 망토 위로 꿈틀거리는 칠흑의 촉수 다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림자 군주, 흑색의 사도. 이 세상의 어둠 그 자체를 응집하고 있는 것 같은 칠흑의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사상의 갑주, 아바타.

그러나 그것을 덧씌운 것은 결코 데일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칠흑의 촉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쇄도하고 있는 이계의 용사에 맞서, 그림자 군주가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에 들린 칠흑의 마검이 맞부딪쳤다.

‘겨우 이 정도였나?’

아바타를 전개하기 전에도 이미 미하일 랭커스터는 데일의 상대가 아니었다. 과거의 열화, 그저 일개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그가 ‘오리지널’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이르러서…… 대륙 칠검(七劍)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미하일 랭커스터는 데일의 상대조차 아니었다.

너무 느리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설령 그가 지금의 아바타를 포기하고, 태양의 기사로 돌아가도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어디까지나 마법사여야 할 데일이, 그의 세계 속에서 검의 궁극이라 일컬어지는 ‘아바타’를 투영하고 있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허미, 쉬펄.”

“……!”

두 사람의 대결을 뒤로하고 치정 싸움에 여념이 없는 두 칠검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데일의 몸에 휘감겨 있는 사상의 갑주, 그것이 의미하는 무게를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미하일 공자님.”

그림자 군주가 나직이 고개를 들었다.

“이쯤에서 항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치 이 이상의 싸움에 의미는 없다는 듯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지요. 그리고 그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 미하일 공자님께서는 결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

데일이 말했고, 미하일이자 ‘이계의 용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용사의 그것에 비해 너무나도 볼품없는 쇄도였고, 나아가 아바타를 덧씌우고 있는 데일 앞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애들의 놀이와 같았다.

‘애들 놀이라.’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휘둘러지는 이계의 용사, 과거의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를 앞두고 데일이 취할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촤아악!

그림자 군주의 일검이 휘둘러졌다. 불과 빛의 사도, 이계의 용사마저 피할 수 없는 치명적 일격.

미하일 랭커스터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와 같이 상처를 수복할 수 있는 레벨조차 아니었다.

그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그마처럼 끓고 있는 피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피였다. 일찍이 과거의 데일이 그날의 겨울밤 속에서 흘린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치명(致命)의 출혈을.

“어째서…….”

이계의 용사가 사라지고, 비로소 미하일 랭커스터가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거지……?”

“닿았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적어도 그대가 ‘미하일’로서 존재할 때까지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계의 용사는…….”

미하일이 힘겹게 말을 잇는다.

“나, 나 따위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이 제국에 진짜 평화를 가지고 온 나의 우상이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미하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일이 미하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계의 용사는 그저 제국의 뜻대로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

“애초에 그에게 제국의 평화와 애국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지요.”

그림자 군주의 아바타 속에서, 데일이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하일 공자님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바람……?”

“그대의 말마따나, 저는 궁극적으로 이 세계의 ‘평화’를 손에 넣을 테니까요.”

데일이 말했다. 미하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아래서, 그림자 군주의 검이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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