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 *
청색 마탑 내부의 비밀 결사, 소서리스 의회의 존재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다.
제국이나 적색 마탑조차 그 실체를 오롯이 파악하지 못하는 모략과 거짓의 대가들. 당장 제국의 온갖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흑색공, 나아가 데일조차 요크 가와 소서리스 의회 사이에 일말의 접점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 모두 하나의 대의를 가지고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뱀파이어, 몽마,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이형의 종족들이, 물밑에서 종(種)의 투쟁을 벌이는 각축장에 불과했으니까.
‘그림자와 황금’을 중심으로 끝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이 세계의 실체.
그 속에서 평생의 적이나 평생의 동맹 같은 것은 듣기 좋은 허울에 불과했다.
* * *
요크 후작 가와의 회담을 끝마치고 나서 ‘검은 공자’는 랭커스터 공작령으로 돌아왔다.
요크 가의 여성들에게는 서큐버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몽마의 피와 지혜를 이용해 요크 후작 가는 제국 유수의 대제후 중 하나로 거듭났고, 그렇게 그녀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국의 실세로 거듭났다.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의 실체. 아무 까닭 없이 그녀들이 ‘요크의 요녀’라 불리는 게 아니다.
적어도 거기까지는 데일과 흑색공 역시 ‘제국의 내부자’로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동시에 침묵하고 있는 청색 마탑의 지배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는 데일조차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제국 황실이 자랑하는 귀검과 성검의 힘을 빌린 점에서 알 수 있듯, 요크 후작 가는 노골적으로 황제파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모략과 거짓을 사상(思想)의 주춧돌로 삼는 청색 마탑의 첩자로서.
그렇기에 그녀들은 목적을 수행하고자 기꺼이 황실과 적색 마탑의 힘을 빌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성검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성검은 쓰러져야 마땅할 자였답니다. 제국 역시 이 이상 성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티타니아는 데일과 그림자 법정이, 또다시 성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리란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예측이 빗나가버린 것은 오직 하나, 그 시기가 너무나도 빨랐다는 것이다.
랭커스터 가의 동맹, 나아가 요크 후작 가의 제의 사이에서 데일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럼에도 데일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 * *
랭커스터 공작성의 일실.
“미하일 공자님.”
“아, 데일 공자님.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책상에 앉아 있는 미하일 랭커스터가 흘끗 고개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종지부가 찍힐 듯합니다.”
데일이 말했다.
“성검을 사로잡고, 규격 외 강자들의 저울추가 무너져버린 요크 가에서 항복의 제의를 해왔습니다.”
“호오.”
“이대로 미하일 공자님의 후계 계승을 받아들이되, 장남 리처드 공자님을 요크 가의 데릴사위로 받아들이겠다는 제의를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행이네요.”
미하일이 내색하지 않고 미소 짓는다.
“이토록 쉽게 요크 후작 가의 위협을 물리쳐주실 줄이야. 역시 ‘검은 공자’의 이름에 걸맞은 위업입니다. 그리고 저와 랭커스터 가는, 기꺼이 우리의 ‘동맹’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랭커스터의 후계자’로서 저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합니다.”
미하일이 미소 지었다. 비로소 그의 손에 떨어지게 될 후계자의 이름을 음미하며.
“그래서 적색 마탑과 손을 잡았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되물었다.
“랭커스터 대공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힘을 빌려 형을 세뇌하고 요크 가에 그 책임을 떠넘기신 겁니까?”
“…….”
미하일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무척이나 불길한 침묵이었다.
“삶이 무척이나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침묵 끝에 미하일이 말을 잇는다.
“검의 재능, 최고의 핏줄…… 태어날 때부터 세상 전부를 손에 넣고, 그저 발밑의 성공 가도를 밟아가는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설령 정식으로 대공 가를 계승하지 못할 차남의 서열조차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주어졌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바랄 필요가 없었지요.”
차기 대공이 될 장남 리처드의 곁을 보좌하며, 발밑의 레일을 따라 순항하는 삶을 택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입니다.”
“…….”
“일찍이 제국 제일의 재능이라 불린 제 검이, 그날 ‘검은 공자’의 검 앞에서 패배했을 때.”
파이트 클럽에서의 그 승부가 미하일의 삶을 바꾸었다.
“저는 비로소 제가 ‘우물 속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적색 마탑의 어린 후계자조차 예외가 아니었을 테지요.”
레이 유리스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미하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우물 바깥의 세계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알량하기 그지없는 방식을 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적색 마탑과 손을 잡은 계기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비로소 미하일 공자님께서 바라는 것을 손에 넣으셨네요.”
미하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어느덧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달린 미하일의 칼자루가 쇄도했다.
신속에 가까운 발검. 미하일의 검이자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가 데일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지금의 제 검이 공자님에게 닿을 수 있을까요?”
“보시다시피, 잘 닿고 있네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데일 공자님에게는 참으로 이 세상이 우습게 느껴지겠지요.”
“그럴 리가요.”
그 말에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세상을 우습게 본 것은 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미하일 공자님이었습니다.”
미하일이 침묵을 지켰고,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약속을 이행했고, 이제는 랭커스터 가의 후계자께서 동맹의 의무를 이행할 때가 왔지요.”
작센 자작으로서 지배하고 있는 북부 마왕령. 거기에 맞서 랭커스터 가의 힘을 빌리겠다는 이야기.
“동맹의 의무는 이행될 것입니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적색 마탑 역시, 우리 ‘대 마족 동맹’의 대의에 따라 그들의 불꽃을 빌려주기로 하였지요.”
“참으로 믿음직하네요.”
데일이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형님을 세뇌하고 꼭두각시로 조종한 요크 후작 가는 그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겠지요.”
랭커스터 가의 후계를 손에 넣기 위한 그의 야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크의 행위로 뒤집어씌우며.
“……전쟁을 끝내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저희는 요크 후작 가의 항복 제의를 받아들일 겁니다.”
미하일이 미소 지었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고, 그다음에 우리 ‘랭커스터의 차례’가 찾아왔을 따름이지요.”
“역으로 요크 가를 향해 영지전을 포고할 셈입니까?”
“데일 공자님께서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주셨습니다. 요크 가와의 일들이 처리되는 즉시, 대 마족 동맹의 의무를 수행하리라 맹세하지요.”
하나의 전쟁이 끝났고, 그 즉시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질 전쟁에 대해서는 데일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데일은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미하일 공자님의 말마따나, 이 이상은 제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니지요.”
* * *
그날 새벽.
“나를 따르라, 자랑스러운 성 막달레나 기사들이여!”
밤이 깊어 있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야습을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랭커스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요크 가조차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적전(敵前) 기동이었다.
어디까지나 데일이 흘린 ‘성검사가 잡혀 있는 장소’의 정보를 듣고, 휘하에 남아 있는 기사 전력 전부를 긁어모아 움직이는 성검의 구출 작전. 그마저 채 일백조차 되지 않는 소수의 병력이었다.
“……아니, 이걸 진짜로 와?”
야습에 앞서 일찌감치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데일이었으나, 막상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야말로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림자 법정, 데일이 파놓고 있는 사지를 향해 이토록 당당하게 기동을 하다니.
“허미, 쉬펄.”
그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혀를 내둘렀다.
“돼지네 아들내미가 보통 머저리 새끼가 아니라더니, 아주 그냥 특급 등신이 따로 없네.”
그때였다. 마스터 바로를 필두로 어둠 속에서 진(陣)을 준비하고 있는 그림자 살수를 향해, 데일이 입을 열었다.
“마스터 바로.”
“모가지 딸 준비는 다 되었소.”
“아니, 따지 말라고.”
그러나 데일이 말하는 것은 무척 뜻밖의 명령이었다.
“적장 필립을 사로잡고 나서, 나머지 놈들이 무장 해제를 할 정도의 피해를 주는 정도에서 그쳐라.”
“어, 이제 와서 몸값이라도 받아낼 생각이오?”
“몸값보다 더 좋은 게 있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일이 입을 다물었다.
랭커스터 공작령 내의 작은 소도시를 향해, 용맹하게 돌격하고 있는 ‘망나니 필립’을 보며.
* * *
상황이 정리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필립에게 상황을 깨닫게 하고, 순순히 굴복시키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필립 공자님.”
무릎 꿇고 있는 패배의 천재를 향해, 데일이 입을 열었다.
“네, 네놈……! 또다시 교활하고 비겁한 수작으로 나를 함정에 몰아넣다니……!”
“아, 몸 둘 바 없는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데일이 남의 일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촤악!
그림자 암살자의 검이, 포로로 잡혀 있는 성 막달레나 기사를 향해 내리그어졌다. 고작 일백 남짓의 기사들이다. 성검이나 오러 마스터 급의 강자조차 없이.
“히, 히익!”
그러나 그 멍청한 행동이 데일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호재가 되었다.
“이후 ‘제1차 장미 전쟁’이 끝나기 직전, 필립 공자님께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총명하고 과감한 전략’으로 성검을 구출하고, 무사히 요크의 영지로 돌아갔으며.”
데일이 말을 잇는다.
“추후 요크와 랭커스터 사이에서 벌어질 ‘제2차 장미 전쟁’에서, 제국 전체에 이름이 울려 퍼질 명성을 쌓게 될 겁니다.”
일순, 데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필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필립을 포박해서 성검이 있는 곳에 처넣고, 동이 트기 전에 랭커스터 공작령을 벗어나자.”
“작센 공작령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오?”
“랭커스터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지. 그러나 우리는 아직 돌아가지 않는다.”
마스터 바로의 물음에 데일이 답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요크 후작 가를 위해 싸울 테니까.”
“……뭣이여?”
마스터 바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랭커스터 놈들 손에 승리를 쥐여줘 놓고, 이제 와서 댁 손으로 박살 내버린 요크 쪽에 들러붙겠다고?”
“미하일 랭커스터가 처음부터 나를 가지고 놀았다. 이 싸움을 시작한 명분(名分)부터가 사기극이었지.”
랭커스터 가의 장남 리처드를 세뇌하고 홀린 것은 애초에 요크가 아니었다. 데일에게 패배하고, 후계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한 미하일 랭커스터의 야망이었으니까.
“이대로 뒤통수 맞고 북부 영지로 돌아가서, 내가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나?”
“두 다리야 뒤통수 때린 놈이 쭉 뻗고 자겠지.”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낄낄거렸다.
처음부터 데일은 미하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적백과 흑청의 장미, 랭커스터와 요크 사이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데일 역시 이대로 미하일의 손바닥 위에서 일방적으로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랭커스터의 기수(旗手)로 활약한 ‘검은 공자’가, 박쥐처럼 손바닥 뒤집듯 요크 가에 붙어 활약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검은 공자’는 이후의 전투에서 손을 뗄 것이며, 요크 가의 쪽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데일의 몫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날 부를 때는 작센의 ‘검은 공자’가 아니라…….”
요크 가의 차녀 캐서린과 혼약을 통해 동맹을 맺은 백작 가의 장남 ‘필립’의 몫이 될 테니까.
그의 앞에 사로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필립을 보며, 데일이 덤덤히 말을 잇는다.
“패배의 천재,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이라고 부르도록.”