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 *
처음부터 이 대결 구도의 실체는 명백했다.
그림자와 황금의 대립. 나아가 그림자의 기수를 자처하는 흑청, 황금의 기수를 자처하는 적백의 색. 무척이나 알기 쉬운 색깔론이었으니까.
‘황금의 군주’가 누구를 지칭할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불과 빛의 제국, 그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자.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가진 데일이 어디를 위해 싸워야 할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비록 제1차 장미 전쟁이 데일의 활약을 통해 랭커스터의 승리로 돌아갔다 할지라도, 미하일 말마따나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 후. 공식적으로 요크 가는 데일의 요청에 따라 항복을 제의했고, 랭커스터 가는 그들의 항복을 수락했다. 랭커스터의 기수로서 활약한 제1차 장미 전쟁의 영웅 ‘검은 공자’ 역시 그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랭커스터 가는 장남 리처드를 세뇌하고 홀린 죄목으로 요크 가에게 영지전을 포고했다.
제2차 장미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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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평생의 적도 평생의 우군도 없다.
그렇기에 데일은 바로 얼마 전까지 적으로 맞서 싸운 요크 후작 가의 성내에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을 위해 싸우는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의 이름으로.
이미 랭커스터 가의 기수로서 활약한 데일이, 그 이름을 갖고 박쥐처럼 요크 가에 붙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진짜 필립’을 요크 영주성의 지하에 가둬놓고, 그의 이름을 빌려서 활약하는 수밖에.
“제 존재가 비공식적으로 적들에게 알려지는 것까지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적어도 미하일 공자님께서는 제가 100% 요크 가를 위해 싸우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지요.”
데일의 말에,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제가 ‘백작 가의 장남 필립’으로 활약하는 이상, 상대 역시 마땅히 저를 제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무엇보다 데일의 영지는 제국의 북쪽 끝, 마왕령에 있다. 랭커스터 대공 가에서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이 오갈 즈음에는 이미 전쟁의 향방이 끝나 있을 즈음이리라.
공식적으로, 작센과 랭커스터 사이에 체결한 ‘대 마족 동맹’을 깨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일이니까.
“데일 공자님…… 아니, 필립 공자님께서 이토록 총명한 지혜로움을 가지셨을 줄이야.”
“아아, 참으로 늠름하셔라.”
필립과 혼약을 맺은 요크의 캐서린이, 데일의 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참으로 사랑스럽다는 듯. 그러나 데일은 미동조차 없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할 따름이다. 동시에 캐서린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의지로 요크 가의 힘이 되어드리는 것입니다.”
“미하일 공자님의 뜻대로 놀아날 생각은 없다는 겁니까?”
“빚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지요.”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울러 이 빚은 그대들 요크 가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천하의 ‘검은 공자’께서 우리를 신뢰하고 받아주신 이상, 저희 요크 가는 ‘그림자의 기수’로서 그 의무를 이행할 겁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달리 바라시는 것이라도 있나요?”
“제가 이 전투에서 승리를 손에 넣는 즉시,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를 소집하십시오.”
데일이 말했다. 그의 스승, 세피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고 저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입회할 겁니다.”
“후후, 이미 공자님께서는 능히 그럴 자격이 있으시지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지도를 펼쳤다.
요크 후작성의 일실.
그곳에 있는 것은 데일과 살검 마스터 바로, 그리고 요크의 요녀들이었다.
그 외에 요크의 방계로서 활약한 ‘귀검 세필리아’와 그녀에게 충성하는 철십자 기사들은 더 이상 이곳에 없다. 황실에서 직접 귀검과 휘하 기사들을 호출한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노리고 있었겠지.’
타이밍이 너무나도 공교롭게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적색 마탑이 합류하는 것은 아마도 기정사실일 것이다.
“황실에서는 요크 가의 뒤에 청색 마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심증이 있을 따름이지요. 그러나 ‘검은 공자’가 이 전투에 참여하는 시점에서, 그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뀔 겁니다. 그러나 어차피, 공자님의 합류와 별개로 적색 마탑은 랭커스터 가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을 내렸을 테지요.”
“청색 마탑의 침묵도 끝이 나겠네요.”
“어머나, 그럴 리가요. 청색 마탑은 늘 침묵을 지키고 있답니다.”
데일의 말에, 요크의 티타니아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설령 제가 ‘요크’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도, 또 지금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손에 넣을 때조차 달라질 것은 무엇 하나 없답니다.”
가문의 형태는 ‘미스트리스’와 그녀의 일족들이 제국에 녹아들기 위한 하나의 의태에 불과하다.
“자, 그럼 다 함께 청색의 지혜를 맞대보도록 할까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목각 테이블 위로 커다란 지도를 펼치며.
* * *
랭커스터 가에서 활약하는 규격 외의 강자는 천검(天劍) 하나. 아울러 요크 측 역시 살검 마스터 바로가 활약하고 있다. 설령 칠검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를 고려할지라도, 비대칭 전력이 완벽히 무너져 있는 상황은 아니리라.
아울러 대륙 칠검 급의 강자들이 참여하는 전장이란 결코 칠검 하나의 참전에서 그치지 않는다.
랭커스터 공작 가가 자랑하는 장미십자 기사, 나아가 대륙 칠검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미하일 랭커스터.
데일이 손에 넣은 1차전의 승리는 알기 쉬운 맛보기에 불과했고, 진짜 ‘장미 전쟁’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시종 수비적으로 일관하고 있는 랭커스터 측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남 리처드를 구출하겠다는 ‘명분’이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강이나 산맥 같은 천혜의 요새가 존재하지 않는 요크와 랭커스터 가의 비옥한 영지가 맞물린 일대. 길게 뻗어 있는 두 영지의 경계 일대를 따라, 여러 지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돌파 시도.
동시다발적으로 다수의 전선(戰線)을 형성함으로써 동요를 불러일으키고, 그 동요를 통해 상대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가장 취약한 지점을 파악하고 일점 돌파를 감행하는 것.
장미십자 기사들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기동전 교리’에 입각한 종심돌파 전술이었다.
* * *
타앙!
요새의 망루 위에 엎드린 데일이 ‘그림자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고, 어둠의 총알이 랭커스터 가의 보병 하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소수의 기사와 보병들로 이루어져 있는 제병합동 부대.
이 부대 하나를 저지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들이 요크 후작령의 요새를 점거하기 위해 공성을 시도하고, 데일이 묵묵히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착실하게 꺾여나가는 사기를 볼 수 있었으니까.
“후퇴, 후퇴하라! 모두 퇴각하라!”
일찍이 데일이 ‘그림자 저격수’로서 활약한 것은 성 막달레나 기사들을 상대로 할 때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데일의 철저한 개별 행동이었으며, 랭커스터 쪽에서도 그 실체마저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랭커스터 가의 부대가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조우할 때마다, 그 부대의 지침은 오직 하나였다.
일방적 퇴각.
“요새를 지켜냈다! 랭커스터의 놈들이 도망치고 있다!”
“꼴 좋다, 랭커스터의 개들!”
“필립 공자님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주셨다!”
누구도 아니고, 패배의 천재 ‘필립’의 이름을 칭송하며.
앞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요크 가의 병사들로서는 요새를 지켰다는 승리의 기쁨에 취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랭커스터 측 부대의 피해는 미미하고, 이대로 물러나 재정비 후 다시 ‘재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그렇다고 적 부대를 추격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이쪽의 발목이 묶이는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병력이되, 동시에 병력 전체가 몰살되어도 전황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정도의 규모니까.
‘처음부터 내가 활약할 것을 전제로 전투 교리를 구축하고 있다.’
물러나는 적들을 보며, 데일이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두 대제후의 광활하고 비옥한 영지가 맞물린 이 일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동하는 적 부대의 ‘핵심 전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그것을 위해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이 전선 각지에서 첩보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당장 데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 * *
설령 공식적으로 ‘규격 외 강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요크 가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기사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청장미 기사수도회.
공식적으로 그 기사 조직의 수장은 요크 가의 방계이자 철십자 기사들의 부수장, 귀검 세필리아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기사수도회’의 형태로 귀검 세필리아를 초청해, 가르침을 받는 형식을 갖춘 것이다.
요크 후작 가를 상징하는 청백의 장미가 수놓아져 있는 흉갑.
푸욱!
그 갑주 위로 적백의 오러 블레이드가 내리꽂혔다.
차기 대륙 칠검에 가장 가까운 자, 동시에 랭커스터 대공 가를 계승하게 될 검귀(劍鬼) 미하일의 일검이었다.
나아가 그를 따르고 있는 장미십자 기사들이, 일제히 요크 가의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전투는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선 각지에 펼쳐져 있는 장미십자 기사들의 기병대 편제는 모두 동일하게 짜여 있었으니까. 기병대의 숫자로 적의 전력을 가늠하지 못하게 하려는 위장이었다.
그러나 그 기병대를 이루고 있는 기사들의 질마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섣불리 아바타를 전개하는 등, 척후병들의 의심을 살 행동을 자제하고는 있었으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랭커스터 가의 파상공세 속에서, 어느덧 미하일이 소속되어 있는 기병대는 요크 가의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미하일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지 않고, 미하일조차 투구 속에 철저하게 그의 정체를 감춤으로써.
* * *
“랭커스터 가의 군세는 광범위한 동시접촉을 통해 이쪽의 방어 태세를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그 시각, 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크 후작령 내의 어느 요새.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요크 가의 비열한 약탈’을 손가락질한 주제에, 이 어쩜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행위일까요.”
데일이 입을 열었고, 요크의 티타니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녀를 따르고 있는 요크 가의 영애들과 함께.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머, 제 말이 농담처럼 들리셨나요?”
요크의 티타니아가 되물었다.
“저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될 경우, 조금의 주저도 없이 요크 후작령을 떠날 겁니다.”
“아, 참으로 냉정하기도 하셔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티타니아의 곁에 있는 차녀 캐서린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가까이 하고 데일이 들을 수 없는 귓속말을 속삭였다.
“어머나, 이것참.”
그 말을 듣자마자 티타니아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옵니까?”
“아니요. 한창 전황이 치열한 와중,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네요.”
티타니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지혜로운 요정’께서 공자님을 걱정하신 나머지…… 이곳 영지에 몸소 행차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청색 마탑과 소서리스 의회의 꼭두각시, 나아가 데일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스승 ‘세피아’의 이름을 담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