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전황이 뒤집히는 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일이었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필립의 ‘기동 방어 부대’를 요격하고자 핵심 전선을 이탈하고 있는 사이, 틈을 노리고 데일과 요크 가의 정예 병력이 일점 돌파를 감행했다.
아울러 ‘검은 공자’가 지휘하는 요크 가의 핵심 부대에는 요크의 요녀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그녀들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늘 속에서 그녀들이 ‘전투’에 미치는 영향력이란 결코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었다.
청색 마탑의 마법이란 결코 물이나 얼음 따위를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각양각색의 정신 조작과 세뇌, 환술(幻術)…… 그 이름처럼 모략과 거짓의 지혜를 추구하는 탑이니까.
세뇌란 것이 꼭 적들을 향해 가해질 필요는 없다.
“요크 가를 위하여!”
“절대로 쓰러지지 마라!”
가령 정치 장교가 병사들에게 국가의 사상과 애국심을 주입하듯이, 의도적으로 특정 가치 체계를 주입함으로써 신념을 부여하는 것.
“그대들의 신념을 위해 싸우도록 하세요.”
“요크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답니다.”
“요크의 영웅으로서, 이 세상이 그대의 활약을 칭송하고 떠받들게 되는 미래를 상상해 보세요.”
청장미 기사들의 검을 따라 빛나고 있는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 그러나 그 검을 사용하고 있는 기사들의 경지는 결코 오러 나이트의 수준이 아니었다. 높게 쳐줘도 일개 오러 비기너 정도이리라.
그러나 일개 오러 비기너가, 기사로서 쌓아 올린 사상의 결정체 ‘오러 블레이드’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요크의 요녀들이 갖는 진짜 힘을.
정신 조작, 세뇌. 거짓 사상을 주입함으로써 빛나게 하는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
서큐버스라 불리는 종족들에게 알기 쉬운 악마의 날개나 꼬리 같은 것은 달려 있지 않다. 더욱이 서큐버스가 갖는 진짜 무서움이란 궁극적으로 남자를 홀리는 여자로서의 매력 따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사람을 홀리게 하며, 그들의 정신을 손바닥 뒤집듯 조작하고 다룰 수 있는 세뇌야말로 그들의 진짜 힘이었으니까.
요크의 마가릿과 캐서린, 그 외 영애들의 손을 통해서 일개 오러 비기너를 ‘오러 나이트’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울러 요크 후작 가의 흑막, 미스트리스 티타니아의 손으로 주입하는 사상의 결과물이 그곳에 있었다.
오러 마스터, 아바타라 일컬어지는 사상의 갑주를 투영하고 있는 기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대들이 바로 우리 요크 가의 영웅이랍니다.”
몽마의 여제가 쌓아 올린 ‘거짓의 사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사들이.
“아아, 우리는 결코 그대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거예요.”
티타니아의 말에 이끌리듯, 기사들이 일제히 아바타를 전개하며 요크의 명예를 부르짖었다. 필시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의 영웅이 되어 칭송받는 장밋빛 미래가 그려지고 있겠지.
설령 그것이 찰나의 백일몽이라 할지라도.
‘이게 바로 요크 가의 진짜 힘이었나.’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티타니아의 말처럼, 전쟁은 결코 규격 외의 강자들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란 의미를.
기사의 오러는 결국 사상의 결정체이며, 요크의 요녀들은 그녀들의 정신 조작 능력을 통해 그 ‘사상’을 주입하고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정신과 신앙심을 고취함으로써 사상을 강화하는 백색 마탑의 찬가 마법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제야 비로소 제1차 장미 전쟁 당시,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보여준 여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적으로 돌리고 끝까지 맞서 싸웠을 경우, 데일조차 100%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지략.
이미 데일의 노림수를 통해 전략적 이점을 손에 넣은 상황에서, 요크의 일족들이 보여준 힘이란 데일이 상상하는 것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당초 가정하고 있는 부대 전력이 몇 배 가까이 향상되었으니까.
‘적으로 돌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데일이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데일은 승리를 손에 넣을 것이고, 티타니아와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는 그들의 약속을 이행할 테니까.
* * *
일점 돌파를 통해 랭커스터 측의 후방을 장악하고, 전황은 어느덧 요크 측이 랭커스터의 군세를 앞뒤로 포위하는 형국이 되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요크의 요새와 수성 병력이고, 넓고 길게 흩어져 있는 랭커스터 측의 부대 후방을 장악한 것은 ‘검은 공자’와 티타니아가 지휘하는 요크의 정예, 청장미 기사수도회의 몫이었으니까.
뒤늦게 미하일의 정예 부대가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주요 전선 전체가 각개격파 끝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고 나서였다.
미끼를 통해 전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자들의 발을 묶고, 그 틈을 타 적의 취약 지점을 노린 일격.
곳곳에서 ‘검은 공자’의 지휘하는 기병대가 나타날 때마다, 랭커스터의 부대가 몰살당하고 피바다가 펼쳐졌다. 그야말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한 종횡무진의 활약이었다.
뒤늦게나마 랭커스터 측에서는 남아 있는 부대 모두를 집결시켜, 최후의 회전(會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백적의 장미를 새겨넣은 장미십자 기사들이 일제히 돌격했고, 그에 맞서 청장미 기사수도회의 기병들이 질세라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쟁의 끝자락에 이르러, 최후의 쐐기를 박기 위한 주력 부대의 격돌.
요크와 랭커스터의 두 영지가 맞닿고 있는 평지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일찌감치 구릉 위에 자리를 잡고 여유를 부리는 요크와 달리, 촉박함을 참지 못하고 공세를 취한 것은 랭커스터의 쪽이었다.
장미십자 기사들이 자랑하는 기동력을 살린 기병 돌격이 이루어졌고, 청장미 기사들이 하마(下馬)하며 방어의 태세를 굳혔다.
‘검은 공자’ 역시 그곳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양익의 궁병들 사이에 숨어 암약하는 저격수로서.
타앙!
철과 철이 맞부딪치고 피와 살이 흩뿌려지는 전쟁터에서, 그 사이로 내리꽂히는 저격용 라이플의 존재를 깨닫기란 설령 ‘오러 마스터’의 기사들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쏟아지는 화살 세례 사이에 숨어 있는 일발의 ‘섀도우 불릿’이 기사들의 골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마음 같아서는 개틀링식을 투영하고 싶은데…….’
어디까지나 ‘검은 공자’는 공식적으로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데일의 활약을 발뺌하기 위해서는 과도하게 꼬투리가 잡힐 행위를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요크를 위하여!”
머지않아 랭커스터의 기병들이 구릉지를 오르며 양측 부대가 충돌했다. 장미십자 기사와 맞서는 제1열의 청장미 기사들이 광신(狂信)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돌격하는 랭커스터의 기사들이, 적백의 빛을 휘감으며 ‘아바타’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는 공작 가의 차남, 미하일 랭커스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불과 빛의 사도, 태양의 기사를 상징하는 적백의 기사.
‘올 게 왔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데일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공작 가의 차남을 상대하는 것은 우리 몫이 될 것이다.”
“존명(尊命).”
말하고 나서, 그림자 저격수가 침묵 끝에 몸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기 위한 ‘그림자 군주’로서.
데일의 등 뒤를 따르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살수들이, 바람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 * *
태양의 코로나를 보는 것 같은 순백의 빛이 폭발했다.
제4의 물질이라 불리는 플라스마, 바로 그 플라스마를 무기로 삼아 휘둘러지는 태양의 폭풍.
마치 21세기의 폭격이 내리꽂히는 것 같은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양측의 대부대가 대치하고 있는 와중,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일대의 것들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의 공백 지대가 펼쳐졌다.
말에서 내려 방패를 들고 있는 청장미 기사들의 방어 대형이 그대로 일소되었고, 미하일이 망설임 없이 그의 부하들과 공백의 전열을 돌파하기 위해 질주했다.
바로 그때였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살기에 미하일과 휘하의 장미십자 기사들이 방어 태세를 굳혔다.
바람이 불었고,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 사람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흑색 코트 차림에 새 부리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림자 법정…….”
그들을 보고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검은 공자’께서도 함께 하고 계시는 모양이네요.”
“…….”
침묵이 내려앉았다.
“의뢰를 받았습니다.”
침묵 끝에,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저 고객의 의뢰를 수행하는 일개 범죄 조직에 불과하지요.”
“누구의 의뢰입니까?”
“영업 비밀입니다.”
규격 외의 강자, 미하일 랭커스터와 휘하의 장미십자 기사들. 그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비대칭 전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랭커스터 대공께서는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타 영지를 침략하는 데 검(劍)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지요.”
“정작 그러시는 아드님께서는,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남의 영지를 침략하고 계시네요.”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 하나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사상의 세계를 펼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를 향해 미하일이 되물었다.
“공자님…… 아니, 그대가 가진 ‘피의 무게’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전력을 다해 임할 겁니다.”
불과 빛의 사도로서, 플라스마가 타오르고 있는 ‘용사의 검’을 고쳐 잡았다. 미하일을 따르는 장미십자 기사들 역시 일제히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평지에서, 살수(殺手)로서 갖는 이점조차 없는 정정당당한 결투. 게다가 숫자 역시 랭커스터 측의 압도적 우세다.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로서도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결코 그들이 싸우게 될 전쟁터가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새 부리 마스크의 암살자 하나가,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발밑을 따라 흑청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미하일 랭커스터와 장미십자 기사들, 나아가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 모두를 집어삼키는 ‘겨울밤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 우뚝 솟은 칠흑의 성채, 성의 화로 속에서 불씨들이 춤추고 있는 그곳으로.
사상의 세계, 마법사로서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사 항전의 의지.
“어으, 시펄. 뼈가 다 시리네.”
그 풍경 속에서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 하나가 어깨를 떨며 입을 열었다. 비장하기 그지없는 대치를 뒤로하고, 그야말로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규격 외 강자, 살검(殺劍) 마스터 바로였다.
“이쪽에는 이미 대륙 칠검의 하나와 그에 준하는 다수의 강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의 세계’를 목격한 이상, 미하일 공자님의 기사들을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꼭 저를 예외로 두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우리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무게’는 동등하지 않으니까요.”
사상의 세계를 목격하는 것은 절대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00%의 부정이거나, 100%의 긍정이거나. 그러나 그와 별개로 아바타의 기사와 맞서기 위해 사상의 세계를 펼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기방어의 영역에 가깝다.
“사적 감정은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 법정이 의뢰를 받아 수행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하니까요.”
“의뢰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을 것.”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기 위해 저는 미하일 공자님을 포로로 사로잡고, 랭커스터 가에 휴전 협상을 제의할 생각입니다.”
“……차라리 다행이네요.”
그러나 미하일 랭커스터는 놀라는 일 없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 이상 ‘검은 공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지요.”
끄덕이고 나서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귀검 세필리아 경.”
동시에 미하일 랭커스터가 입을 열었다. 그를 따르고 있는 장미십자 기사 중 하나를 향해서.
기사 하나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갑주의 투구를 벗었다. 투구 밑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여성의 흑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나아가 칼자루 속에 집어넣고 있는 ‘소울브링어’가, 비로소 귀기 어린 서슬을 내뿜었다.
“전장에는 평생의 적도 평생의 우군(友軍)도 없는 법이지요.”
“……!”
황실의 직접 호출을 받아 황도로 돌아갔다고 알려진 대륙 칠검의 일좌.
데일이 랭커스터를 버리고 요크를 위해 그의 힘을 사용했듯이…….
일찍이 요크의 방계로서 요크 가를 위해 전투에 참여한 ‘귀검 세필리아’가, 이제는 랭커스터의 쪽에 서서 그녀의 검을 고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