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 *
일대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고, 그 속에서 데일이 나직이 고개를 돌렸다.
정신 조작과 환술(幻術), 마법 무효화, 청색 마탑이 자랑하는 모략과 거짓의 술수.
비로소 세피아를 묶고 있는 꼭두각시의 실이 잘려나갔다. 데일의 의지를 통해서.
“……!”
일순, 세피아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데일이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고, 그와 동시에 세피아의 몸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아아…….”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세피아가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티타니아와 요크의 영애들은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포옹하며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무엇 하나 없었다.
6년 전, 처음으로 데일의 가정교사가 되어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해왔다. 믿음직한 스승으로서, 그날의 시린 냉기와 고독으로부터 데일을 지켜주는 상냥한 엘프로서.
“어째서.”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세피아를 향해,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입을 열었다.
“세피아 양께서는 소서리스 의회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주셨습니다.”
“임무……?”
“잘 기억해 보세요. 우리가 그대에게 무엇을 명령했고, 그대가 그 명령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처음부터…….”
세피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 끝에, 그대로 데일을 바라보았다.
“데일.”
세피아가 데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마치 그녀의 기억을 더듬듯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세피아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세피아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미소 지었다.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는 미소였고, 그럼에도 늘 그녀가 보여주는 상냥함과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느낄 수 없는 명백한 거리감이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리 암시가 사라졌다고 해서, 데일과 세피아가 함께 쌓아 올린 세월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동시에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한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 마음 자체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세피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잠시 나를 홀로 있게 해줄 수 있느냐.”
세피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바로 그때, 세피아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데일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데일의 심장을 옥죄었다. 이대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암시를 깨트리는 일 없이, 그녀를 향해 애정을 갈구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미스트리스 티타니아, 저는 청색 마탑의 모략이 갖는 우아함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그렇기에 다시금 그녀에게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 천박한 짓을 하지 않으리란 것 역시 말이지요.”
그것은 동시에 암묵의 경고이기도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실 것 없답니다.”
“나아가 세피아 님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최대의 배려를 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지혜로운 엘프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것 같네요.”
“…….”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약속대로 저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을 기점으로, 요크 가의 군세 전체를 지휘하는 것은 전적으로 제 역할이 될 겁니다.”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에 티타니아를 비롯한 요크의 일족들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마음껏 우리를 다루어 주세요, 사랑스러운 저의 낭군…… 필립 공자님.”
차녀 캐서린이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찍이 후방 침투를 통해 요크의 전방 요새를 고립시키겠다는 랭커스터의 술수는 수포가 되었다. 그다음 그들이 취하게 될 행동을 헤아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흑청과 적백, 두 송이 장미의 회전(會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그리고 회전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데일의 활약은 이제 막 시작이었을 따름이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길게 뻗어 있는 동시다발적 전선들이 고착화되고, 전투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는 와중의 일이었다.
요크 측에서, 전선의 고착을 깨트리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오는 모종의 영웅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국 제일의 패배자, 그야말로 ‘패배의 천재’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의 활약이었다.
전방 요새에 최소의 수비 병력을 배치하되, 주력(主力)이 되는 부대를 예비대로 돌려 랭커스터 측의 기동부대를 요격하는 기동 방어.
성 막달레나 기사와 청장미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기동 타격대를 이끌고, 전방 요새 곳곳에서 나타나 승전고를 울리는 승리의 기수. 백작 가를 상징하는 배너를 펄럭이며 필립이 나타날 때마다, 요크와 랭커스터의 누구도 감히 그를 ‘패배의 천재’라고 부르지 못했다.
작센의 ‘검은 공자’를 상징하는 그 어느 활약이나 마법조차 없이, 순수하게 전황을 읽고 적재적소의 움직임을 통해 손에 넣은 승리.
전쟁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필립의 명성이, 미하일 랭커스터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 * *
“후방 침투 부대와 퓨리파이어의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아직 소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 모두가 요크 측에…….”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이 이끄는 기동 타격대에 의한 아군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마치 우리 측 움직임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요격과 각개격파가 이루어지고 있어, 이 이상 다수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필립이 전장에 나타날 때마다, 요크의 캐서린이 항상 곁을 지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아무래도 필립의 무공(武功)은 사실상 요크의 전략과 전술이 아닐까 하고.”
끝없이 쏟아지는 보고들 속에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침묵을 지켰다. 투구 속으로 가려져 있는 입술을 나직이 깨물며.
요크의 요녀들이 갖는 지혜는 결코 정치적 암투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장에서도 늘 남자들의 곁을 따라다니며 실질적으로 지휘를 내린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들이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해도,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수준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하일 랭커스터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검은 공자입니다.”
처음부터 망나니 필립 같은 것은 없었다. 지금 전선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저 존재는, 얼마 전까지 랭커스터 가를 위해 제1차 장미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은 주역이다.
“필립의 기동 방어 부대가 나타나는 즉시, 그것을 요격할 예비대를 꾸릴 겁니다.”
“……!”
“최고 전력의 장미십자 기사들을 소집하고, 나아가 제가 직접 예비대를 지휘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미하일 랭커스터가 결정을 내렸다.
* * *
다시금 랭커스터 측의 대규모 진격이 시작되었고, 기다렸다는 듯 고립되어 있는 랭커스터 측의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필립의 기동 타격대’가 움직였다.
앞서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는 랭커스터 측의 첩보대가 그 사실을 보고했고, 미하일 휘하의 부대가 망설임 없이 그들을 추격했다.
적들의 숫자는 얼추 수백 명 이상의 기병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정도의 병력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동 방어전’을 수행하는 핵심 병력이었다. 이들을 요격하는 것은 동시에 적의 주요 전력까지 몰살할 수 있는 결정적 타격이 될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돌격하라! 요크의 개들을 쓸어버려라!”
비로소 미하일이 지휘하는 장미십자 기사들이, 적의 기동 방어 부대를 향해 돌격했다. 그리고 다가올 충격을 각오하며 미하일이 그의 ‘아바타’를 펼치는 것과 동시에.
휘둘러지는 일검 앞에서, 적의 기병들이 추풍낙엽처럼 맥없이 쓰러져 나갔다.
물샐 틈 없이 몸을 가리고 있는 갑주가 부서지고, 그 속의 정체가 드러났다.
“…….”
멀리서 볼 때는 사람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망자’가 그곳에 있었다.
고도의 무력을 가진 데스나이트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수식을 투영하고 있다.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끝으로 그 망자들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놈, 그놈입니다! 그 비열하기 그지없는 ‘검은 공자’가 저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저, 저는 어디까지나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패배의 천재가 그곳에 있었다.
미하일의 앞에서 비참할 정도로 무릎을 꿇고 애걸하고 있는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이.
그것은 결코 ‘검은 공자’의 위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진짜 필립이 그곳에 있었고, 휘하의 기병대는 어디까지나 눈속임을 위한 머릿수 위장에 불과했다. 이 전쟁에서 쌓아 올린 시체를 ‘하급 망자’로 되살림으로써.
적어도 데일이 가진 재능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 숫자의 하급 망자를 별도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미하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미하일 랭커스터는 ‘검은 공자’가 필립으로 위장해 움직이고 있다는 수를 읽고, 그에 맞추어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검은 공자’는 몇 수 앞서 미하일의 행동마저 예측하고, 필립의 마스크를 벗어버린 뒤였으니까.
나아가 기동 방어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미하일과 랭커스터 측의 주력 부대가 여기까지 움직여버린 시점에서…… 핵심 전력의 부재를 틈타 ‘검은 공자’가 취할 움직임을 상상하기란 절대 어렵지 않았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미하일 랭커스터는 처음부터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미, 미하일 공자님! 제가 요크 가와 동맹을 맺은 것은 어디까지나 불가피하기 그지없는……!”
“당장 그 입을 닥치십시오.”
미하일 랭커스터가 싸늘하게 내뱉었고, 필립의 입이 그대로 닥쳐졌다.
* * *
미하일이 ‘필립의 진실’을 깨닫기 조금 전의 시각.
“필립의 위장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미하일 랭커스터와 장미십자 기사들의 주력이 이동을 마쳤습니다.”
첩보대로 활약하고 있는 고위 암살자가 보고를 올렸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데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겠네요.”
어느덧 요새 방어를 위해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두고, 청장미 기사수도회 내에서도 최고의 정예들로 꾸린 부대가 그곳에 있었다.
미하일의 부대가 이동하고 있는 역방향, 나아가 요크 가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랭커스터 측의 전선을 역으로 돌파하기 위해서.
“신속하게 전선을 돌파하고, 그대로 후방 기동을 통해 랭커스터 측의 전선을 무너뜨릴 겁니다.”
이 전투에는 크게 3개의 열이 존재했다.
제1열을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 농성을 지속하는 요크의 방어군이라고 가정할 경우.
제2열이 그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는 랭커스터 측의 전열(戰列)이며.
그 랭커스터 측의 최정예 병력이 데일의 미끼에 낚여 부재하고 있는 틈을 타, 그대로 종심돌파를 감행함으로써 랭커스터의 후방, 제3열을 손에 넣는 것이다.
제1열과 제3열을 장악한 요크가 제2열의 랭커스터를 포위하고 고립시키는 형국.
일찍이 요크의 영지 후방으로 침투한 장미십자 기사들과 퓨리파이어들이 그렇게 하려고 했듯이.
그러나 어느덧 두 세력 사이의 상황은 180도 뒤바뀌어, 이제는 데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