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 *
두 마리 말이 흑백의 갈기털을 휘날리며 요크 후작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흑색의 후계자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그 마음에 부응하라.’
‘부디 저를 위해, 세피아 님의 힘을 빌려주세요.’
데일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세피아는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제자를 위하는 스승으로서, 나아가 데일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엘프 마법사로서.
여신의 자애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한 상냥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데일의 주머니 속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수정 목걸이,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알려준 진실.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 사랑은 엄밀히 말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엇 하나.
데일이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느냐?”
바로 그때, 데일의 곁에서 말을 몰고 있는 세피아가 걱정스레 되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달리 전황에 불리함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아요.”
데일이 애써 내색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세피아가 여느 때처럼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곁을 지켜줄 것이니까.”
‘내가 네 곁을 지켜줄게.’
무심코 샬롯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 앞에 있는 자가 그토록 증오스러운 아버지의 살해자란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데일을 위해 휘둘러지는 검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소녀가.
그날, 데일의 의지가 어릴 적의 샬롯을 향해 손을 내밀고 지금의 그녀를 있게 했다. 그 행위야말로 청색 마탑의 ‘모략과 거짓’과 무엇이 다르다는 걸까. 어느 의미에서는 세피아를 움직이는 암시 이상으로 악질적이었다.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 일찍이 티타니아는 데일을 일컬어 ‘청색 마탑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라고 말했다. 그녀의 진의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데일이 청색 마탑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위선(僞善)이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흑색공이 그러했듯이.
“늘 고마워요, 세피아 님.”
그렇기에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 데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는 것이다. 그 후에는 약속대로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를 소집하고, 나머지는 그다음의 일이 될 테니까.
* * *
데일이 곧바로 요크의 수뇌부, 다시 말해 요크의 요녀들이 있는 요새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후작령 위에서 주기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가 데일을 찾아왔을 때, 데일의 명령은 오히려 무척 뜻밖의 것이었다.
“첩보대 전체를 복귀시키고,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을 펠릭스 요새로 집결시켜라.”
데일의 새로운 목적지. 랭커스터 가에 맞서 요크 후작령에서 무수하게 쌓아 올린 요새 중 하나의 이름을 담으며.
그날, 퓨리파이어를 통해 얻은 정보가 전투의 향방 자체를 결정할 정도로 결정적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 진격을 통해 ‘숲에 나무를 숨기는’ 미하일의 전략에 맞서, 최소한의 실마리를 손에 넣는 정도는 가능했다.
‘어차피 손에 넣게 될 정보기도 했고.’
그러나 그날, 퓨리파이어 부대를 마주치고 나서 손에 넣은 진짜 수확은 달리 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성채에서, 희미하게 불씨를 지피고 있는 화로.
데일이 네 개의 서클을 가속하며, 시험 삼아 마력을 생성해 보았다.
흑청의 마력 사이로 핏빛 마력이 듬성듬성 정전기처럼 타오르다, 덧없이 사그라들었다.
‘……대충 알 것 같네.’
요새의 망루 위에 서서, 탁 트여 있는 일대의 지평을 바라보았다.
펠릭스 요새는 동시다발적 전선(戰線)을 형성하며 진격하고 있는 랭커스터의 군세로부터, 가장 멀찌감치 떨어진 후방 요새다. 다시 말해, 데일이 전선에 합류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후방에 터를 잡았다는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검은 공자’로 활약할 수 없는 이상, 공식적으로 밤까마귀 기사와 흑색 마탑의 장로를 장기 말로 부릴 수는 없다. 지금 데일이 대행하고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 ‘패배의 천재’ 필립이니까.
사람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패배의 천재가 하루아침에 ‘승리의 천재’로 바뀌는 것을 보고,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랭커스터 측에서는 그 정체를 어렵지 않게 헤아리리라.
그러나 적어도 필립이 처음으로 활약하게 될 첫 전장, 그곳에서 ‘패배의 천재’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적들은 예외였다.
펠릭스 요새에 흩날리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배너를 보는 시점에서, 싸우기도 전에 승리했다며 쾌재를 부르겠지.
일찌감치 데일이 ‘그림자 법정’을 통해 성검의 기병대를 상대로 일회성의 대승을 손에 넣었듯이……. 어디까지나 패배의 천재란 칭호을 가진 필립으로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일회성의 기회.
이 기회가 바로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일발 역전의 묘수가 될 테니까.
* * *
밤이 깊었다. 암야(暗野)에서 활약하는 척후병 등의 존재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랭커스터 측의 군세는 진격을 멈추었다.
동시에 여러 곳의 전선을 형성하고 돌파하는 것이 꼭 장점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의외의 각개 격파에 무력해지고, 넓게 퍼져 있는 전선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진격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기동전이라고 해서, 탱크나 장갑차 등의 기갑 병기를 사용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요크 후작령 내에 수없이 쌓아 올린 요새들의 방어 태세가 고착화되고 있는 이상, 필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묘책을 꺼내 들겠지.
거기까지는 데일의 예상 범위 이내였고, 구체적으로 그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행운의 영역이었다.
요크 후작령의 후방으로 침투해 암약하고 있는 적색 마탑의 ‘퓨리파이어’들.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마법사들, 그중에서도 공성(攻城)의 신을 자처하는 적색 마탑의 적마법사다.
그들이 후방을 집어삼키고, 동시에 랭커스터 측의 군세가 합류함으로써 비장의 일수를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적마법사는 밤중의 행동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야밤중에 흩날리는 커다란 불꽃과 폭음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니까.
양측 모두 전선이 넓게 형성되어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눈에 띄는 야습을 감행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렇기에 이 밤을 틈타 적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요크 후작 측의 전선을 앞뒤로 포위하기 위해, 비교적 호위가 허술한 후방의 요새들을 앞서 점령하려 하겠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소수 정예 강자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후방 요새 펠릭스는 랭커스터 측의 가장 먹음직스러운 요새였다.
첫째, 이곳을 점령하는 시점에서 요크 측의 전선 일대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둘째, 후방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 그 요새를 지키는 것이, 대륙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패배의 천재’ 필립이었으니까.
일찍이 브라티나아 섬에서 절대로 함락시킬 수 없다는 불락의 요새마저 넘겨준 머저리가, 이 백중세의 전장에서 수성에 성공할 리가 없을 것이다.
일찌감치 요크 영지의 후방으로 우회 기동을 마친 랭커스터 측의 기동 타격대, 그들의 지휘관이 내심 쾌재를 내질렀다.
이것은 싸우기도 전에 승리한 전투나 다름없다. 이대로 후방 요새를 함락하고, 앞뒤로 요크의 전선을 고립시켜 승리를 손에 넣는 것이다.
성새 위로 보이는 ‘성 막달레나 기사’들의 갑주와 백작 가를 상징하는 부대기 앞에서,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 * *
그 시각. 요새 내부의 일실에서, 데일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여느 때처럼 세피아가 다정하게 데일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일찍이 마왕령의 지배자이자 ‘작센 자작’으로 거듭나 있는 데일에게 그러했듯이.
“세피아 님.”
“왜 그러느냐, 데일?”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죠?”
“어째서라니, 약속하지 않았느냐.”
세피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의 곁을 지키고, 나아가 너의 행복을 지켜주겠다고.”
“그래요.”
세피아의 말에 데일이 나직이 미소 짓는다. 미소 짓고 나서, 주저하지 않았다.
“……!”
그대로 거리를 좁혀 세피아를 향해 입맞춤했다.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데일에게, 그 또래의 앳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까치발을 드는 일조차 없었다. 오히려 살짝 고개를 숙여 세피아를 향해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세피아가 당황했다. 그러나 당혹은 잠시였다.
“읍, 으음…….”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데일의 어깨를 두 팔로 휘감을 따름이다.
아가페의 사랑, 데일을 향해 그녀가 보여주는 끝없는 긍정과 상냥함, 다정함이 좋았다. 그녀를 통해 그의 세계 속에 깃들어 있는 시린 고독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데일을 받아들여 주는 세피아가 좋았다.
샬롯과 세피아, 무엇이 다르다는 걸까.
이계의 용사로서 과거의 데일에게 꼭두각시의 실을 휘감고 조종하는 자들이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데일의 행위가 그들하고 무엇이 다르다는 걸까.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어느덧 깨닫고 보니, 데일 역시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어느덧 벌써 이렇게나 성숙해졌구나.”
입맞춤 끝에, 세피아가 두 뺨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세피아 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말하고 나서 데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방적으로 그녀를 향해 애정을 갈구하는 지금의 그가, 정말로 세피아에게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데일이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일찍이 티타니아가 준 수정 목걸이의 감촉이 새겨졌다.
망설임 끝에 데일이 목걸이를 꺼내 들려 할 때였다.
“허허, 둘의 오붓할 때를 방해하는 것 같아 참으로 좆같이 송구스러운데 말이지요.”
“……!”
느닷없이 기척이 느껴졌다.
“예상대로 우회 기동을 마친 랭커스터 측의 정예병들이 요새를 따먹기 일보 직전이라오.”
“곧바로 대응할 것이다.”
보고를 올린 살검과 휘하 그림자 암살자들을 향해,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 속에 있는 수정 목걸이의 감촉을 애써 뒤로하고.
세피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린 채였다.
* * *
크게 세 개의 열(列)이 있다.
제1열, 랭커스터 공작령의 군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하고 있는 적들의 열.
제2열, 그에 맞서 무수히 쌓아 올린 요새에서 수성을 거듭하고 있는 요크 후작령의 열.
제3열, 요크 가의 방어 전선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후방의 열.
제1, 2열이 격돌하는 것이 보통의 전쟁이라고 가정할 경우, 대개 이 고착 상태를 깨트리는 것은 제3열의 몫이다.
남몰래 대규모 우회 기동을 통해 적의 배후를 급습하고 요새를 사로잡아, 제1열과 제3열이 제2열을 포위하는 형국. 그렇기에 데일은 일부러 방어 전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제2열이 아니라, 제3열에 참여를 자처했다.
그리고 그 제3열을 노리고 우회 기동을 감행한 랭커스터 측의 정예 부대가 공성을 시작했다.
방어 전선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방의 요새, 펠릭스를 향해서.
비록 기병 돌격을 할 수 없음에도, 나아가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공성(攻城)이란 리스크를 짊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능히 짊어질 가치가 있는 리스크라고 생각될 정도로, 패배의 천재 필립이 갖는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